84화 엇갈림
84화 엇갈림
“우와! 금산군(金山君)이랑 산군신녀(山君神女)들이다!”
어떤 아이가 우리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바로 아주머니는 아이의 입을 막고 골목으로 빠졌다. 엉덩이 때리는 소리가 나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딸려왔다.
그러나 애초에 아이가 우리를 보며 큰 소리를 안 냈어도, 이미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명의 거인, 두 명의 아이로 이루어진 희한한 구성에,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그러면서 혈랑파의 협박을 거절하고 절강을 헤집고 다니니, 일약 유명인사가 되는 건 당연했다.
“···은거 기인들하고 제자인가?”
“강호에 기인이사가 많다는데 정말이었군.”
내 장담대로 우리는 절강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들이 되어있었다. 내가 말한 딱 이틀 차에.
당장 어느 무인을 살펴봐도 이틀 안에 별호를 얻은 무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무인들이야 그냥 칼만 휘두르고 다니지만, 이런 특성이 있으니 별호도 빨리 생기는 거다.
내 별호는 금색 호랑이 가면이라 금산군이었고, 다른 세 명은 공교롭게도 여자의 가면이라 산군을 모시는 신녀, 즉 산군신녀가 됐다.
“이 나이에 또 다른 별호를 얻게 될 줄은 몰랐구나.”
“저도 제 첫 별호가 이렇게 생길 줄은 몰랐죠.”
곽진도와 금월상이 투덜거렸다. 당연히 장난으로 부르는 것이다. 신녀라고 보기에는 곽진도와 금월상의 몸은 너무 건장했다.
“근데 그거 아는가? 저거 삼 신녀가 진짜 다 여자라는 얘기가 있네.”
“뭐? 저 불룩 튀어나온 목젖이 자네 거보다 큰 것 같은데?”
“이 사람아. 축골공 같은 걸 쓴 게지. 몸을 줄이는 것도 가능하니 늘리는 것도 가능할 거 아닌가.”
“그런가?”
사람들은 그런 헛소리들까지 하고 있었다. 선하령에서 만난 상인들이 꽤 활약을 하는 모양이다.
심지어 그들은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 같은 역할이다. 허풍을 치기 좋아하는 중원인들의 특성상 이야기는 마구잡이로 퍼질 게 분명했다.
“혈랑파가 너무 패악질을 하니 옥황상제(玉皇上帝)님이 내리신 분들이라고 하네.”
“예끼, 이 사람아. 그건 좀 아니지.”
“아니야. 내 아는 사람의 딸의 당숙이 가면을 벗으니 빛만 보였다고 하더군.”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정말 별의 별 이야기가 다 쏟아지고 있었다. 혈랑파가 날뛰어서 사람 수가 적어졌다지만, 항주는 항주였다. 소주와 함께 중원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곳은 침체됐어도 이 정도였다.
곽진도가 내게 조용히 말했다.
“오히려 혈랑파 사람들이 이제 안 오는구나.”
“각개로 와봤자 의미 없다는 걸 깨달았겠죠.”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입맛을 다셨다. 내가 기대한 바는 아니었다. 내 태을헌원진기는 사기를 감지할 수 있는 만큼, 당연히 마기(魔氣)도 감지가 가능하다.
덤벼오는 사람들 중 마기가 있는 사람이 있으면, 다음에 할 것이 더 명확해졌을 텐데 마기를 풍기는 사람은 없었다. 허나 그건 그저 내 바람 중 하나였다. 본 목적은 그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었으니까. 그건 확실히 달성했다.
근데 그것과 별개로 혈랑파 무력 개개인의 수준은 한심할 정도였다. 조장이라는 게 일류 정도의 무인이니 나와 곽진도는 검을 꺼낼 겨를도 없었다. 금월상은커녕 한유림에게도 고전하는 녀석들이 태반이었다.
꽤 많은 전투가 벌어졌지만, 그건 모두 상산에서 항주로 오는 관도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막상 절강의 중심인 항주에는 혈랑파 사람들의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애초에 항주에 주재하던 놈들도 아예 다 뺀 것 같군.”
곽진도가 주변을 둘러봤다. 항주에 혈랑파의 무인이 없을 리가 없다. 일부러 후퇴한 것으로 봐야 했다.
“그럼 여기서 그들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지. 그냥 우리가 지나가길 바라며 조용히 있는 다거나, 아니면 죽기 살기로 공격하거나.”
곽진도가 계속 말했다.
“근데 이렇게 가끔 정파의 거인들이 사파를 일신으로 박살 낼 때가 있는데, 보통 그러면 사파들은 숨어버리고 거인이 사라지면 나오거든.”
“이번은 아닐 겁니다.”
나는 장담했다. 원래도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항주로 오면서 더 확신했다.
혈랑파 사람들은 정말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도로마다 보호세를 걷고 있었다. 요지(要地)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더한 돈을 걷고 있었으니.
굳이 압박할 필요 없는 무인들을 압박하고, 세를 올려서 받는다는 건 문주의 물욕과 자존심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언젠가 옵니다.”
