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해남파의 사람이 됐으니
72화 해남파의 사람이 됐으니
“여기가 장문인과 장로분들께서 회의를 하는 곳입니다.”
난 지금 해남파의 회의실 앞에 와있다. 깨자마자 씻고 바로 부름을 당한 것이다. 곽진도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꽤 일찍 부르는구나 생각했다. 양초원은 검지를 구부려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양초원입니다. 황금세가 가주님을 모셔왔습니다.”
“들어와라.”
그는 예와 같이 문을 열어주고 뒤로 빠졌다. 장로들과 장문인의 시선이 곧장 내게로 쏠렸다. 상은 중앙의 장문인 자리에서 새가 좌우 날개를 뻗치듯 대각선으로 쭉 나있었다.
“왔군.”
적유엽이 미소를 지었다. 적유엽의 바로 앞자리가 비어있었다. 하긴 내가 입적하는데 말석에 앉으면 좀 이상하기는 했다.
“잘 쉬었나?”
“네.”
비워진 자리에 착석했다. 장로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근데 보통 입적을 이렇게 장로님들이 다 계신 곳에서 하나요?”
내가 물었다. 장로들은 껄껄 웃었다.
“당연히 아니지. 그냥 장문인실로 불러서 해결하지. 입적할 때마다 장로들이 모일 정도로 우리가 한가한 문파는 아닐세.”
대답은 적유엽에서 나왔다. 적유엽도 날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만, 장로들이 전부 자네를 보고 싶어 해서 모인 것이지. 또 사손 급으로 먼 것도 아니고, 동배분이나 사질 정도로 가까우니.”
난 다시 장로들을 둘러봤다. 장로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근데 제가 동배분이 되면 불편하실 분이 있을 것 같은데요.”
“아니. 괜찮네. 우리는 다 괜찮아.”
앉아있던 장로 중 한 명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장로였다. 곽진도와 같이 있을 때 마주친 권동운이었다.
“이미 다 얘기가 끝난 거니까. 안 그런가?”
“그렇지.”
적유엽도 동조를 했다. 나는 잠깐 계산을 해봤다. 강호의 셈법은 어려웠다. 상계는 나이였지만, 여기는 배분이니까.
“그럼 저는 사부님보다 한 배분 낮은 사람들을 사형이라 부르고, 사부님과 배분이 같은 사람은 사숙이라고 불러야 되는군요.”
“그렇지, 그렇지. 역시 똑똑하군. 사제.”
“혹여 반말하는 제자들이 있으면 얘기하게나. 내 문칙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니.”
장로들은 내게 호의적이었다. 나중에 곽진도에게 들어보니, 이 의식은 꽤 중요하다고 했다.
마치 상계에서 투자를 격려할 때 여는 설명회 같은 느낌이었다. 단지 여기는 투자라는 금전이 오가는 게 아닌, 명예가 오고 가는 거다.
거기서 내가 해남의 새로운 무공을 변형하여 보여준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환대도 이해가 됐다.
“알겠습니다. 사형.”
“허허. 사형, 참 듣기 좋은 발음이군.”
장로들은 모두 나를 바라보는데, 아이가 발걸음을 뗄 때 대견해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지만 입적이 먼저였다. 적유엽은 장로들의 소란이 살짝 가라앉자 낡은 죽간 하나를 자리 밑에서 꺼냈다.
- 海南派 系譜(해남파 계보)
죽간의 맨 처음에는 멋들어진 필체로 그런 글자들이 적혀져 있었다.
적유엽은 손가락으로 죽간을 죽 훑었다. 죽간 안에는 장문인과 제자들의 계보가 나뉘어져 있었다.
슬쩍 보니 적유엽은 이십구 대 장문인이었고, 사십 이대의 제자였다. 대수가 다른 이유는 아무래도 제자들은 정기적으로 뽑는데, 장문인들은 임기의 주기가 정해져있지 않아서 그런 듯했다.
그렇다면 곽진도는 본산 사십 삼대 제자가 되며, 난 자연스럽게 사십 사대 제자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 양초원 같은 막내들은 사십 오대인 거고.
“자, 여기다 자네가 이름을 쓰면 되네.”
내 계산이 맞았는지 사십 사대 제자들이 있는 칸에 적유엽이 손가락을 내밀었다.
계보에는 이름이 지워진 칸도 많았다. 아마 제명이 된 사람들이겠지. 나는 적유엽이 지정해준 곳에 붓으로 내 이름을 썼다.
“오오, 필체도 아주 유려하군. 서성(書聖)이 따로 없어.”
“과찬입니다.”
