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좀 쉬었다 가는 것이 어떤가
71화 좀 쉬었다 가는 것이 어떤가
순간 곽진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매해 펼쳐지는 해남의 의식에서, 입적도 안 한 제자의 무공 시현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또 금목환은 그걸 흔쾌히 응하고 발검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공을 시현하라고 하는데 저렇게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금목환의 무공은 자신이 증명하는 바이지만, 방금 만든 무공을 시현하라는 건 난이도가 다른 이야기였다.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인지. 적유엽을 바라봤지만 그는 그저 침중한 눈빛으로 입을 닫고 있었다.
금목환이 검을 들어 기수식을 갖췄다. 그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반수검의 시작과 같았다.
“검법을 보여주기 전에 칼부터 갈아야 되는 것 아닌가?”
목송이 금목환이 꺼낸 검을 보며 어깃장을 놨다. 몇몇 사람들이 웃었다. 검법을 보여주는 것이니 검의 예기는 전혀 상관이 없었지만, 확실히 누가 보기에도 낡은 검이기는 했다.
하지만 금목환의 칼끝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쳐다보지도 않고, 반응도 안했다. 아예 취급을 안 한다는 느낌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그저 그 말을 남기고 검을 휘둘렀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수식만 반수검과 같지, 아예 다른 무공들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목환이 펼치는 검술은 날카롭지만 때때로 부드럽고, 폭발적인 힘이 담겨있었다. 검로 하나하나마다 웅비(雄飛)함이 깃들어 있었다.
현란하게 휘둘러지는 칼춤에 구파일방의 무리들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엄청난 상승의 검술이었다. 웬만한 오성이 없으면 촉수(觸手)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만큼 금목환의 칼춤은 신출귀몰했다. 바닥에서 끌어져 나오는 듯하더니 어느덧 정면을 지르고 있기도 했고, 한 번의 검격에 여섯 번의 변화가 담겨있기도 했다.
“···이게 반수검의 변형이라.”
지켜보던 무인 중 하나가 멍하니 읊조렸다. 제일 신기한 건 저런 상승의 검술에서 반수검을 변형했다는 게 명백히 보인다는 것이었다. 지금 금목환의 검결을 쉽게 다듬으면 반수검과 똑같을 정도였다.
보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똑같은 심정이었다. 분명 자신이 아는 반수검과 비슷한데, 훨씬 더 상승의 무공이라니.
“···대단하군.”
화산의 청수 진인도 순수하게 감탄을 했다. 저건 어린 아이가 펼칠만한 검술이 아니었다. 근데 저 아이는 펼치는 걸 모자라 자신이 만들기까지 했단다.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고 있는 건 적유엽이었다.
사실 적유엽은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었지만, 금목환이 가져다 준 비급의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신뢰할 수 없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무공 비급은 낡은 표지에 만지면 부서질 것만 같이 산화된 종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허나 금목환이 들고 온 책은 무공 비급이라기에는 너무 세련된 장정의 형태였다.
형태도 이질적이었지만, 애초에 하루 만에 무공을 변형시킨다는 건 상식상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적유엽은 책을 펼쳤고, 첫 장을 보자마자 두 눈을 의심했다.
구결은 약간 다르지만, 무공의 형태를 보면 분명 해남파 개파조사 탁번응(卓蕃鷹)의 영해검법(瀛海劍法)이었으니까.
금목환이 영해검법을 알고 한 건 당연히 아닐 터였다. 왜냐하면 영해검법은 지금도 실전된 초식을 복구하고 있어 해남 밖으로 나온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공을 보여 달라 한 것이었다. 실현 가능한 무공인지, 자신이 알고 있는 영해검법이 맞는지 말이다. 해남파에는 영해검법의 두 번째 초식까지 있었으니, 충분히 분별할 수 있었다.
영해검법과 첫 번째 초식과 두 번째 초식은 완벽히 일치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금목환은 원래 알고 있던 무공인 양 자연스럽게 이어나갔다.
적유엽은 이름만 남아있는 삼 초식과 사 초식을 떠올려봤다. 삼라수정(森羅水晶), 대양함전(大洋含全). 금목환이 만들어놓은 무공을 보니, 딱 그 초식의 이름에 걸맞았다. 정말 해남파의 실전 무공을 이 어린 아이가 찾은 것이었다.
