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다시 중원으로
76화 다시 중원으로
난 지체할 거 없이 장문인실로 찾아갔다. 이제 누구의 안내는 필요 없었다. 지리도 알고, 해남파에 적을 둔 사람이기까지 하다. 지금도 푸른 매듭 네 개가 펄럭이고 있지 않은가.
장문인실은 반쯤 열려있었다. 내가 그곳을 향해 몸을 들이미니, 적유엽은 매의 먹이를 주고 있었다.
“왔구나.”
적유엽은 날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날카로운 매의 발톱이 날개를 긁었다. 긁는 꼴만 봐도 성격이 좋은 친구는 아닌 것 같았다.
“네. 부르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목환이, 너 정도면 내가 왜 불렀는지 당연히 알겠지.”
“그 매를 보고 확신을 한 정도입니다.”
적유엽은 매의 등을 한 번 쓰다듬은 다음에 날려 보냈다. 매는 해남의 비각으로 날아가는 듯했다.
“그래. 개방에서 답신이 와서 말이야.”
우리는 거의 동시에 자리에 앉았다. 적유엽은 책상 밑에서 서한 하나를 내게로 들이밀었다. 개방의 직인이 찍힌 서한이었다.
나는 그걸 두 손으로 받아든 다음, 바로 봉인지를 찢고 내용물을 살펴봤다.
- 衡山派 人名簿(형산파 인명부)
- 衡山派 大小事(형산파 대소사)
확실히 그것들은 내가 원하는 자료였다. 물론 내가 구할 수 없는 정보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지금 개방에게 직접 의뢰를 하는 건 껄끄럽기도 하고, 믿을만한 정보가 아닐 수도 있었다. 현재 개방의 상황은 엉망진창이니까.
적유엽은 개방에서 신뢰할 수 있는 비선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내가 만약 이와 같은 정보를 구하려고 했다면 신뢰할 수 있는 중개자를 구하고, 귀찮은 과정이 포함되었을 거다.
그런 면에서 적유엽은 내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시켜준 셈이었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야 뭘.”
적유엽은 웃었다. 나는 내용물을 보려다가 잠깐 멈췄다. 생각해보니 할 말이 더 있었다.
“지금 개방은 어떤가요?”
내 말에 적유엽은 살짝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의미로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구나.”
“개방이 어디까지 부패됐는지를 여쭤보는 겁니다.”
내 말에 적유엽은 눈을 크게 떴다. 아직 많이 안 알려진 일인 걸까.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이미 꽤 부패했을 터였다. 전생 때, 구파일방 중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 개방이라고 들었으니까.
“음, 황금세가도 따로 비각을 가지고 있는 게냐?”
적유엽은 침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같은 구파일방이다. 언급하는 게 껄끄러운 건 당연했다.
“만들 생각이기는 하지만요. 아직은 아닙니다.”
“···뭐, 구파일방 사이에서는 유명한 얘기다. 거지들이 북경(北京), 천진(天津)에 땅을 사고 집을 짓고 황제처럼 살고 있지. 옛날에 협(俠)을 외치고, 가장 낮은 자리를 자처한다는 이념은 갖다 버린지 오래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이 부자가 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구파일방이나 문파, 세가들의 핵심적인 정보들을 독식하고 있으니, 그걸 거지들이 돈을 받고 개인적으로 파는 것이다.
그렇다고 구파일방에서 내칠 수도 없는 것이, 개방은 구파일방 중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정보력도 있고, 옛적부터 이어진 구파일방의 연결 고리도 강하다.
“제가 아는 것과 비슷하군요.”
“그래. 근데 개방 얘기는 하기 힘들지. 정말 온 중원에 거지들이 깔려있지 않느냐. 심지어 이 해남도에도 많지. 그래서 개방 얘기할 때는 조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해.”
“조언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확실한 정보 선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면 개방과 엮이지 않는 게 좋아. 신의가 없어져서 돈만 된다면 의뢰자의 정보도 팔아버리는 곳이거든.”
일단 개방은 내가 알던 것과 똑같은 집단인 걸 확인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형산파의 추적이었다.
난 그제야 개방에서 보내온 서한들을 펼쳤다. 구파일방의 장문인이 의뢰한 것이니 내용은 확실할 것이었다.
