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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세가 절대무신-73화 (74/225)

73화 개화(開花)

73화 개화(開花)

적유엽의 첫 초식은 해운무봉으로 시작했다. 남해십이검이 익숙할 금목환을 위한 나름의 배려였다. 배려를 할 수밖에 없었다.

힘도 낮추고, 속도도 낮춰야 했다. 초절정고수가 비무를 할 때면 늘 그래야 했다.

물줄기를 닮은 검격 하나가 금목환의 가슴 중앙을 향했다. 금목환은 침착하게 왼발을 뒤로 빼고 상체를 오른방향으로 틀었다. 정면으로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금목환의 검에서 푸른 기가 나오는 듯 하더니 순식간에 응축됐다. 이 초식, 홍곡유수였다.

쿠구궁!

금목환의 왼발에서 왼쪽으로 두 치를 벗어난 땅에 검흔이 났다.

“홍곡유수는 좋은 방어 초식이지만, 방어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반격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지.”

적유엽이 해남파의 보법인 천랑보(川浪步)를 썼다. 미끄러지듯 금목환의 오른쪽 안을 파고들었다. 금목환의 오른발에 밟힌 땅이 살짝 내려앉았다. 빨리 몸을 돌리기 위해서 발에 기를 내려 보내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적유엽이 검을 쥔 손이 왼손으로 바뀌었다. 반수검을 섞는 것이다. 적유엽의 검은 팔꿈치 안쪽 끝을 찔러갔다. 소해혈(小海穴). 목숨에 치명적인 혈은 아니었지만, 팔 하나를 완전히 뺏을 수 있는 혈이었다.

“더 빨리 돌아야지!”

아직도 금목환의 등을 보고 있는 적유엽은 호통을 쳤지만, 순간 금목환의 신형이 흔들렸다.

금목환은 어느새 등을 돌린 채 허리를 숙여 적유엽의 머리 방향으로 발검했다. 적유엽이 웃었다.

“목현학, 그 녀석의 보법이로구나! 그건 또 어떻게 배웠느냐?”

적유엽은 놀랐다. 은밀하면서도 신출귀몰한 움직임. 익히 알고 있는 목현학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배우게 됐습니다.”

“하하. 그래. 내 묻지 않으마.”

적유엽의 눈앞에 금목환의 날카로운 검격이 왔지만, 발뒤꿈치를 땅바닥에 꽂은 적유엽이 몸을 반으로 꺾었다. 철판교(鐵板橋)의 수법이었다.

바닥과 수평을 이룰 정도로 꺾인 적유엽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궁신탄영(弓身彈影)이었다. 금목환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앞으로 도약했다.

“훌륭한 판단이다!”

적유엽이 외쳤다. 이제 금목환에게는 답할 여유는 없는 듯했다.

반동을 이용해 정면으로 내질러지는 힘을 줄이는 방법은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닌, 최대한 앞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물론 위험부담은 있지만 말이다.

파고든 금목환은 적유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은 한 줄기로 날아오는 듯하더니 중간부터 여덟 갈래로 갈라져 적유엽의 팔방을 모조리 점했다. 육 초식, 수세광대였다.

투두두둥!

두꺼운 범종(梵鐘)을 울리는 소리가 일곱번 연속으로 났다. 마지막 하나는 금목환의 검격이 튕기자 회수한 것이다. 바로 금목환이 땅을 도약했다. 신형은 흐려지더니 적유엽의 앞에 나타났다. 금목환의 몸은 바닥과 거의 수평이 될 정도였다. 고기를 썰듯 크게 휘두르는 검. 기가 넓게 퍼져 거대한 압박이 적유엽을 몰아붙였다. 칠 초식인 굉해일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적유엽은 검격을 받아쳐내며 속으로 생각했다. 몇 번 합을 나눠보니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어릴 때는 보통 스승의 검로를 닮기 마련이다. 자신의 검로를 찾는 건 검술이 완전히 숙달 된 다음 불혹 정도에서나 가능하다.

그런데 금목환은 남해십이검을 배울 때부터 자신의 검로를 찾은 듯 독특하게 검을 운용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뜻은···’

곽진도는 구결과 초식의 형만 알려주고, 묘리만 알려준 다음에 방치를 한 게 틀림없다.

그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천재를 다룰 때는 늘 틀에 가두는 걸 경계해야 하니. 곽진도의 방법도 맞았다. 물론 적어도 오 년은 기본을 가르치고 잡아준 다음 자신의 검법을 찾으라고 던져주는 식이지. 일 년도 안 된 제자를 그렇게 방치하는 사례는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도 금목환은 여러 방위를 바꿔가며 공격을 하고 있었다. 무복이 땀에 젖고 눈꺼풀에도 물방울이 앉았지만 전혀 힘든 티가 나지 않았다.