‘근데 그게 가능한 건가.’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믿지 못해도 현실은 현실. 적유엽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이건 천하가 탐내할 재능이었다. 천재라는 단어로도 설명이 부족할 정도의 재능.
‘여차했으면 해남파의 홍복(洪福)을 제 발로 찰 뻔했군.’
적유엽은 괜히 마음이 덜컹했다. 신경전을 했을 때 금목환이 그냥 등을 돌려 나갔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저 인재는 무조건 해남파의 것이어야만 했다. 누가 먼저 보기 전에 침을 발라놓을 아이였다.
적유엽은 역시 멍한 눈으로 검법을 보고 있는 곽진도를 바라봤다. 순간 그렇게 속을 뒤집어놨던 곽진도라는 제자 녀석이 참 사랑스러워 보였다. 어린 기린(麒麟)을 해남파에 물고 왔으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으랴.
‘정말 훌륭하군.’
심지어 이제는 이름도 모르는 다섯 번째 초식을 펼치고 있다.
적유엽의 마음에 깊은 만족감이 찼다. 내심 포기하고 있던 이번 의식도 뒤집고, 금목환을 해남의 제자라고 인식시키지 않았는가.
적유엽이 장문인이 된 이후로, 이렇게 성공적인 의식은 처음이었다.
*
내가 반수검을 해석하면서 가장 참고 한 건 해남의 역사와 장문인이 반수검을 만들어낸 배경이었다.
반수검은 일견 바다와 상관없어 보이나, 무한한 변화와 종잡을 수 없는 검로는 바다와 똑 닮아있었다. 모르는 이에게는 난잡해 보였겠지만, 나는 커다란 순환 속에서 반복되는 부분을 눈치 챘다. 그것이 바로 해남파 개파조사가 품고 있는 바다였다.
물은 참 신기한 물질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무서운 압박을 주기도 하며, 어떤 이에게는 마음의 평화를 주기도 하며, 어떤 이에게는 허탈하리만치 광막함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내 검은 흘러갔다. 이 검은 내 검이 아니었다. 다만, 해남파 장문인이라면 이런 식의 무공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했다.
그의 바다는 포용적이지 않고 배타적이었다. 흙이 물결에 휩쓸리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아닌 잡아먹는 것으로 보았다. 패도적이면서 살초가 많은 이유는 그러한 성향 때문이었다.
“후.”
난 그렇게 짧은 시범을 마쳤다. 이론은 완성되어 있었지만, 내가 펼칠 수 있는 초식은 한정되어 있었다.
내가 납검을 하자 모두의 입에서 탄식이 펼쳐져 나왔다. 그들도 느낀 것이다. 이 이후로 검법이 더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집중하면서 보고 있는 것이 끊기니 확 맥이 풀어진 것이다.
그 뒤 잠깐 정적이 흐르더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중에서도 조용한 곳이 있기는 했다. 바로 목송과 청진이 있는 구파일방 쪽이었다.
“목송 장로님. 아직도 상계의 제자를 받는 게 구파일방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난 목송을 바라보며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목송과 청진 쪽으로 쏠렸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중간부터 들었지만 전체 내용을 유추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장로님은 지금 저희 황금세가를 모욕하고, 해남파 역시 모욕하셨습니다.”
내 말에 목송은 어떤 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흥미로워졌다. 당장 이 사태가 벌어진 것도 목송 때문이었고, 내가 검법을 시현하기 전에 조롱했던 것도 목송이었기 때문이다.
목송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청진을 데리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구파일방 일행도 남겨두면서까지 말이다.
난 하늘을 바라봤다. 달의 위치를 보니 대략 해시 초였다.
해남파의 의식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
모두 최악이라고 예상했던 의식은 뜻밖에도 대성공이었다. 의식의 성패를 가르는 건 참석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구파일방의 사람들은 왠지 착잡한 표정으로 나갔고, 다른 참석자들은 마지막에 본 금목환의 검법에 빠져 그 전에 지루했던 것도 완전히 까먹은 듯 감탄하며 나갔다.
