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돌아온 세가
78화 돌아온 세가
바람이 불었다. 이제 봄의 초입이라지만 밤바람은 여전히 서늘했다. 여기는 객잔에서 조금 떨어진 산중턱의 평지였다.
“허억, 허억.”
갈유월은 땀에 젖어 붙어버린 머리카락을 다시 털어냈다. 금목환은 숨도 차지 않는 듯했고, 피부도 여전히 하얬다. 잘생기긴 잘생긴 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금목환이 유령이 승천하듯 위로 번쩍 사라졌다.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돼.”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갈유월은 직감적으로 팔꿈치를 뒤로 돌렸다. 세운 수도가 팔꿈치에 턱 걸렸다. 하지만 갈유월은 직감했다. 이게 금목환이 바라는 거였다. 내리친다고 그저 강(剛)의 묘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금목환은 애초에 치려는 게 아니라 살을 붙이는 게 목적이었다는 듯 갈유월의 팔꿈치를 탔다. 갈유월이 예상한 것과 반대로 유(柔)의 묘리였다. 나뭇가지를 타는 뱀처럼 돌아가던 금목환의 팔은 결국 갈유월의 쇄골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컥!”
겉으로 보면 가볍게 민 것 같았지만, 금목환은 장심에 콩알 같은 기를 품고 있었고, 그 기는 갈유월의 전신에 전달됐다. 내가중수법이었다.
뒤로 두 장은 밀려나간 갈유월은 부들거리며 버텼다. 금목환은 가만히 있었다.
갈유월은 곧 검은 피 한 움큼을 땅바닥에 쏟아내고 앞으로 엎어졌다.
“내상은 안 입었을 거야. 죽은피를 뱉어내게 한 거거든.”
금목환은 그렇게 말하고 갈유월에게 다가갔다. 금목환은 갈유월의 두 어깨를 잡아 일으킨 다음 앉혔다.
“그래도 지금 바로 말하지는 마. 경맥을 건든 거긴 하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갈유월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작은 내공이었지만 그건 아직도 갈유월의 몸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유월은 고개를 들어 금목환을 바라봤다. 금목환은 쭈그려 앉아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중수법을 이용해 죽은피를 꺼낸다니. 전신의 혈맥을 다 꿰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금목환의 장법은 공격이 아닌, 치료술의 일종이었다.
“···너.”
기를 가다듬은 갈유월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금목환의 눈이 갈유월에게 향했다. 무구한 것 같으면서도 냉정해 보이는 눈.
“왜 이렇게 강해?”
갈유월은 금목환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먼저 묻고 싶은 건 일단 그것이었다.
“재능이 있어서.”
금목환의 말투는 농담이 아니라 진지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가 안 되는 애였다.
“근데 너도 되게 강해졌어. 저번에 붙었을 때랑은 확실히 달랐지.”
“위로야?”
“아니. 난 그런 거 못해.”
갈유월은 어이가 없었다. 금목환의 입에서 뭘 못한다는 소리가 나오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갈유월이 볼 때는 완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일 무서워하기도 하고.
곽진도가 취해서 말했던 금목환의 어릴 적이 떠올랐다. 그냥 원래 냉정한 애인 줄 알았지만, 그런 과거를 겪었다면 감정을 표하는 게 미숙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래. 자신처럼.
사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비무를 하자고 한 것이었다. 금목환의 과거에서, 동질감을 느꼈기에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갈유월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난 전혀 몰랐어. 네가 그런 과거를 경험했다고는 생각 못했거든.”
“그랬구나.”
금목환이 말했다. 냉정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은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난 알고 있어. 네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걸.”
갈유월은 소름이 돋았다. 금목환의 눈이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해서.
“어떻게 알았는데?”
“네 행동에서 내 과거가 보였어.”
금목환은 단순하게 대답했다. 근데 그렇게 단순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일까. 갈유월은 이해를 포기했다.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또 무언가를 감추는 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소용없는 짓이었다.
“···맞아.”
갈유월은 인정했다. 다시 금목환의 얼굴을 바라봤다.
늘 보던 것처럼 무표정이었다. 갈유월에게는 그게 더 용기가 됐다. 금목환은 자신의 말을 들어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아니면 그냥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걸 수도 있고.
“난 기억이 없을 적부터 스승님과 같이 있었어. 내 첫 기억에도 스승님이 있어.”
갈유월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어. 스승님은 내 이름이 갈유월이라고 했고, 자신은 종리운이라고 했어. 내가 천무지체(天武之體)라는 것도 그때 들었어. 난 내 이름이 왜 갈유월인지, 누가 내 부모인지 별로 궁금하지 않았어. 스승님은 내게 많은 걸 주셨거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잘 곳도, 무공도 말이야.”
“그렇구나.”
