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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세가 절대무신-81화 (82/225)

81화 내가 세가에 없을 때

81화 내가 세가에 없을 때

일단 한유림은 바로 보냈다. 난 검후하산이라는 사건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니, 명재희가 들고 올 정보로 개요를 먼저 파악할 셈이었다. 굳이 모르는데 중구난방으로 질문해봤자, 그녀의 상처만 헤집는 꼴이 될 거였다. 적어도 그녀에게 좋은 기억은 아닐 거니까.

다음날 나는 아침을 벽곡단으로 때운 다음 본원 집무실에서 해남파가 준 실전 무공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때 기철이 들어와서 내게 명재희가 왔다고 알렸다.

내가 황금세가로 도착한 이후 이틀이 지나서였으니, 거의 바로 온 셈이었다. 난 명재희를 안으로 들였다.

“안녕? 아니, 이제 가주님이라고 불러야 되나?”

기철의 안내에 따라 들어온 명재희는 짧게 인사를 했다. 이틀 만에 만났으니 극적인 인사는 필요 없었다. 명재희나 나나 그런 성격도 아니었고.

“그럴 필요 없어. 그게 더 불편하니까.”

난 대답했다. 명재희에게 그런 선을 그을 필요는 없었다. 긋지 않아도 넘어오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녀는 바로 내 책상 앞에 짐을 풀었다. 얼핏 봐도 예상대로 검후하산의 정보들이었다.

“생각보다 꽤 많네.”

“검후하산 사건만 아니라, 관련 정보도 주셔가지고.”

명재희는 실실 웃었다. 역시 무림맹과의 동맹은 공고했다.

“무림맹은 어때?”

“아. 요즘 엄청 바뀌고 있더라. 무인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고, 찾아오는 낭인들도 많고.”

“그래?”

잘 된 일이다. 무림맹이 빠르게 강해지면 나에게도 역시 좋은 일이다.

그때 본원 안에 햇빛이 밝게 비쳤다. 본원 주변에는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햇빛이 직접 올 일이 없는데, 그럼에도 끈덕지게 들어오는 것들은 있었다. 그 햇빛이 우연치 않게 명재희의 얼굴에 스칠 때 난 오묘함을 느꼈다.

“안 좋은 일 있었어?”

내가 묻자, 명재희가 바늘에라도 찔린 듯 몸을 짧게 떨었다.

“···아니?”

“표정이 안 좋아보여서.”

난 명재희를 계속 바라봤지만, 명재희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얼굴을 창문 쪽으로 돌렸다. 그녀는 잠시 바깥을 바라보는 듯하더니 말했다.

“무한에서 개인적인 일이 있었어. 근데 말은 못해.”

“그렇구나.”

이번에도 역시 짧은 거짓말이었다. 그 이유는 몰라도, 그녀의 대화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가져온 정보부터 봐야지.”

명재희는 주제를 돌렸다.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난 해남파의 비급을 뒤로 밀어뒀다. 저건 기한이 없는 일이었지만, 이건 바로 처리해야 했다.

“아직 요약 분석 안했지?”

“응? 어.”

무한에서 바로 온 것이니 그럴 시간이 없었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반씩 나눠서 요약 분석을 해보자.”

“그래.”

명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일까. 비장함이 느껴졌다.

*

명재희도 정보 요약분석은 해봤지만, 그녀는 정보 전달이 주 임무였다. 요약분석은 보통 각주나 부각주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변명을 하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명재희는 도리어 호승심을 태웠다. 어떻게 보면 호승심이 아니라 자존심이었다. 금목환은 자신을 비각주로 세웠다.

정보일만 다루면 되는 비각주가, 모든 일을 하는 가주보다 느리다니 말이 되는가. 내심 자신도 있었다. 그래도 몇 년 이상 정보를 다뤄본 명재희였다.

그리고 일 각 후. 명재희는 자존심이 반으로 접혀버렸다.

‘···어떻게 하는 거야.’