이제 중원은 해남파에 훌륭한 무공이 나왔다며 웅성댈 것이다. 그 커다란 소식에 알음알음 시현을 한 사람에 대한 것도 퍼질 터였고.
“사숙. 중원을 유랑한 건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정말 대단하더군. 어디서 그런 천재를 구해온 건가?”
해남 내원의 대전. 그곳에는 해남파 장로들과 적유엽이 있었다. 의식의 결산을 할 때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곽진도는 여기서 장로가 아닌 유일한 사람이었다.
곽진도는 본인을 데려온 이유를 대충 예상했다. 못 본 사람도 있겠지만, 이미 해남파 내부에서 금목환이라는 아이가 천재라는 사실은 널리 퍼져있었다.
“큼, 큼. 역시 내 제자라 안목이 있었어.”
적유엽은 한 마디 끼어들었다. 곽진도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중원에 돌아다닌다고, 상계의 일에 간섭한다고 핍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저런 말이라니. 그래도 금목환이 인정받는 건 곽진도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장문인. 그러면 목환이를 입적시켜주시는 겁니까?”
“그럼, 당연하지. 그걸 말로 해야 아는가.”
적유엽과 장로들은 입을 모아서 말했다. 여기서 동배분이 되어야 할 장로들도 많았지만,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사제는 본산에 들어오는 건가?”
“본산에 들어오면 좋겠군. 검술도 그렇지만 얼굴 봤나? 되게 귀엽게 생겼던데.”
사십 년 정도 어린 아이에게 사제라는 표현도 아주 거리낌 없이 써버린다.
이해는 됐다. 자그마치 해남파의 절전 무공을 하루 만에 복원해낸 천재니까.
절전 무공도 그냥 절전 무공인가. 금목환이 시현한 무공은 절전된 개파조사의 무공이었다. 그건 곽진도도 해남에 와서 처음 안 사실이었다. 해남파 사람들의 눈이 뒤집히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던 거다.
“···본산으로 들어오는 건 좀 힘들겠지?”
적유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곽진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렇군.”
적유엽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사실 금목환이 입적한다고 한들, 적유엽이 이래라 저래라 하기는 어려웠다. 본산 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호칭만 조금 바뀔 뿐, 금목환은 황금세가의 가주로 다시 복귀할 터다.
마음 같아서는 본산에 감금을 하고 싶지만 금목환의 성격상 절대 안 될 게 분명했다. 금목환은 그저 입적만 할 뿐이다. 그러나 적유엽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눈치를 살피던 곽진도가 적유엽에게 물었다.
“그럼 저도 해남파로 안 돌아와도 됩니까?”
“그건 내가 약속한 바니까. 그리고 너는 지금 황금세가에 있는 게 맞다. 곧 제자들 편으로 황금세가에 해남의 비급들을 보낼 거야. 그걸 감독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적유엽이 진지하게 말했다. 한 문파를 바꿀 수 있는 인재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
당장 해남파가 파문을 하고 남해십이검을 내놓으라고 해도 충분히 내놓을 수 있는 아이다. 저렇게 무공을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난데, 다른 무공은 못 만들겠는가. 아쉬운 건 해남파지 금목환이 아니었다.
“지금 가주, 아니, 사손은 뭐하고 있는가?”
“자고 있습니다. 어제 밤을 새서 무공을 본 모양이더군요.”
“그렇군.”
곽진도의 대답에 적유엽이 아쉬움을 표했다. 뒷정리가 끝나자마자 소집된 회의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기는 했다. 의식을 정리하고, 외부인의 흔적을 지우는 데만 두 시진이 걸렸으니까.
“언제 출발할 예정인가?”
“글쎄요. 목환이한테 듣지는 않았지만, 내일 가겠죠?”
적유엽은 눈을 번뜩였다. 아직 예정된 일정은 없다는 뜻이었다.
“먼 길 왔는데, 좀 쉬었다 가는 것이 어떤가?”
금목환이 다시 해남파로 찾아오리라는 보장도 없는 마당에, 적유엽은 이 연을 더 확실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내 사손에게 줄 것도 있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