“아마 그게 시작이었겠지. 스승님과 계속 붙어 다니니까, 내가 검존의 제자라는 게 중원에 다 퍼진 거야.”
금목환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참 간결한 표시였다.
“그때부터 별의 별 사람이 붙어왔어. 친한 척을 하는 사람들, 돈을 주면서 꼬시려는 사람들. 나한테 돈을 주려던 늙은이는 무당파의 말코였는데 나한테 스승님의 약점과 사생활을 알려주면 더 큰돈을 주겠다고 했어. 그때 내 나이가 여덟이었는데. 내 또래들은 두 가지 반응이었어. 질시하거나, 부러워하거나. 무림맹 호위무사들과 같이 외출했을 때 납치당할 뻔한 적도 있었지.”
갈유월의 푸념은 계속됐다.
“그렇다고 스승님을 원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스승님은 아무 잘못도 안 했잖아. 그 사람들이 병신인 거지. 그 이후 나한테 다른 사람들은 다 무언가 꿍꿍이를 감춘 사람처럼 보이고, 스승님과의 시간을 뺏으면 나쁜 사람처럼 보여. 세상에 스승님과 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도 많이 생각했어···”
그 말을 듣고 있는 금목환은 역시 아무 반응도 없었다. 불쌍하다고 동정하지도 않고, 그 동안의 고충을 격려해주지도 않았다. 그냥 쭈그려 앉은 채로 갈유월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스승님이 전부야. 난 스승님이 날 버리는 게 너무 무서워. 나도 이제 스승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아. 난 그런 스승님에게 실망을 안겨드리면 안 돼. 내가 계속 실망을 주면 스승님도 날 떠날 테니까.”
갈유월은 긴 말을 끝내고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사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너무 오래 길을 돌아온 것이었다.
“그래서 난 네가 제일 무서워. 넌 나보다 훨씬 무공도 잘 쓰고, 스승님이 좋아하는 차에 대해서도 많이 알잖아. 요즘 스승님은 네 얘기를 하면서 눈을 빛내. 나랑 있을 때도, 내 이야기가 아닌 네 얘기를 하니까. 이번에도 오고 싶지 않았어. 스승님이 가라고 하니까 온 거야. 어쩌면 스승님이 날 귀찮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지.”
금목환은 이야기를 다 듣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훈련을 하고 있던 거구나. 맹주님에게 실망을 주기 싫어서.”
“그래. 스승님은 내가 무공을 잘 선보이면 좋아하거든.”
갈유월은 그렇게 말하고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속에 있는 얘기를 다 긁어낸 건 처음이었다. 시원한 듯하면서도 후회가 됐다. 괜히 말한 건 아닐까 싶었다.
“그게 네 대답이구나. 잘 들었어.”
금목환은 뭔가 생각을 하는 듯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확실히 넌 나와 비슷해. 나도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어. 다른 건 오직 너는 한 명만을 의지했고, 난 아무에게도 의지를 안 했다는 거야.”
갈유월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후회가 지워졌다. 확실히 자신이 느낀 동질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난 그냥 내 얘기를 하는 거야. 나도 많은 사람들을 오해하고 있었어. 어떤 사람을 우유부단하고 결단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강한 사람이었다는 걸 말이야. 어떤 사람은 우리 세가에만 관심 있는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우리 형제들을 아끼고 있었어.”
금목환은 말을 잠깐 멈추고 다시 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주변을 잘 둘러봐. 분명 네가 생각한 것과 다른 사람이 있어. 그리고 맹주님은 널 귀찮아하지 않아.”
말을 마친 금목환은 품에서 서한 하나를 꺼내 갈유월에게 건넸다. 두 번으로 접힌 종이였다. 갈유월이 펼쳐보니 익숙한 글씨체가 나왔다.
- ···이건 사담이지만, 유월이가 기운이 없는 듯해서 큰일이야. 평소보다 뭔가 피곤해보이고, 목소리도 작아졌어. 바람이라도 쐬어줄까 했는데, 가주라면 믿을 수 있으니 보낸 걸세. 그래도 오라버니 아닌가. 잘 챙겨주길 바라네. 유월이가 예민하지만, 마음을 연 상대에게는 애교도 많은 아이야.
···유월이는 아침잠이 많아. 그래서 별 다른 일정이 없으면 깨우지 말게나. 어차피 안 일어난다네. 그리고 식탐이 많은데, 먹을 게 부족하면 입술을 삐죽 내미는 습관이 있고···
갈유월은 그 서한을 멍하니 쭉 읽어나갔다. 금목환은 여전히 쭈그려 앉은 채로 갈유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비무를 할 때 불었던 바람보다는 따뜻한 바람이었다.
*
갈유월은 서한을 다 읽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냥 멍한 듯, 그녀는 객잔으로 들어갔다. 내가 객잔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도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얼마 시간이 지나자, 뒤의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옷에 나뭇잎을 묻힌 명재희가 있었다.
