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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세가 절대무신-80화 (81/225)

80화 연(緣)

80화 연(緣)

“그러니까, 내가 변명하는 게 아니라 진짜 시간이 없···”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와 나란히 걷는 금월상은 내게 구구절절 변명을 했다. 왜 그럴까. 고작 한 달 부족하게 못 봤음에도 몸이 더 커진 것 같다. 그렇게 큰 사람이 손짓을 하며 구구절절 말하고 있는 거다.

“···그래. 사실 기본 중의 기본이지. 세가 구성원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은 없지. 옥묘각을 빼고. 정말 한심하구나.”

“자기 비하도 하지 마시고요.”

금월상은 여전했다. 어수룩한 노력과 순수한 부담감. 본원에 있을 때도 느꼈지만, 다시 한 번 내가 세가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우리는 곧 옥묘각 부근에 도착했다. 아이들이 영약의 기운을 해소할 때 둘러놓았던 진은 없었다. 그래도 다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 해가 쨍쨍한 시간에 옥묘각 뒤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릴 리가 없으니까. 소리를 죽이는 진법은 아직 남아있었다.

“하아아앗!”

안으로 좀 들어가자마자 우레와 같은 기합들이 울렸다.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소리였다. 소리만 들어도 알 것 같았다. 그들이 금월상의 말대로 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들이 훈련하는 건 옥묘각의 뒤쪽 넓은 공간이었다. 우리들은 건물 외곽을 둘러서 뒤쪽으로 갔다.

“다시 한 번 간다. 금양검법 일 초식! 화기성막(火氣盛貌)!”

“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소리는 커졌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만든 진법이었는데, 이제는 바깥사람들의 귀를 지키는 진법으로 바뀐 셈이었다.

금월상과 나는 조용히 단상 위로 올라갔다.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건 목현학 하나뿐이었다. 목현학은 우리가 이미 다가오는 걸 알고 있었듯, 중간에 딱 목을 돌렸다.

“왜 이렇게 늦었냐.”

목현학이 대뜸 말했다. 내가 되물었다.

“무슨 소리죠?”

“금월상 얘기한 거다.”

금월상은 그 말에 흠칫 떨었다. 그는 입술을 일자로 만들어 숨을 들이쉰 다음 말했다.

“얼추 비슷하게 오지 않았나요?”

“아니? 반의 반 각 늦었는데.”

“···음.”

금월상은 잠깐 하늘을 바라봤다.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이 어쩐지 아련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목환아. 난 어디 갈 곳이 있어서 이만.”

금월상은 옥묘각 단상을 가로질러 안뜰 쪽으로 향했다.

안뜰 쪽으로 금월상이 꺾자마자 천둥소리가 옥묘각 전체에 울렸다. 난 그쪽으로 머리를 돌렸지만, 목현학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게도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강운 장로님한테 지도를 받는 시간이었군요.”

“대충 가르치려고 했는데, 자기 생각보다 무재가 뛰어나서 한 번 잘 키워보고 싶다던데.”

그렇구나. 하긴 금월상이 무재는 확실했다. 해남에 갔다 온 내가 봤을 때, 현재 금월상은 비슷한 나이 대의 해남파 무인들과 비등했다.

지금에야 강운의 도움을 받고 있다지만, 거기까지 올라간 건 독학이니 재능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근데 너는 왜 온 거냐?”

“제가 가주인데요.”

“···뭐, 그건 맞지.”

목현학이 바로 수긍하는 모습에 나는 픽 웃었다.

“애들 인명부 좀 만들러왔습니다.”

“그거 아직도 안 만들고 있었다냐.”

“그렇다더군요.”

“뭐, 하긴 요즘 좀 빡세게 구르긴 하지. 애가 재능은 뛰어난데 독학으로 배운 거라 이상한 버릇들이 많더라고. 원래 몸에 박힌 걸 빼는 게 어려워.”

목현학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금월상은 정말 힘들었나보다. 어쩌면 괜히 강운 장로에게 부탁을 한 걸 수도 있었겠다.

“아무튼 점심 훈련은 반 시진 뒤에 끝나니까, 맞춰서 시종 보내.”

“제가 직접 할 겁니다.”

내 말에 목현학은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런 걸 가주가 왜 하냐? 시간 많아?”

“없죠.”

난 그렇게 답하고 훈련하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아이들은 검을 휘두르고 있지만, 몇몇은 눈동자만 굴려 내가 있는 쪽을 슬며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러면 집중이 안 되니 당연히 실수가 나올 것이다. 익숙한 무공도 아닐 테니까.