“그럼 우리는 이제 뭐하나?”
곽진도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밖에 나와있던 상인 한 명이 외쳤다.
“거, 산군님들! 여기 와서 만두 한 접시 하고 가시게나. 내 청주도 무료로 드리리다.”
“이 사람아, 오늘 보호세 안 낸 걸로 생각하면 죽엽청 정도는 대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로 오시게들.”
순식간에 상인들은 불이 붙었다. 그들도 눈치를 챈 거다. 항주에 있는 혈랑파 사람들이 모두 빠졌다는 걸 말이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가는 곳을 선택하는 게 꽤 큰일일 터였다. 금산군과 산군신녀들이 왔다간 곳이라고 하면 절강의 사람들에게는 꽤 팔리지 않겠는가.
나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가장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점심 먹으면서 생각해보죠.”
곽진도와 금월상의 표정은 가면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어이없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쾅! 쾅! 쾅!
엄조후는 주먹으로 책상을 계속 내리쳤다. 책상은 곧 움푹해지더니 쩍 부셔지고 말았다. 흑단(黑檀)으로 된 값비싼 것이었지만, 당장 그런 것이 눈에 뵈지 않았다.
제일 답답한 건, 그 네 명이라는 놈이 당최 어떤 놈들인지 감도 안 잡힌다는 것이었다. 어떤 놈은 키가 큰 거한 네 명이라고 하고, 어떤 놈은 아이 둘, 어른 둘, 어떤 놈은 여자 넷이라고 하고, 떠도는 소문이 워낙 다양했다.
엄조후의 앞에는 장소열이 있고, 그 뒤에는 삼십 명 정도의 혈랑파 대주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장소열.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엄조후가 물었다. 옆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장소열은 뜸들이고 말을 이었다.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말해봐라.”
“첫째는 그들의 경지나 정체가 밝혀질 때까지 아니면 절강에서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엄조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성미는 원래 급했지만, 돈을 벌면 벌수록 더욱 급해졌다.
장소열은 눈치를 보더니 시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면 최대한 많은 전력을 데려가서 일제로 타격하는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건 위험부담이 있죠.”
엄조후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이제 장소열의 뒤에 서있는 삼십 명의 대주를 바라봤다.
그들이 바로 혈랑파의 조장 위 대주들. 대주들의 실력은 대략 일류 상위에서 절정 하위를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다. 그들은 사실 원래 대개 다른 사파 무리의 대장들이었지만 혈랑파에 흡수된 이들이었다.
엄조후에게 그들에게 복종한 이유는 단순했다. 혈랑파에 있으면 돈을 많이 번다는 것. 그리고 엄조후가 사파에서 흔치 않은 초절정 고수라는 것 때문이었다.
돈만 되면 이합집산하는 사파의 생리였다. 엄조후도 처음에 장문인급 대주들은 좀 대우를 해줬지만, 사실 그것도 초반에만 그쳤다. 혈랑파가 절강 전부를 먹을 때부터 그런 존중은 사라지고, 엄조후는 그들을 아예 하대하기 시작했다.
“대주들. 분명 내가 소집 명령을 내리기 전에도 그 산고양이 놈들 근처에 있던 사람도 있었을 텐데.”
엄조후의 표적이 바뀌었다. 장소열은 눈치껏 옆으로 빠졌다.
확실히 비상 상황이기에 사람들을 모두 본파로 들여왔지만, 그 이전 행동의 문제였다.
“그러니까 그 금산군인가 산군신녀들인가 뭔가 하는 새끼들한테 다 도망쳐 나온 거지?”
“문주. 원래 정체 모를 고수가 난장을 까는 상황에는 잠시 숨을 죽이는 게 맞···”
누가 발언을 했다. 그와 동시에 엄조후 의자 왼쪽에 있던 현무 조각상이 날았다. 대주의 머리칼을 스친 현무가 뒷벽을 때려 와장창 깨졌다.
“도망친 겁쟁이들이 변명하는 것만큼 역겨운 것도 없다.”
엄조후가 살기를 내뿜고,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대주들은 서로의 눈치를 봤다. 한기가 돌만큼의 침묵이었지만, 엄조후는 혼자 불타올랐기에 그 한기를 느끼지 못했다.
“모든 대주들은 지금 항주로 간다. 나도 포함해서 말이야.”
엄조후가 으르렁거렸다. 엄조후 옆에서 괜한 불똥을 맞기 싫어 조용히 있던 장소열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적어도 두 명은 남겨놔야 합니다. 주산파도 전력을 한 번에 많이 뺐다가 망한 겁니다. 만약 전력의 삼 할만 데려갔어도 주산파는 아직 남아···”
염조후는 바로 벌떡 일어나 장소열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쩡!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소리가 아닌, 솥뚜껑을 치는 소리가 났다. 내공을 담아서 때려, 장소열의 입 안에는 피가 한 움큼이 나왔다.
“어디 옛 얘기를 들먹이는가. 아주 오냐오냐하니까 도를 넘는군. 일개 상계놈 주제에.”
