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그건 곤란합니다
68화 그건 곤란합니다
우리는 해남파 삼대제자의 인도로 해남파 안으로 바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 사이에 목송과 청진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이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다.
아마 자신들은 기다려야 하는데, 먼저 들어가는 것에서 화가 나는 걸 테다. 그래도 곽진도가 해남파의 사람이니 항의도 하기 애매할 거였다.
특히 청진은 갈유월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지만 갈유월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앞만 바라봤다.
“여기가 해남파입니다.”
“멋있네요.”
“감사드립니다. 황금세가의 가주님이시죠?”
“네. 금목환입니다.”
양초원은 내 생각보다 예의가 발랐다. 내가 직접 말을 섞어본 정파의 무인이라고는 무림맹 사람들을 제외하면 형산파의 옹씨 형제들, 목송, 청진 이런 사람들이었는데 말이다.
모든 정파의 무인들이 그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사실 같은 무리 안에서도 여러 인간 군상이 나뉘듯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직접 보고나니 또 다르게 느껴졌다.
“근데 옆에 계신 두 소저 분들에 대해서는 들은 얘기가 없군요.”
“아.”
그럴 만했다. 난 그 서한을 받자마자 바로 근시일내에 간다는 답신을 보냈고, 그곳에 명재희와 갈유월의 이야기는 없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문제가 되는 걸까요?”
“아뇨. 사숙조님의 일행들이라고 하셨으니 상관없습니다. 저한테 정체를 밝히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군요.”
양초원은 꽤 고지식한 편인 듯했다.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건 방향성에 따라서 신념이 되거나 고집이 되기도 하지만, 양초원이 고집스러운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해남파 안은 분주했다. 이미 들어온 외부인들도 많고, 푸른 옷과 두건을 입은 해남파의 제자들이 의식을 준비하는 듯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내 눈에 띄는 게 있었다.
“경공을 안 쓰는군요.”
황금세가 내부에서는 내 형제들도, 무인들도, 심지어 나도 경공을 쓰며 달린다. 그렇게라도 경공을 써야 실력이 빨리 늘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이 써야 느는 건 확실한 방법이었다.
“문파 내부에서는 연무장을 제외하고서는 쓰면 안 되지.”
“그런가요?”
“제대로 된 무인이라면 남의 거처에서 경공을 쓰지는 않지. 문파 내부에는 태사조들의 유해가 잠들어계시니까. 경공을 써서 그분들의 휴식을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군요.”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등령당이라는 다른 묘지를 쓰고 있으니 뛰어다녀도 된다는 걸까.
하지만 기억을 되짚어 생각해보면 애초에 금정원에 있었던 여상우와 양철목도, 아이들을 지도하러 온 목현학 장로와 강운 장로도, 가주 인계식에 참여한 종리운도 경공을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명재희는 잘 쓰고 다녔지만. 그녀 역시 복잡해 보이는 정파의 도리를 다 알기는 어릴 거다. 지금 명재희도 몰랐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천천히 걸으며 해남파 내부로 점점 들어갔다. 많이 보이던 외부인이 슬슬 보이지 않았다. 해남파 역시 우리처럼 외부인이 드나들 수 있는 외원과 출입금지인 내원을 분리해놓은 것 같았다.
확실히 내원에 있는 무인들은 외원에 있는 무인들보다 평균적으로 매듭수가 많았다. 그 말은 곽진도가 아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거였다.
“사숙, 오셨군요.”
이렇게 말이다. 매듭을 네 개 지은 해남파의 무인이 우리를 보자마자 가까이 와서 포권했다. 사결이면 장로급일터인데, 곽진도가 그보다 배분이 위라는 거였다.
곽진도도 그를 보며 반가운 얼굴을 했다.
“사질. 오랜만이군. 한 칠 년만인가?”
“사숙께서 칠 년 동안 본파에 떠나계셨으니 그런 것 같습니다.”
곽진도의 사질이라는 사람은 웃으며 말했다. 분명 농담이었지만 말에 뼈가 있었다. 곽진도도 그 명백한 가시를 느낀 듯 헛기침을 했다.
“···작년에 잠깐 들렀다만.”
“아, 맞다. 제가 잠깐 운남에 가있을 때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해모환을 아무 이유 없이 뜯어가셨다고.”
“쓸 데가 있다고 했네. 심사가 왜 그렇게 까다로워진 건지. 원.”
“우리가 해모환을 수확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희가 얼마나 공들여 연단을 하는데요. 생각보다 삼대제자들 중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이 많아서 그 친구들 위주로 먹였죠. 사숙께서 해모환을 갈취하러 오셨을 때 창고에 다섯 개도 안 남았었다고 합니다.”
농담의 뼈는 점점 더 굵어졌다. 불혹과 지천명을 넘나드는 어른들의 싸움이 이런 것일까.
같이 봐온 세월도 오래됐으니 배분을 떠나서 농담을 할 수 있는 것일 터다. 물론 곽진도의 사질이 맺힌 것도 분명히 있어보였지만.
“그거 끝나고 장로회의 소집해서 장문인께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아십니까? 집 밖으로 나간 후레자식이 가보를 가지고 나가는데 그걸 지켜만 보고 있··· 아, 이건 장문인의 말씀입니다.”
“···그래, 미안하구나. 사질.”
“그런 말 들으려고 한 건 아닙니다. 어쨌든 오랜만에 뵈니 반갑군요.”
곽진도의 사질은 목적인 것 같았던 사과를 받고나서야 우리를 바라봤다.