“야, 팽차월! 넌 다시 해!”

목현학이 득달같이 알아채고 소리를 질렀다. 팽차월 외에도 몇몇 아이들이 불렸다. 그들은 꼼짝없이 초식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고, 목소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아까보다 더 커진 소리를 틈타서 난 조용히 목현학에게 물었다.

“장로님.”

“왜.”

“검후하산 때 절강에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심드렁하게 대답하던 목현학이 날 바라봤다. 목현학은 검후하산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쓴 열매라도 혀에 얹은 듯 표정이 찡그려졌다.

“근데?”

“그때의 이야기를 좀 듣고 싶어서요.”

목현학은 끄응, 침음을 흘렸다. 그는 계속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는 게 낫겠군. 괜히 떠나간 사람들을 입에 담기 싫어.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기도 하고.”

“아닙니다. 불편하시면 굳이 말씀 안 해주셔도 됩니다.”

일단 목현학이 떠올리기 싫을 정도의 사건이었다는 걸 확인했으니, 소득 없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검후하산을 겪은 사람은 강운과 곽진도도 있었으니, 굳이 목현학에게 들을 이유도 없었다.

“미안하군. 근데 내가 검후하산에 있었다는 건 어느 입 싼 놈이 얘기하던가? 혹시 곽진···”

“해남파 장문인이십니다.”

내 말에 목현학의 입이 다물어졌다. 목현학은 다시 단상 아래서 만년한철 인형을 두드리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모두 한 번 더 해!”

목현학이 느닷없이 크게 소리쳤다. 아이들은 모두 목현학을 바라봤다. 잘하고 있었는데 왜 성질 내냐는 눈빛 같았다. 괜히 아이들의 훈련을 더 시켰다. 역시 소득 없는 질문은 아니었다.

*

명재희는 무한 시내를 가로지르다 포목점 하나를 봤다. 사 년 전쯤인가, 수련(垂蓮) 언니가 자신을 데리고 가 옷 몇 벌을 사줬더랬다.

그때 언니는 옷을 자신의 몸에 대보며 잘 맞는다고 하며 뿌듯해했다.

아저씨가 한 말은 정말일까.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찾아가려 해도 어디인지 몰랐다. 그냥 홀연히 떠났다.

“지금은 아니야.”

명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들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명재희는 그 이후에 어떤 주변도 둘러보지 않고, 무림맹을 향해 걸었다. 어디서 기억들이 불쑥 기습할 줄 몰랐다. 무한은 위험한 곳이었다.

그러고 보면 황금세가로 가야 할 이유가 확실해진 것만 같았다. 명재희는 처음부터 금목환이 제안할 때부터 가고 싶어 했다.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먼저 알아주고, 어른스럽게 이끌어주는 친구니까. 농담은 안 통해도 같이 있으면 즐거웠다.

제일 마음에 걸렸던 건 무한에 있는 세 언니들이었다. 남창이면 무한에서 그리 먼 것도 아니건만,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게 불안했다.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는 없으니.

명재희는 곧 무림맹 건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보네. 들어가.”

“감사합니다.”

명재희를 바로 알아본 무림맹 정문 보초가 문을 열어줬다. 명재희는 바로 무림맹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곧 명재희는 진법으로 숨겨져 있는 비연각의 입구를 더듬어 들어간 다음, 바로 각주실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명재희요.”

“아, 귀환 보고? 됐어. 가서 쉬어라.”

안에서는 여유로운 목소리가 나왔다. 비연각주 여상우였다.

“아뇨.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럼 들어와.”

명재희는 긴장했다. 금목환에게 자신 있게 말하고 오기는 했지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비연각, 특히 은영조에 속한 이들은 웬만한 일이 아니면 사직이 허락되지 않는다. 은밀한 정보들을 그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할 말?”

여상우가 물었다. 명재희는 단박에 말했다.

“사직 시켜주세요.”

“엉?”

찻잔을 들고 있던 여상우가 당황한 얼굴로 멈췄다.

“···이유가 뭐야?”

조심스럽게 여상우가 물었다. 확실히 여상우는 좋은 사람이었다. 각주와 대원이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해보지는 못했지만. 그게 괜스레 미안해졌지만, 세상에는 미안함을 감수하고서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었다.

“황금세가로 가려고 해요.”

“거기서 뭐하게?”

“···나를 찾는 일?”