고개를 들어 힐끔 보니 금목환은 가운데에서 자료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기고 있었다. 오른쪽이 요약분석이 끝났다는 것이고, 왼쪽이 남았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금목환의 속도였다. 한 손으로 정보를 들어서 보고, 한 손으로 글을 써낸다. 바닥에 놓지도 않고 그 정보는 오른쪽으로 가있다. 마치 글은 제대로 읽고 요약하는 건가 싶었다.

금목환의 일처리는 사람의 눈을 잡아놓는 마력이 있었지만, 명재희는 다시 마음을 잡고 몰두했다.

하지만 결국 금목환이 할당량을 끝냈을 동안 자신은 반도 채우지 못했다.

자존심이 상하는 건 금목환은 자신이 끝내놓고도 어떤 말도 안 했다는 거다. 안 끝났냐는 둥, 그런 얘기도 없었다. 뒤에 밀어놨던 책을 다시 꺼내 보고 있었다.

천재의 여유로움인가. 명재희는 괜히 분해서 눈을 치켜뜬 채 금목환을 바라봤다. 금목환은 바로 눈동자를 돌려 명재희의 눈과 마주쳤다.

“왜?”

“···아니야.”

“천천히 해.”

금목환은 그런 무심한 한 마디를 던지고 다시 책으로 집중했다.

명재희는 머리를 털었다. 그래. 자신이 더 익숙해지면 될 일이다. 이제 자신은 비연각의 은영조에 속한 일개 조원이 아닌, 황금세가의 비각주였다. 그 책임감은 명재희의 어깨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렇게 해는 하늘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찍은 다음 내려가고 있었다.

*

난 그녀가 요약분석을 다 마치자 해남의 비급을 덮고 다시 뒤로 밀었다.

“고생했어.”

명재희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일을 마쳤다. 그녀는 책상에 푹 머리를 박으며 읊조렸다.

“가주보다 일처리가 늦는 각주라. 자격이 없는 거 아닐까···?”

“아니야. 넌 잘했어.”

물론 난 명재희의 능력을 보고 데려온 것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믿을만한 사람이었냐, 다. 황금세가는 강호에 인맥은커녕 견제하는 사람들만 많으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거다. 그런 점에서 명재희가 비각주를 맡아준 건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 위로는 상처에 소금을 치는 격이야.”

명재희는 고개는 들었지만 여전히 내 업무처리 속도에 밀린 게 신경 쓰이는 듯 시무룩했다. 하지만 내게 무공, 진법, 행정으로 나눠서 제일 많이 했던 걸 고르라면 행정이니, 그녀가 밀리는 건 당연했다.

“아무튼 검후하산이 되게 석연치 않게 끝났구나.”

우리는 곧바로 서로 요약 분석한 정보를 공유하고 교차로 검증했다.

내가 본 정보에서 검후하산은 광기에 물든 검후가 회계산의 강한 계곡에 휩쓸려 사라진 걸로 끝났다고 한다.

그 이후 계곡의 하류에서 검후인지 알아볼 수 없이 형체가 뭉개진 시체가 발견됐는데, 무림맹과 구파일방은 그걸 검후로 생각하고 마무리를 지은 거다.

“제대로 조사할 수 없었다고 해. 검후가 그렇게 발견된 이후에도 사파들은 더욱 날뛰었고, 또 그 틈을 타서 주산파가 보타암을 습격했으니까. 정파는 좀 혼란스러웠겠지.”

명재희가 말했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검후하산의 개요부터 전개까지 하나씩 되짚어봤다.

그것도 분명 내게 도움이 됐지만, 제일 양질의 정보는 검후하산과 관련된 정보에서 나왔다.

주산파가 황금세가를 무리하게 공격한 것 때문에 멸망한 다음, 다른 사파의 무리가 절강에 생겼다는 것 말이다.

“그럼 절강은 아직도 난리구나.”

“구파일방이나, 무림맹이나 항주(杭州)로 여행가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지.”

크게 보면 절강의 현 상황 역시 검후하산이라는 사건의 영향이었고, 무림맹에서는 이 정보까지 준 것이다. 대단한 배려였다.

“근데 주산파의 빈 건물을 쓰고 있다라.”