“수평선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공격을 하던 문득 금목환이 말했다.

적유엽은 금목환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도 처음에 금목환이 건넨 검법을 보며 믿을 수 없었다. 영해검법이라 놀란 것도 있지만, 금목환이 막혀있는 곳이 그 나이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알고 있단다. 마지막 조각이 없는 셈이지.”

“맞습니다.”

“아무리 기재라고 생각을 해도, 너는 계속 내 상상을 뛰어넘는 아이다.”

이 지학도 안 된 어린 아이가, 벌써 자신만의 바다를 찾으려고 더듬거리는 것이었다. 이미 그 정도의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지.

보통 무인들은 무공과 정신을 동시에 수련하기에 비슷하게 성장한다.

그러나 금목환은 이미 정신은 완전히 단련되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금목환에게 부족한 건 경험이었다. 적유엽은 그럴 때 가장 유효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조심하거라. 광랑검이란 별호는 골패(骨牌)로 딴 게 아니니.”

그건 바로, 완벽히 완성된 타인의 바다를 보는 것이었다. 물론 위험도가 있는 방법이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금목환이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금목환은 압박을 느꼈겠지만, 적유엽은 자신이 완성시킨 바다의 일부를 보여줬을 뿐, 전부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최대한 공력을 낮춰도 광랑은 흉포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들끼리 부딪쳐 이상한 곳으로 튀기도 하며 휩쓸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쩡쩡거리는 소리가 났다.

“···흡!”

금목환은 받아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신법으로 피하려고 했다.

이건 무인의 본능이었겠다. 당연히 맞받아치면 휘말릴 게 분명했으니. 하지만 적유엽이 바라는 건 맞서는 것이었다. 본능이 맞서지 않는다면, 본성이 나올 시간도 나오지 않으면 됐다.

바로 방향을 튼 적유엽이 금목환의 정면을 먼저 점했다. 그리고 금목환이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에 초식을 펼쳤다. 남해십이검의 전부, 열두 개의 초식을 한 번에 말이다.

일이관지(一以貫之). 모든 검법이 극성에 이르면 일검에 그 검법의 묘리를 꿰뚫을 수 있었다.

콰콰쾅!

금목환에게 닿기도 전에 굉음이 났다. 금목환은 피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잠깐 멈춰서 눈을 매섭게 떴다. 파도의 틈을 찾는 것이었다.

적유엽은 그 자세가 기특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금목환에게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질 텐데, 어찌 저리 평안하단 말인가. 마치 죽음을 경험이라도 해본 사람처럼 말이다.

금목환은 바로 파도로 뛰어 들었다. 열두 개의 초식을 거두기도 전이었다.

“···이런!”

적유엽은 기함을 했다. 당연히 이 초식으로 금목환을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중간에 거둬들일 심산이었던 거다. 바다를 찾는 건 그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근데 금목환은 공격 범위 속으로 제 발로 들어간 거다.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펼치는 남해십이검을 정면으로 보면, 해남파의 이대제자들은 태반이 기절할 거다. 죽음을 마주한 공포가 각인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금목환이 압박을 버틸 줄은 알았다지만, 그걸 들어오는 건 적유엽도 예상하지 못했다.

기겁해서 순식간에 거두기는 했다지만, 그래도 완전히 회수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콰과과광!

서로 다른 성질의 기파가 부딪치면 일어나는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크게 올라왔다.

적유엽이 흙먼지들을 일 검에 하늘로 올려 보냈다. 그런 다음 바로 금목환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금목환이 두 팔을 내리고,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유엽이 눈을 부릅떴다.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열댓 번은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곧 금목환의 몸에서 푸른 기가 올라오고, 그것이 머리 위에서 꽃봉오리 모양을 만들었다. 화지장개였다. 금목환 정도의 재능과 깨달음이라면 능히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꽃봉오리가 영글었음에도 기는 계속 백회혈의 위로 모였다. 푸른 기는 모여서 금빛이 되었다. 봉오리는 조금씩 꺼풀을 벌려내고 있었다.

“흐읍!”

적유엽이 들이쉬던 숨이 중간에 턱 막혔다. 화지장개는 그야말로 유망한 후기지수의 상징. 그것만 보여줘도 세가나 문파에서 집중적인 관리를 받는다.