뜬금없는 대답에 여상우가 명재희를 바라봤다. 허무맹랑한 대답이었지만 명재희의 눈빛은 진지했다. 어느 정도 눈빛 교환이 끝난 여상우는 눈을 내렸다.

“어느 정보 조직에 있는 사람이 사직을 하더냐. 그런 경우는

있어. 단전이 박살나서 무림맹 행정직으로 돌린 거. 우리는 평생 무림맹에 살 팔자야.”

여상우가 타이르듯 말했다. 명재희도 알고 있었다. 비연각에서 사라진다는 건 죽음 외에는 없었다.

“근데 별 다른 이유도 없는데 나가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사직 사유가 ‘나를 찾는 일’이라니, 이건 좀 아니지 않느냐?”

명재희도 그 말에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건 여상우의 말이 맞았다.

“황금세가가 우리 동맹이기는 하지만, 굳이 들어가서 도울 필요 없지 않더냐. 어차피 황금세가가 알고 싶은 정보는 우리 쪽에서 넘겨주는데.”

“···죄송해요.”

여상우는 한숨을 쉬었다. 명재희는 아끼던 인재였다. 은영조에서도 특별히 두각을 드러낸 아이.

아니, 아쉬운 건 단순히 그녀의 재능 때문이 아니었다. 감정을 떠나서 불가능한 이유가 많았다.

여상우는 다시 천천히 말했다. 최대한 어린 아이가 이해하기 쉽도록 말이다.

“재희야. 정보원이 나간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란다. 첫째, 너도 알겠지만 당연히 내부의 정보가 외부로 샐 수 있어. 물론 네가 말한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거지. 둘째, 내부에 있는 정보원들에게 안 좋은 선례를 남겨. 비연각에 있는 아이들에게, 나갈 수도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거야. 그건 우리 비연각의 근간이 흔들리는 일이지.”

명재희는 살짝 입술을 씹었다. 첫째 이유는 어느 정도 생각했지만, 두 번째 이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황금세가로 간다고 생각한다는 마음은 접히지 않았다. 어떻게 잘 설득할까를 생각할 뿐이었다.

여상우는 명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히 보였다. 그만큼 오래 봤으니 말이다. 요즘 좀 순해졌나 싶더니, 근데 이렇게 다시 고집을 부릴 줄이야.

곰곰이 생각하던 여상우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따라오거라.“

여상우는 그 말을 남기고 홱 각주실을 나가버렸다. 명재희는 여상우의 뒤를 쫓았다.

명재희는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여상우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게 됐다.

“···혹시 저희가 가는 곳이 맹주님 집무실인가요?”

“그래.”

“왜요?”

명재희가 초조하게 물었다. 무림맹주를 만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는 항상 금목환이 옆에 있었다. 아직 명재희에게 무림맹주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정보원의 제명(除名)권은 맹주님한테만 있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는 명재희에게 여상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었다.

곧 여상우는 맹주실로 들어가 문을 두들겼다.

“비연각주인가?”

“네.”

애초에 여상우는 무림맹주와 만날 약속이 있었던 듯했다. 여상우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고, 명재희는 뒤따라가 들어갔다. 그곳에는 당연히 무림맹주 종리운이 앉아있었다.

“비연각주, 왔구먼. 재희도 돌아왔구나.”

“···아, 네.”

명재희는 무림맹주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에 놀랐다. 말단 중의 말단인 대원의 이름을 어찌 외우고 다닌단 말인가.

종리운은 자연스럽게 여상우에게 얼굴을 돌렸다.

“근데 재희는 어쩐 일로 데려온 건가?”

“맹주님의 재가가 필요한 일이 있어서요.”

“뭔데?”

여상우가 잠시 말을 멈췄다. 여상우도 긴장했고, 명재희도 긴장이 최고조로 달했다.

“···재희가 비연각을 떠나 황금세가로 간다고 합니다. 정보원의 제명은 오롯이 맹주님의 권한이기에···”

종리운은 눈을 껌뻑 거렸다. 여상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무림맹의 무인들이 나가는 건 으레 있는 일이지만, 정보원이 나가는 건 말이 다르다.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각주로서 소임을 못했다는 것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시간에 풀을 섞고 끓여 늘어진 것 같았다.

한동안의 침묵 끝에 종리운이 말했다.

“그러니까, 재희가 무림맹 비연각에서 사직하고 황금세가로 간다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좋아!”

종리운이 책상을 활기차게 쳤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여상우와 명재희가 넋을 놓고 종리운을 바라봤다.