“의미 부여를 많이 하는 정파와 달리, 사파 애들은 그냥 써. 주산파도 큰 문파였으니까, 그대로 그 건물을 쓴 거겠지?”

“그렇다고 해도, 그 안에 있던 주산파의 기록들은 남아있을 거니까.”

“···그렇네.”

분명 주산파가 보타암을 먹은 만큼, 관련한 기록이 남아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곳을 심지어 다른 곳이 점검하고 있다면, 최대한 빨리 가서 확인해야 했다. 절강을 가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제 대략 정보 정리는 끝났다. 나와 명재희는 눈을 마주쳤다. 그 다음 할 일은 명확했다.

“이제 한유림을 부를 차례겠네.”

직접 보타암에 있었던 아이. 무림맹이 가져다 준 정보는 많은 도움이 됐지만, 보타암 내부의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적유엽의 말대로 아주 폐쇄적인 문파였다.

보타암의 정체성은 문도들이 정말 출가를 한 사람들이었다는 거다. 수련 방법이 검술일 뿐이었고. 그래서 대개 중원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불가피하게 나갈 일이 생기면 허름한 옷을 입고, 검을 보타암에 두고 나갔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유림의 말은 분명 도움이 될 거였다.

“기철아.”

난 나지막하게 불렀다. 기철이는 바로 문을 열었다.

“네, 가주님.”

“옥묘각에 있는 한유림이라는 아이 좀 불러줘.”

“네, 알겠습니다.”

기철은 바로 허리를 굽힌 다음 뒷걸음질로 나갔다. 이제 우리는 한유림을 기다리면 됐다. 명재희는 작게 웃었다.

“엄청 바뀌었네.”

“원래 이렇게 됐어야했어.”

“신기해. 네가 거친 사람들은 다 바뀌는 것 같아. 그 맹주의 제자님도 그렇고. 저 기철이라는 시종도 그렇고.”

명재희가 지친 몸을 책상에 엎으며 말했다. 나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변화가 아니라, 원래 이랬던 사람들인 거였다. 잘못된 걸 올바르게 잡아준 것뿐이었다. 세가도, 사람들도.

그때 본원 정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명재희가 벌떡 일어났다.

“엄청 빨리 오네.”

난 집무실 문을 바라봤다. 문은 두드리는 소리도 없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한유림이 아닌 곽진도였다.

“···어, 장로님. 여긴 왜···”

명재희가 물었다. 곽진도도 의아한 눈빛인 건 마찬가지였다.

“···넌 왜 여기 있느냐?”

나는 중간에 껴서 명재희를 우리 비각주로 임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아직 공식적으로 임명하지 않아 모두 모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곽진도도 놀랐지만 거부감이 드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비각주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 지어질 때쯤, 나는 곽진도에게 물었다.

“···좀 재미없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다.”

“재미없는 이야기요?”

“네가 검후하산에 대해 묻고 다닌다는 이야기 말이다.”

아. 그새 목현학과 곽진도가 만난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고 바로 찾아온 걸까.

“왜 그걸 묻고 다니는 게냐?”

곽진도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명재희도 그때 날 바라보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검후하산의 배후가 마교인 것 같아서요.”

“···응?”

그 말에는 명재희와 곽진도가 동시에 놀랐다.

사실 그들에게는 쉽게 납득될 수 없는 논리고 비약일 터였다.

아버지가 섬서로 고독이 흘러들어갔다는 걸 알고 사기(邪氣)로 둔갑된 무형지독에 당했다는 것은 정파 내부에 마교의 간자가 있다는 논리와 대강 연결되었다. 실제로 마교는 중원에 간자를 많이 보내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형산파의 사람들이 묘연해진 시기와 검후하산 사건의 시기가 맞아떨어진다는 것은 배후가 마교라는 건 못 받아들일 거다.

왜냐하면 그 논리의 전개 과정 중, 그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내가 고독을 먹었고, 황금세가가 마교에 점령당한 사실을 말이다. 그 과정을 모른다면 내 논리는 비약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터였다.

그럼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감입니다.”

“···오랜만에 나왔구나.”