나는 바로 죽간을 접어서 적유엽에게 넘겨줬다.
“이제 목환이라고 불러도 되겠군. 이제 해남파의 사람이 됐으니.”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목환이는 본산 제자로 취급이 되지만, 강호 출도를 한 셈으로 쳐야겠어. 장로급 배분이니 그래도 이상하지는 않겠군.”
이렇게 내가 해남파에 입적하는 의식이 끝난 셈이었다.
그 이후 장로들이 참 많은 걸 물어봤다. 사실 대다수가 불필요한 질문들이었다. 피부가 왜 이렇게 하얗냐, 볼 한 번 만져 봐도 되냐···이런 식이었다. 물론 볼을 만지는 건 거절했다.
장로들이 나를 둘러쌌다. 대체 갈 기미가 안 보였는데, 적유엽이 나섰다.
“각자 가서 일들 해. 지금 노는 시간인가?”
장로들은 적유엽의 한 마디에 꼬리를 말며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적유엽이 문을 손수 닫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좀 조용해졌군. 너무 밉게 생각하지는 마려무나. 귀여운 사제가 들어왔으니 좀 신난 듯하니.”
“괜찮습니다.”
적유엽은 민망한 듯 웃었다. 그는 다시 장문인 자리에 앉았다. 나도 따라서 옆의 자리에 앉았다.
“다시 한 번, 장문인으로서 감사를 표해야겠군. 진도에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식은 꽤 중요한 거였거든.”
“내용은 대략 들었습니다.”
“그럼 말이 빠르지. 너는 반수검을 변형시켜 새로운 상승의 무공을 만들었고, 그걸 중원 사람들에게 보여줬지. 해남파의 체면을 유일무이하게 지킨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해.”
“그 정도인가요.”
그 의식이 중요하긴 했나보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걸보면.
“사실 그 정도를 넘어섰지. 목환아, 혹시 영해검법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나?”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난 잠깐 머리를 뒤적였다. 전생이나 지금 생을 통틀어서 영해라는 이름을 가진 검법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모릅니다.”
적유엽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는 잠시 날 바라보더니 일어나서 등을 돌렸다.
“따라와봐라.”
나도 자리를 떴다. 적유엽은 회의장 뒤쪽에 있는 태극 문양으로 되어 있는 벽을 두 손으로 밀었다. 그냥 흔한 벽인 줄 알았는데, 뒤에는 숨겨진 공간이 있었다.
태극문양이 좌우로 갈리고, 어두운 방이 보였다. 천장에는 흐린 야명주가 하나 달려 있었지만 방구석까지 전부 비춰지지는 않았다.
적유엽의 뒤를 따라 들어오면서, 난 여기가 어디인지 대번에 눈치 챘다.
중앙으로 난 길에 좌우로 나란히 선 위패가 있었고, 그 길의 끝에는 딱 사람 정도의 크기로 제작된 동상이 있었다. 여기는 우리 세가의 등령당같이 고인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것이었다.
“해남파 이십 구대 장문인 적유엽이 선배 고인들을 뵙습니다.”
적유엽은 포권을 하고, 나도 따라서 포권을 했다. 우리는 영령들에게 인사를 한 다음 쭉 나아갔다. 적유엽이 길의 끝까지 걸어갔다. 동상이 있는 곳이었다.
“이 분이 탁번응, 해남파의 개파조사시지.”
“그렇군요.”
난 위를 올려다봤다. 동상이었지만 두꺼운 눈썹과 날렵한 턱은 그의 성격이 온후하지 않았음을 유추하게끔 했다.
“사당이 꽤 특이한 곳에 있군요.”
“회의를 할 때 문파의 어른들이 지켜보고 계시다는 의미지. 방금 사람 하나를 둘러싸 주절거리는 걸 보시며 탄식을 했을 게야.”
적유엽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동상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여기 데려온 의미가 무엇인 것 같은가?”
“갓 입적한 후인을 소개시켜주는 건가요?"
“물론 그런 의미도 있지. 우리들의 뿌리는 이 분이니까. 하지만 다른 의미도 있다네.”
적유엽이 말했다.
“아까 내가 영해검법을 아냐고 물었었지? 그건 이 개파조사님의 독문무공이야.”
나를 바라보는 적유엽의 눈빛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근데 네가 펼친 게 영해검법의 초식이었어. 첫 초식과 두 번째 초식은 내가 아는 초식이었고, 세 번째 초식부터 여섯 번째 초식까지는 처음 본 거지.”
“그럼 우연찮게 겹친 모양이군요.”