“아주 좋군. 역시 여 각주가 인재 하나는 잘본다니까.”

여상우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멍하니 들었다. 종리운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재희가 황금세가로 들어간다는 건, 가주와 더 친밀해진다는 것 아닌가! 어차피 황금세가와 동맹이니 정보 누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아니, 그래도 무림맹 내부 정보를 알고 있는 아이가 가는 건···”

“아니야. 됐어. 충분해. 재희가 무림맹에 학을 떼고 가는 게 아니라면. 나중에 얘기할 때도 편하지 않나.”

종리운은 높아진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명재희에게 물었다.

“혹시 무림맹에 악감정이 있어서 떠나는 건 아니겠지?”

“···아뇨. 목환이가 오래서···”

멍하니 대답한 명재희의 말에 종리운은 굉장히 흡족해했다.

“더할 나위 없군.”

종리운은 바로 책상 밑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고, 붓으로 날림 작성을 했다.

- 비연각 은영조 명재희를 파면한다. 종리운.

마지막으로 직인까지 찍어주고 넘겨주는 데는 눈 깜빡일 새도 걸리지 않았다.

“자, 됐지? 혹시 내가 지원해줄 거라도 있느냐?”

종리운은 명재희에게 그 종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그 상황에 명재희는 멍하니 말했다.

“···검후하산과 관련된 정보가 있으면, 좀 빌리고 싶습니다.”

“검후하산? 보타암인 것도 있고, 검후가 칩거했던 이후로는 아무 정보도 없을 텐데. 어쨌든 가져가.”

명재희도 할 말을 잃었지만, 여상우도 할 말을 잃었다. 맹주가 금목환을 아끼는 건 맞지만, 그래도 이건 절차적인 문제라 개별적으로 생각한 탓이었다.

“나중에 황금세가에서 보자꾸나!”

종리운은 웃으며 명재희를 맹주실 바깥으로 전송까지 해줬다. 명재희의 눈앞에 문이 콕 닫혔다.

···어떻게 됐든 간에 금목환과 한 약속은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

나는 지금 옥묘각 사랑방에서 아이들을 한 명씩 보고 있었다. 문을 열고 각지게 들어온 아이는 팽차월이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팽차월이었지?”

“네, 그렇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였다. 아까 기합소리도 그렇고, 아무래도 기합을 할 때 크게 하라고 훈련을 받은 것 같았다.

그나마 팽차월은 내가 좀 알았던 애라 인명부는 쉽게 작성됐다. 하북팽가의 방계. 나이는 여덟. 가족에게는 버려져 천진에서 구걸을 하다가 온 아이였다.

“영약은 이제 다 소화했어?”

“네!”

“원래 하북팽가는 도법을 배웠을 텐데. 검법에 익숙하진 않지?”

“아뇨! 괜찮습니다. 기초적인 혼원도(混元刀)만 배웠을 뿐입니다.”

“그러면 좋고.”

팽차월은 거의 좀만 더 말을 섞으면 감읍이라도 할 것만 같아 일찍 내보냈다. 난 몇 번 얼굴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생각보다 아이들이 나에 대한 거부감은 없는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어올 아이. 문이 느리게 열렸다. 문을 잡은 하얀색 손가락이 먼저 눈에 띄고, 전체적으로 창백한 인상의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한유림.”

“···안녕하세요. 가주님.”

처음 봤던 한유림과는 달리 꽤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가주님이라는 호칭은 붙여주니 다행이었다.

“그래. 절맥은 다 나았어?”

“덕분에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유림은 앉아서 고개를 꾸벅였다. 너무 달라서 약간 적응은 안 됐지만, 이게 맞기는 했다.

“몇 가지만 물어볼게.”

“네.”

사실 한유림은 내가 전부터 좀 궁금했던 아이였다. 한 번 손속을 나눠봤을 때, 무조건 명가의 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내가 명가 무공의 형태를 아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명가인 걸 짐작할 따름이었다.

“지금 몇 살이야?”

“열 넷이요.”

“혹시 여기 오기 전에는 어디서 살았어?”

“완전 아이 때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절강이요.”

“절강?”

절강이라. 그럼 난 물어볼 수밖에 없는 게 있었다.

“혹시 속해있던 문파가 있었어?”

“네. 보타암이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나는 슬쩍 웃으며 턱을 괴었다. 한유림은 내가 왜 웃는지 몰라 갸웃했다.

보이지 않던 가느다란 연(緣)들이 하나씩 모여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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