곽진도가 헛웃음을 지었다. 곽진도가 내 능력을 의심하던 때, 그에게 묻지 말고 믿으라는 식으로 많이 얘기했었지.

그때는 곽진도가 납득하지 못하고 후에 대경을 했다면, 지금은 곽진도가 헛웃음을 짓는 게 그 차이였다.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명재희는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이었지만 나와 곽진도가 같이 있던 시간들을 그녀에게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검후하산은 같이 겪은 사람이 아니라면 잘 얘기하지 않지. 남에게 얘기하면 우리들의 이야기가 괜히 곡해되어 고인들을 모욕할 수 있기 때문이야.”

곽진도는 입을 열었다.

“검후는 많은 정파 무인이 존경하던 분이었지. 아니, 검후가 아니라 보타암에 있는 무인들을 모두 존경했어. 그들은 구파일방은 아니었지만, 구파일방도 쉽사리 건드리지 못하는 곳이었어. 거기만큼 묵묵히 정(正)을 상징하는 곳도 없었으니. 그들은 구파일방처럼 지역에 영향도 끼치지 않고, 그저 고고하게 주산군도에서 검만 휘두르는 사람들이었거든. 세속에서는 아무 대가 없이 자신들의 깨달음을 설파하던 사람들이기도 했고.”

명재희도 나도 눈빛이 음유해졌다. 보타암이 특별하던 존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당시 무인들의 평가는 이런 문서에 작성될 수 없었다. 보타암은 생각보다 정파에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그때 다시 본원 정문에 인기척이 났다. 곧 집무실의 문이 두들겨졌다.

“말씀하신 한유림을 데리고 왔습니다.”

기철이의 목소리였다. 난 답했다.

“들여보내.”

“네, 알겠습니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한유림이 눈치를 보며 들어왔다. 뜬금없이 불렸으니 긴장이 된 것 같았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한유림은 다소곳하게 인사를 했다. 내가 답했다.

“일단 여기 앉아봐.”

“아, 네.”

나는 의자를 뒤로 밀어주고 한유림은 그곳에 앉았다. 서있던 곽진도도 한유림의 맞은편에 앉았다.

난 굳이 사소한 얘기로 시간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바로 본 주제를 언급했다.

“네가 불려온 이유는, 네가 보타암 출신이기 때문이야.”

“···네?”

한유림이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바로 그녀에게 물었다. 곽진도가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부연 설명을 붙였다.

“물론 네게는 고통스러운 얘기겠지만, 가주가 검후하산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있어서.”

“고통스럽다면 굳이 말 안 해도 돼.”

나는 한유림에게 말했다. 어차피 절강에는 가야 했다. 물론 말해주면 도움이 되겠지만.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한유림의 표정이 침착해졌다.

“괜찮습니다. 지금 저는 황금세가 사람이니까요.”

한유림은 의젓하게 허리를 폈다. 그녀는 머리를 살짝 돌려 나를 바라봤다. 왜 그것에 대해 궁금해 하는지도, 궁금하지 않은 것 같았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일단 넌, 언제쯤 보타암에서 나온 거야?”

“보타산이 멸망할 때 나왔습니다. 언니들이 비밀 통로로 저를 내보냈어요.”

명재희와 곽진도의 눈이 동시에 이채를 띄었다. 한유림은 우리에게 해줄 얘기가 많을 것 같았다.

“너만 빠져나온 거야?”

“그럴 거예요.”

한유림은 씁쓸하게 말했다. 똑 부러지게 얘기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힘든 기억인 모양이었다.

“그 떠나기 전까지, 이상하게 느꼈던 부분들을 다 얘기해줄 수 있을까? 가장 과거부터 말이야.”

내가 말했다. 그런 커다란 사태가 벌어진 건, 갑작스럽게 일어난 게 아니다. 조그만 균열과 징조가 나타났을 게 분명했다. 한유림은 기억을 되돌아보는 듯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아, 제가 엄청 어릴 때 어머니가 아프셨던 기억이 나요.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고, 구토를 하셨거든요. 그때 언니들이 모두 약을 구하려 절강 바깥으로 나갔던 기억이 나요. 그것도 패검(佩劍)을 하고 말이죠.”