엄조후는 여전히 부들거리고 있는 장소열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문 바깥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대주들은 장소열을 힐끗 쳐다보더니 모두 엄조후를 따라갔다. 장소열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동정심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아무리 혈랑파가 장소열의 지략으로 컸다고 해도, 지금은 엄조후의 것이었다. 영광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지킬 힘이 없으면 뺏길 뿐. 당연한 이야기였다.
“어떤 놈이 가면을 쓰고 장난질을 치는지는 몰라도, 얼굴을 아주 짓이겨놔야겠군.”
엄조후가 으르렁거렸다. 주산군도에서 혈랑파의 정예들이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
삐이익.
점심을 먹고 나오자 매가 우리 머리 위를 맴돌았다. 곧바로 우리는 항주의 사람 없는 골목으로 빠져서 손을 흔들었다.
곧 매는 발톱으로 내 팔목을 꽉 물었다. 내가 기로 팔을 보호하고 있지 않았다면 꽤 심한 상처가 났을 거다. 매를 사기는 했지만, 아직 덜 길들여진 탓이었다.
“혈랑파의 추가 정보군요.”
“음, 재희가 열심히 일하는구먼.”
곽진도가 궁금하다는 듯 말린 종이를 바라봤다. 명재희는 지금 초보 비각주지만 좋은 성과를 내는 중이었다. 사실 혈랑파의 내부 정보는 그렇게 많이 안 알려졌다고 했다.
혈랑파가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생문파기도 했거니와 현재 중원의 시선이 모두 무림맹에 가있기 때문이다. 거의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돈을 잘 쓰는 모양이었다.
“···그렇군. 이게 제일 중요하지. 무공 수위.”
내가 종이를 펼치자, 곽진도는 바로 가장 중요한 걸 지적했다. 나 역시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절정 고수가 스무 명 남짓이군요. 문주는 또 초절정이네요.”
“···동시에 덤비면 좀 힘들겠는데.”
곽진도가 혀를 찼다. 절정 스무 명에다가 초절정 한 명. 그래도 사파치고는 나름 큰 세력이었다. 주산파보다 무게감은 확실히 더한 느낌이었다. 문파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건, 문파에서 제일 고수가 어떤 경지냐에 따라 달라지니 말이다.
곽진도의 말에 금월상과 한유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걸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
금월상이 물었다. 나는 말을 시작했다.
“지금 우리에 대한 소문들이 많아, 그들은 최대한 경계를 하며 나올 겁니다. 전 적어도 정예의 반수 이상은 나온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리고 저희는 지금부터 부양(富陽)과 동려(桐慮) 쪽으로 돌아나가 바로 주산으로 향할 겁니다.”
그 말에 곽진도가 손뼉을 쳤다. 내가 말하는 바를 바로 알아낸 것 같았다.
“성동격서(聲東擊西)에 만천과해(瞞天過海)로구나! 하긴 우리는 주산파의 기록이나 마교의 흔적을 찾으러 가는 거지, 혈랑파와 싸우는 게 목적이 아니지 않느냐.”
내가 미소를 지었다. 이게 아까 상인들 때문에 끊긴 말들이었다.
이제 속이는 것의 마지막 절차만 남은 터였다. 나는 바로 가면을 벗었다. 곽진도와 한유림, 금월상도 그 의미를 알았다.
어차피 혈랑파에 도착하면 가면이든 뭐든 의미 없었다. 지금부터 벗고 있는 게 맞았다. 어차피 우리 얼굴을 아는 사람들은 없으니 말이다. 옷은 굳이 갈아입을 필요 없었다. 일부러 흔한 검은 무복을 입고 왔으니 말이다.
“가시죠.”
*
꿈틀.
대전에 혼자 피를 흘리며 남아있는 장소열이 두 손을 땅에 딛고 일어났다. 목을 좌우로 돌려서 꺾이는 소리가 났다. 아까 눈을 깔고 있던 장소열의 얼굴이 아니었다.
“씁, 이번에도 오래는 못 갔군. 그래도 주산파보다는 오래가길 바랐는데.”
장소열이 입에 고인 핏물을 퉤 뱉었다. 그는 턱 부근에 손을 대고 인피면구를 벗었다. 하얀 구레나룻이 있는 중년의 사내였다.
절강을 망쳐놓으려고 최대한 미친놈을 문주로 만들어 놓긴 했지만, 돈맛을 너무 급하게 봐서 사람이 쓸모가 없게 됐다.
저렇게 사람들을 한 번에 끌고나가는 꼴이라니.
“어떤 놈들일까.”
그래도 장소열 역시 궁금했다. 네 명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라. 정파의 모든 유력인사들을 꿰고 있는 장소열이지만, 그런 짓을 쉽게 할 사람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궁금하지 않아도 됐다. 아직 천마신교가 드러날 때가 아니니. 장소열은 혈랑파에 있는 업무일지들을 챙겨 또 다른 혈랑파를 만들면 그만이었다.
장소열은 서북쪽을 바라보며 큰절을 올렸다.
“천마님, 오늘 제 무능을 고백하나이다.”
절을 하는 그의 몸에서, 보라색 기운이 점차 풍겨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