형산파 인명부를 왼쪽에, 형산파 대소사를 오른쪽에 펼쳐놓았다. 인명부는 삼대제자까지는 물론이고 속가제자들까지 적혀있어 굉장히 많았다. 최근 십 년 간이어도 오간 사람들은 굉장히 많았다.
난 그 서한들을 양쪽으로 쭉 살펴보았다. 과거부터 시작이었다.
대다수가 잡다하거나 의미 없는 정보들이었지만, 난 칠 년 전에 이르러서야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옹진수가 이때 장문인으로 취임했군요.”
“그랬었나?”
적유엽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분명 그것 자체로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난 형산파의 역사를 다시 훑어나갔다.
그리고 오 년 전, 난 눈에 띄는 정보를 발견했다. 형산파의 홍백규라는 장로와 일대제자들이 대거 묘연하게 사라진 것이다.
적유엽은 그걸 슬쩍 보더니 말했다.
“아. 운봉검이 그렇게 잠적했었지. 그때 형산파가 구파일방에 들어가려고 하는 발악이 극도에 달했을 때였지. 그게 부끄럽다며 운봉검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잠적한 거네.”
“그렇군요.”
난 바로 다음 년을 봤다. 비어진 홍백규 장로의 자리는 유동해라는 인물이 채우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오 년 전에 있던 장로 중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장로는 유동해뿐이었다는 거였다.
“유동해, 이 사람은 누구죠?”
“잘 몰라.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네. 강호 출두를 안 하고 본산에서 수양만 하는 사람들. 그런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알고 있네.”
나도 그건 알고 있다. 소림사에는 무승(武僧)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 법도를 갈고 닦기 위해 세상을 등지고 출가한 제자들도 있었다.
어쨌든 난 유동해라는 인물을 기억해놓기로 했다. 아직 증거는 없지만 의심이 들었다.
“이 유동해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직감이구나. 생각보다 강호에서 유용한 것이지.”
적유엽은 껄껄 웃었다. 그러다가 웃음을 끊고 뭔가 떠올랐다는 듯 내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즈음 검후하산이 일어났구나. 오비이락(烏飛梨落)이겠지만 말이야.”
“검후하산이요?”
난 미래의 일은 알지만 과거의 일은 잘 몰랐다. 내가 묻자 적유엽은 한 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검후하산을 모르느냐?”
“네.”
“···허허. 의외로구나. 꽤 유명한 사건이고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적유엽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검후하산이라는 사건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때를 들어보니 내가 여덟 살 때 일어난 사건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난 내가 태어나고 십이 년 전까지의 과거도 거의 모른다. 전생에서는 골방에 갇혀 살았고, 회귀는 열두 살 때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검후하산은 꽤 복잡한 사건이었다. 보타산의 주인인 검후가 갑자기 보타산의 문인들을 죽이고, 절강 시내로 내려와서 평민들까지 죽인 사건이었다.
심지어 검후는 절강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죽였는데, 그 바람에 엉망이 된 치안을 기회라고 생각한 사파들이 몰려들어 절강 자체가 엉망이 됐었다고 했다.
그때 많은 정파 사람들이 사파를 격퇴함과 동시에 검후를 제압하려고 모였던 거다. 적유엽의 말로는 그때 자신을 포함해 곽진도, 강운, 목현학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 사건이 있었군요.”
“검후가 왜 미쳤는지는 아무도 몰라. 보타암은 정말 개방이나 하오문도 모르는 곳이거든. 그만큼 폐쇄적인 문파가 없어. 그 폐쇄성이 문제가 되어 광증이 발한 건 아니냐, 이런 말도 많았지만 다 추측일 뿐이지.”
“그 이후로 절강에 사파들이 많아진 거군요.”
“주산파가 그래서 절강을 차지한 거지. 남아있는 보타산의 사람들이 아무리 평균적으로 고수라고 해도 중과부적이었으니.”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적유엽은 우리 세가가 마교에 먹혔었다는 걸 모른다. 그러니 이 사건을 별개라고 취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세가를 침식하고 있던 형산파와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주산파의 기틀이 닦여졌다는 게 동시라는 건, 우연이라고 납득하기 힘들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허허. 뭐 해준 게 없는 것 같군.”