한유림의 말에 나와 명재희, 곽진도는 모두 같은 걸 느꼈다. 그 정도로 관심을 받고 문파를 뒤흔들 수 있는 인물은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호, 혹시 어머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느냐?”

곽진도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한유림이 대답했다.

“유소하셨어요.”

“···역시, 그랬군.”

곽진도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난 확실하게 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물었다.

“너희 어머니가 검후셨다는 거지?”

“네. 그렇게 불리셨죠.”

한유림이 검후의 딸이었을 줄이야. 이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예상도 못한 일이었다.

“검후께서 아이가 있는 줄 몰랐군. 심지어 그 아이가 구음절맥이었다니.”

고개를 든 곽진도가 새삼스럽게 한유림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죄책감이 서려있었다.

“왜 몰랐을까. 확실히, 검후님의 얼굴이 보이는데.”

“많이 닮았다고들 언니들이 그랬죠.”

한유림이 실실 웃었다. 따뜻했던 기억이 잠깐 스친 것 같았다. 허나 따뜻했던 기억이 식으면 어떤 기억보다 차가워지곤 했다.

바로 한유림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목에 힘을 담아 눌러서 말을 이었다.

“그건 흔한 감기가 아니었어요. 아마 처음 아프셨을 때가 제가 다섯 살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에도 가끔 그러셨거든요. 나중에는 머리를 피가 나올 때까지 긁고, 나무에 대고 비비는 등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셨죠.”

곽진도가 눈이 크게 떠졌다. 난 반대로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건 정말 딸이니까 알 수 있는 정보였다. 한유림이 말해준 증상은 고독이 처음에 머리 잡을 때와 같았다. 난 전생에 겪었기도 한 일이라 더 확실했다.

“···고독이군.”

“언니들은 그렇게 얘기했죠. 전 잘 몰랐어요. 그냥 어머니가 이상한 행동을 할 때마다 겁이 났죠. 그래도 어머니는 저를 건드리지는 않았어요. 그 이후로 보타암은 완전히 칩거에 들어간 거죠.”

“맞아. 검후님이 하산하기 전 일 년 전 부터 보타암은 자체적으로 봉문 했었지. 그게 그런 이유였구나.”

곽진도가 대답했다. 한유림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갑자기 머리를 푹 숙였다. 꾹 눌러왔던 눈물이 터진 것 같았다. 숙인 머리와 어깨가 동시에 떨리고 흐느끼는 소리만이 방을 메웠다.

“그만하자. 지금까지의 말로도 충분한 도움이 됐어.”

몸의 떨림은 점차 심해져갔다. 울음을 참으려고 했지만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는 비명 같은 소리는 참지 못하는 듯했다.

난 기철이를 불러 한유림을 다시 옥묘각으로 보냈다.

“미안한 짓을 해버렸구나.”

곽진도가 씁쓸하게 말했다. 하지만 도움이 된 건 분명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내 추측에 확신이 덧씌워지지 않았으리라.

“절강 갈 거냐?”

곽진도가 기습적으로 물었다. 난 잠깐 반응을 못했다. 곽진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뭔가 석연치 않은 일이 있으면 가는 게 네 성미 아니더냐.”

“그랬나요.”

“세상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하더니, 자기 자신은 모르는구나.”

곽진도는 살짝 웃은 다음 진지하게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절강은 지금 사파들로 가득 차있어 위험하다. 가주를 혼자 보낼 수는 없어.”

“같이 가시죠. 유림이도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잘됐군요.”

한유림은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보타암은 무조건 한 번 들를 테니까. 지금 아무리 폐허가 됐다지만, 가볼 가치는 충분했다.

“···그렇게 둘이 가려고 했느냐?”

곽진도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월상 형님도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월상이는 왜?”

곽진도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해는 안 될 터다. 지금 한창 강운에게 훈련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확인해보고 싶어서요.”

“뭘?”

난 그건 대답하지 않았다.

확인하고 싶은 건 금월상이 혼자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역량이었다.

예를 들면, 내가 세가에 없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같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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