“그건 절대 아니다. 목환이 네가 펼친 첫 번째 초식과 두 번째 초식은 영해검법과 소름 돋게 일치해. 또한 세 번째 초식, 네 번째 초식은 삼라수정(森羅水晶), 대양함전(大洋含全) 이름만 남겨져있고 실전되어있었어. 난 네 검을 보며 직감적으로 느꼈지. 저게 삼라수정이고 대양함전이라고.”
난 잠깐 고개를 숙여 생각을 해봤다. 내가 해남파의 기록과 장문인을 지레짐작해서 해석한 게 맞았다. 그렇다면 내 해석이 맞았다는 거겠다.
“해남파의 역사를 보고, 장문인이 무공을 만들었을 즈음의 기록까지 봤으니 만든 것이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이건 목환이 네가 개파조사님의 깨달음에 닿은 게야. 우리는 몇 년 동안 머리를 맞대도 닿아보지도 못한 것을 하루 만에 해낸 셈이지.”
적유엽이 나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 내가 감사함을 표하는 거지. 그래서 난 해남파의 대표로서 보은을 하려고 한다.”
“보은이요?”
느닷없이 나온 말에 난 반문했다. 나한테 무슨 보은을 한다는 말인지.
“따라오거라.”
적유엽은 다시 비동에서 벗어나 회의실 뒤의 태극 문양을 맞춰놓고, 회의실을 나갔다. 난 그저 적유엽 뒤를 쫓았다.
우리가 갈 곳은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장문인실이 있는 전각 뒤편이었다. 난 몰랐지만, 전각의 뒤편은 굉장히 광활한 평지였다. 모양을 보면 산을 깎아서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아마 장문인 전용 연무장인 것 같았다. 장문인이 초절정고수이니, 이 정도 공간은 있어야 한다는 걸 테다.
“여기가 내가 쓰는 연무장일세.”
내 예상대로였다. 적유엽은 말하면서 품을 뒤적였다. 곧 흰 표지로 된 책이 나왔다. 그건 내가 적유엽에게 준 반수검을 변형한 비급이었다.
“목환이 네가 해남파의 역사와 장문인의 기록으로 무공을 변형했었지. 그런 것처럼 본 장문인도 네가 쓴 무공을 보고 지금 어떤 부분에서 고민하고 있는지 알 것 같더구나.”
난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난 반수검을 변형하여 총 열두 초식을 만들었지만, 마지막 초식이 빠져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적유엽도 아마 그걸 느낀 모양이었다.
“들켰군요.”
“자신의 바다를 만들겠다는 생각. 팔 초식 귀해원(歸海原)은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야. 지금 아마 칠 초식 굉해일까지 익힌 게지?”
“네, 그렇습니다.”
나는 대답하면서, 이게 의표를 찔린 기분이구나 생각했다. 생각보다 무공은 본인의 많은 모습을 노출시키는 거다.
“손바닥을 내밀어 보거라.”
난 손바닥을 내밀었다. 적유엽의 주름잡힌 손이 내 손바닥 여기저기를 꾹꾹 눌렀다.
“남해십이검을 익힌 지 일 년도 채 안 됐구나.”
손바닥의 근육만 눌러보고 그걸 알 수 있는 건가. 역시 오랜 인생을 살아온 장문인의 경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작년 소만 때쯤이었습니다.”
“그렇지. 근데 벌써 칠 초식이라니. 대단하구나.”
적유엽은 내 손을 놓고 말없이 뒤를 돌아 걸었다. 무슨 행동인가 싶었는데, 어느 정도 나와 거리를 벌린 적유엽의 손이 허리춤으로 갔다. 그 손끝에서 살기가 느껴져, 나도 모르게 손이 송로로 갔다.
적유엽이 빙그레 웃었다.
“무인의 자세는 훌륭하구나. 자신의 바다를 못 찾는 이유는 바다를 많이 못 봤기 때문이야. 무공은 날마다 갈고 닦고, 부딪치고 꺾이면서 깎아가는 것이지. 경험은 부족한데 재능은 넘쳐나 부딪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윤곽이 안 보였던 게지.”
나와 적유엽이 거의 동시에 발검했다. 적유엽이 나한테 무엇을 줄 것인지는 명확했다. 바로 무공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그러니 내가 벽을 보여주마.”
적유엽의 몸에서 남색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눈에서도 청백색의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난 그의 뒤에서 파도를 보았다.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흉포한 파도를 말이다.
그 파도는 나를 잡아먹으려는 듯 다가왔다. 난 눈을 부릅떴다. 지금껏 이해되지 않았던 광랑검이라는 별호가 바로 납득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