“아닙니다.”
적유엽은 껄껄 웃었지만, 난 해남에 와서 제일 큰 수확을 얻었다.
확실한 실마리. 난 그것을 꽉 쥐었다. 세가가 몰락했던 근원적인 이유에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정말로 해남에서 얻을 건 다 얻었다.
*
갈유월은 목검을 들고 서있었다. 무림맹의 비무장. 몇 번이고 드나들었던 곳이었다. 가끔 또래 명문세가 아이들이 찾아오면, 흠씬 혼내줬던 곳이었다.
“역시 유월이는 재능이 있구나.”
종리운은 비무가 끝나면 언제나 그렇게 말해줬다. 그게 너무 좋았다. 의지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만큼 좋은 건 없었다.
갈유월은 이번에도 자신이 이길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제 또 한 명 희생될 상대방은 누구인지. 갈유월은 목검의 기수식을 세웠다. 안개에 감춰져 있던 상대방의 얼굴은 그제야 선명해졌다.
갈유월은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금목환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또 이 꿈이었다.
아무리 꿈에서 몇 번을 대련해도, 금목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금목환에게 지고 목검의 끝이 목에 닿았다.
“이런, 유월아···. 넌 내가 생각한 아이가 아니었구나. 너보다 더 좋은 재능이 여기 있었잖니.”
종리운은 갈유월이 아는 그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금목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악!”
갈유월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또 그 꿈이었다. 지고 난 이후에 계속 꾸는 꿈.숨이 헐떡거리고 등줄기가 축축했다.
금목환의 질문이 다시 머리에 맴돌았다.
- 넌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갈유월은 입술을 씹었다. 지금 갈유월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금목환이었다.
*
지금 시각은 묘시. 아직 어둠이 다 거둬지지 않은 시각이었다. 이렇게 빨리 일어난 이유는, 배편이 바로 반 시진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며칠 쓴 방을 정리하고 중원에 갈 채비를 했다. 바로 가는 건 아니었지만, 이제 여기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었다.
우리가 나가자, 전각에는 이미 황금세가로 같이 가는 해남파 여섯 명이 나와 있었다.
안면이 있는 권동운 장로, 양초원, 왕진현을 제외하고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개중에 삼대제자 둘이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은 기억났다. 비무를 했기 때문에.
“사제. 잘 잤나.”
“네. 잘 주무셨습니까. 사형.”
권동운은 낄낄 웃었다. 뭔가 내게 사형이라는 호칭을 듣는 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사숙. 배분이 중요한 정파의 도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기분이 안 나쁜 걸 보면 그냥 인습(因習)이 아니었을까요?”
“애초에 정파의 도리가 대개 구태인 것을.”
“그보다 아침은 배 타고 광동에서 먹죠. 해남 음식 질려 죽겠어.”
“마음대로 하거라.”
권동운과 곽진도는 서로 말을 했다. 삼대제자들과 이대제자들은 가만히 있었다. 아마 높은 사람들이 있으니 예의를 차리는 것 같았다. 반면에 명재희는 마루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었다. 갈유월은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인지 멍한 표정이었다.
나는 북쪽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맑을 예정인지, 안개가 없었다. 배 하나가 물살과 어둠을 하얗게 가르며 해남도 해구로 달려오고 있었다. 곽진도와 권동운도 그걸 같이 봤다.
“딱 장문인께 인사드리고, 슬슬 내려가면 되겠군.”
“그러죠. 슬슬 움직입시다.”
우리는 적유엽을 비롯한 해남파 무인들에게 인사를 했다. 역시 명문 문파라 그런가, 이들은 애초에 하루의 시작이 묘시였다.
적유엽을 포함해 해남파 무인들이 약 삼대제자까지 합쳐서 총 이백 명 정도가 있었는데, 거의 모든 이에게 환대를 받고 여모봉을 내려오는 것 같았다.
“어우, 오랜만에 강호 나가보네.”
권동운은 등을 돌리자마자 바로 후련하고 설렌다는 표정을 지었다. 광동에서 밥을 먹자는 권동운의 의견에 우리는 바로 배에 올라탔다.
나는 뒤를 돌아 해남도를 바라봤다. 해남파에서 참 많은 걸 얻고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그걸 중원에서 사용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