근데 개화(開花)는 다르다. 누가 관리를 해줘서 되는 게 아니다. 꽃봉오리를 품고 있는 칠 할은 개화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개화를 시키는 삼 할은 천고의 기재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적유엽이 놀라는 건 다름 아니었다. 현재 중원 최고의 기재로 평가받는 화산파의 초유열(楚柳熱)도 약관을 넘어서 개화했고, 역사를 봐도 약관 전에 넘어서 개화한 사례는 없었다.

‘천재가 아니었어.’

적유엽은 금목환의 머리 위에 뜬 황금색 꽃을 바라봤다. 역시 황금색으로 빛나는 꽃술은 찬란하기까지 했다.

‘괴물이었군.’

이 기나긴 무림의 역사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

분명 적유엽이 조절하고 있겠지만, 난 분명 살기를 느꼈다. 초절정 고수에 이르면 살기도 조절할 수 있는 거겠지. 어기상인(御氣傷人)의 경지란 이런 걸 뜻하는 것이었다.

정말 적유엽의 남해십이검은 쾌속하면서 형태가 자유분방하기 짝이 없었다. 난 계속 적유엽의 검을 받아치고 빗겨내며 검로의 형태를 살피려고 노력했다.

사람을 마구잡이로 집어삼키며 폭주하는 물살. 적유엽은 거친 파도를 많이 본 모양이었다. 곽진도가 말했던 이십 년 전의 해일도 여기 들어있을 터였다.

그렇게 합을 나누면서 나는 내 머릿속의 안개가 점차 흩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던 도중 적유엽이 보여준 굉장한 초식을 보여준 거다. 저게 바로 남해십이검을 관통하는 묘리였다.

그 초식은 그야말로 자신의 바다를 화폭처럼 펼쳐 보여준 느낌이었다. 숨 막히는 압박감. 이건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바다를 좀 더 가까이 보고 싶었다.

“···이런!”

내가 들어가서 적유엽의 바다를 본 건 그 소리가 들렸던 찰나였다. 위협적인 검기가 소용돌이처럼 날아다녔고, 그 중 몇 개는 내 피부를 베기도 했다.

하지만 수확은 있었다. 소용돌이 너머로 큰 상어 지느러미가 이어진 것만 같은 수평선이. 적유엽에게 바다란, 해일을 머금고 계속 내뿜는 광기의 집합체였다.

내 마음 안에 심상(心象)이 맺히기 시작했다. 수평선은 좇으면 좇는 대로 멀어진다. 평면이었던 내 심상이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바다의 끝에서 폭포가 떨어지듯 물이 떨어지고, 그 내려간 물줄기들은 반대에서 내려온 물줄기와 합쳐진다.

···

그런 생각들을 계속 했던 것 같다. 그 외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었다.

퍼뜩 내 앞에 연무장의 바닥이 보일 때서야, 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옆에는 적유엽이 검을 들고 호법을 서주고 있었다.

“···깨달음의 순간이었군요.”

난 그것을 보고 방금 전까지의 내 상태를 알았다.

어느새 맑았던 하늘은 노을이 져있는 상태였다. 반나절은 이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적유엽은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호법을 서줬다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적유엽은 반쯤 늦게 답했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는 눈빛과 목소리였다. 혹시 내가 깨달음을 얻을 때 무언가를 본 것일까. 허나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

해남파에 있는 금창약(金瘡藥)은 효과가 좋았다. 일반 금창약이 아닌 도인들이 연단을 해서 만든 금창약이라 수준이 다르다고 하긴 했지만, 벌어진 피부가 바로 붙고 새살이 돋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 난 상처를 다 치료하고 밤이 다 되어서야 외원의 거처로 돌아왔다.

‘심법도 뭔가 바뀐 느낌이 있었어.’

난 바로 방 중앙으로 가서 태을헌원신공을 일으켰다. 머리에서부터 기가 명주처럼 풀려나와 온 몸을 덥혔다. 남해십이검을 관통하는 깨달음을 얻으며 같이 얻은 듯, 예상대로 태을헌원신공 역시 사 성까지 올라있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얻어맞을 정도는 아니겠어.’

난 생각했다. 돌아다니며 많은 무인들을 보고, 또 해남파에서 많은 무인들을 보니 평균적인 무인들의 경지를 알았다. 이미 나는 그걸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면 좀 더 과감하게 움직일 수 있지.’

이번 해남행에서 생각보다 많은 수확을 걷었다. 구파일방들의 대략적인 관계라든지, 명문 문파 제자들의 평균적인 수준이라든지, 해남파의 높은 배분과 그걸 상징하는 네 개의 매듭이라든지, 무공에 대한 깨달음이라든지.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그렇지만 난 해남파에 더 받을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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