“···모르고 엿들었네. 그냥 둘이 조심스럽게 나가는 게 궁금해서 갔는데 그런 얘기를 나눌 줄은 몰랐어.”
“그럴 수 있지.”
명재희는 볼을 긁고 내 눈을 피했다.
“근데 무림맹주 제자님한테는 미안하지만 가길 꽤 잘했다고 생각해.”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명재희는 말을 이었다.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확인했으니까.”
“글쎄.”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는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난 그냥 틀린 걸 올바르게 잡았을 뿐이다. 내가 세가에서 그랬듯 말이다.
“···나, 네 비각주 할래.”
명재희는 느닷없이 그렇게 말했다. 난 궁금해서 되물었다.
“내가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아니. 사실 원래 그러려고 했어. 방금 말한 건 민망해서 약간 깔아둔 거야.”
난 갸웃했다. 이렇게 쉽게 말해줄 거면 그런 거짓말을 했던 의미는 어디에 있는 걸까. 심지어 명재희는 그 말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은 듯 당당했다.
“그냥 내가 좋아서.”
명재희는 되레 그 말을 하면서 민망해했다. 그 감정을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한테는 결국 좋은 일이었다. 명재희는 정말 뛰어난 아이였으니까.
“그래도 무림맹은 들르고 갈 거야. 비연각주님한테 얘기해야하니까.”
“그래.”
“난 그냥 지금 출발할게. 걸어 가봤자 답답해. 빨리 말하고 오는 게 속 시원하지.”
“그럼 그렇게 해.”
그러고 보니 명재희는 자신의 짐도 다 매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황금세가의 각주를 맡는 걸 애초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명재희는 내가 대답하자 바로 경공을 하려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럼 난 갈게.”
“아, 잠깐만.”
난 잠깐 명재희를 멈춰 세웠다.
“비연각에서 검후하산과 관련된 정보 있으면 다 가져와줘. 어차피 우리는 무림맹이랑 정보 공유 되어 있으니까 몰래 안 가져와도 돼.”
“그건 나도 알아. 알았어. 첫 임무니까 최대한 빨리 가져와볼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늦게 가져오는 것보다는 빨리 가져오는 게 나았다. 원래 세가에서 철취신응을 호출하고 부탁하려 했는데, 이걸로 한 이틀은 아낀 것이다.
“근데 이런 임무도 그런 거야?”
명재희는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오랜만에 감이 안 잡히는 질문이었다.
“뭔 소리야?”
“한 건당 원보 하나냐고.”
“아.”
나는 떠올렸다. 처음 명재희를 만났을 때가. 그러고 보면 명재희는 꽤 순해진 셈이었다.
“비각주니까 두 개는 줘야겠지?”
“에휴. 재미없는 놈. 난 간다.”
명재희는 멀리 뛰면서 내게 손을 흔들었다. 곧 그녀는 어둠 속 나뭇가지를 밟고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알아챘다. 명재희가 내게 하고 있던 건 거짓말이 아니라 농담이었다.
*
다음날, 우리는 별 탈 없이 남창에 도착했다. 광주를 벗어나니 남에게 시선도 끌리지 않았다. 명재희가 골라준 금색 호랑이 가면은 쓸데가 없게 되었다.
광주는 항구의 활발함이 있듯, 남창에는 내륙의 활발함이 있었다. 해남파의 제자들은 그것도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나도 오랜만에 보는 거리와 포양호로 흘러가는 강줄기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황금세가 정문에 도착했다.
여기서 우리는 보낼 사람이 있었다.
“아, 이제 갈 소저는 무한으로 향하는 거군.”
“혼자 가는데 괜찮습니까?”
권동운과 왕진현이 갈유월에게 물었다. 하지만 크게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는 모양새였다. 갈유월은 사람들이 말을 걸면 고개를 푹 숙이기 일쑤였고,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말을 안했다.
“···네. 괜찮아요.”
그래서일까. 갈유월이 평범하게 대답했을 때 권동운과 왕진현은 깜짝 놀랐다. 그나마 빨리 정신을 차린 건 인생 경험이 많은 권동운이었다.
“···허, 허허. 제대로 목소리 듣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목소리가 아주 옥이 구르는 것 같구먼.”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떨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음성이 꽤 컸다. 그녀 나름대로 노력을 하는 걸까.
갈유월은 그리고 내게 슬쩍 다가왔다. 손을 세워 입을 가리는 걸 보니 뭔가 귓속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난 순순히 머리를 돌렸다.
“너 말이야. 위로도 잘해.”
갈유월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작은 난초가 수놓아진 손수건이었다. 감사함의 표시인 것 같았다.
그렇게 갈유월은 떠나갔다. 그녀의 작은 등이 언덕 너머로 사라져 나도 몸을 틀었다.
오랜만에 세가의 땅을 밟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