“자네들이 장문인의 손님들이군. 난 해남의 장로 권동운(權冬雲)일세.”
“황금세가의 금목환입니다.”
“무림맹의 명재희입니다.”
“···갈유월입니다.”
권동운의 말에 우리가 모두 인사를 나눴다. 권동운의 시선이 먼저 꽂힌 곳은 고개를 푹 숙인 갈유월 쪽이었다.
“음, 그래. 갈 소저는 무림맹주의 제자라고 들었는데. 맞나?”
갈유월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대답했다.
“네.”
“그렇군.”
그 말에 한 걸음 떨어져 있던 양초원이 흠칫 떨었다. 아무리 정체를 몰라도 된다고 했지만, 무림맹주의 제자라는 정체는 뜻밖이었을 테니까.
권동운의 그 다음 시선은 내게로 향했다. 갈유월을 향해 보낸 시선보다 훨씬 흥미가 가득한 것 같았다.
“자네인가? 사숙의 제자가.”
“네, 맞습니다.”
“···아. 그렇군.”
권동운은 진짜 그럴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잠깐 크게 뜨더니, 짧게 말을 끝내고 입맛을 다셨다. 그도 내가 상계라서 명문 문파에 들어가는 게 거슬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숙. 그러니까 장문인 말대로 제자를 제 때 받았으면 이런 일도 없지 않습니까. 내 아들 뻘하고 같은 배분이라니.”
그러나 권동운은 나는 생각지도 못한 점으로 분개를 토했다.
나도 한 세가의 가주지만, 초면인 사람들한테는 존댓말을 하는 편이었다. 특히 연장자한테는 상황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물론 청진이 내게 화를 냈을 때는, 가주라는 상징을 지켜야 했기에 그렇게 받아친 것뿐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만, 화를 내는 권동운도 그렇고 난처해 보이는 곽진도의 반응도 그렇고 강호에서 배분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중요한 문제인 듯했다.
“전 배분은 상관없습니다. 해남파의 무공을 배웠으니 입적을 하는 것뿐이니까요.”
“···그 마음은 갸륵하다만, 배분은 그렇게 임의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닐세.”
권동운은 슬프다는 듯 말했다. 곽진도는 이 주제로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 싫은 듯 빨리 주제를 돌렸다.
“거 참. 사질. 오랜 별리(別離)에서 해후하여 나와 더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은 알겠지만, 우리는 장문인의 부름을 받고 온 몸이네. 그러니 나중에 얘기하게나.”
“애초에 외부에서 들인 제자를 반 년 이상 입적을 안 시키다니요. 제자의 입적(入籍)보다 사숙의 입적(入寂)이 빠를 것 같습니다.”
“이만 가보겠네. 나중에 얘기하게나. 나중에.”
권동운은 여전히 곽진도에게 불평할 말이 수백 개는 되는 것 같았지만, 곽진도의 황급한 탈출에 우리도 포권하고 안으로 향했다.
그 이후에도 해남파의 무인들은 모두 곽진도를 보고 존경스레 인사를 했지만, 권동운처럼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물론 인사를 해온 사람들은 대개 일대제자로 보이는 삼결들이었으니, 곽진도를 까마득한 선배로 여기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내원으로 계속 들어가던 우리는 누가 봐도 장문인의 거처로 보이는 전각 앞에 섰다.
“···후.”
곽진도가 전각을 바라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정이 있었다지만 내가 입적을 늦게 한 것도 곽진도의 책임으로 떠넘겨질 듯하고, 나를 입적 안 시킨 상황의 연장으로 해모환도 별 다른 이유 없이 가지고 나온 것 같았으니. 해남의 장문인과 곽진도가 어떤 관계인지는 정확히 모르나, 장문인이 어떤 성격인지는 대충 알 것만 같았다.
우리는 양초원을 앞세운 채로 전각에 들어간 다음, 푸른 물결이 그려져 있는 방문 앞에 섰다.
바로 느낌이 왔다. 남창에서 종리운을 처음 느꼈을 때와 비슷한 느낌. 초절정 고수가 있다는 느낌이 났다.
“삼대제자 양초원입니다. 장문인의 손님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양초원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곧 안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들여보내라.”
“네.”
양초원은 대답과 동시에 문을 열었다. 장문인실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무림맹주실과 마찬가지로 바로 장문인과 장문인의 책상이 마주한 구조였다. 다만 무림맹주는 책상 안에 다리를 집어넣고 있었고, 해남의 장문인은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장문인은 환갑 정도 되어 보였다. 우리가 들어간 다음 양초원이 문을 닫고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깬 건 곽진도였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장문인은 머리를 의자 뒤쪽으로 기대고 있었다. 흰 자가 꽤 많이 보이는 자세였다.
곽진도의 인사가 끝나자 우리도 따라서 인사해야 했다.
“황금세가의 금목환입니다.”
“무림맹의 명재희입니다.”
“···갈유월입니다.”
아까와 똑같은 순서의 소개가 이어졌다. 권동운과 다른 점은 장문인이 나부터 쳐다보았다는 거다. 아니, 사실 들어올 때부터 그는 곽진도도 안 보고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해남파의 장문인을 맡고 있는 적유엽이라고 한다. 반갑구나.”
적유엽은 자세만 불량할뿐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사실 자세가 본 모습으로 보였지만 우리에게 대하는 모습은 정파의 명예와 관련된 것 같기도 했다.
적유엽은 단도직입적으로 내게 물었다.
“자네가 진도의 제자가 맞나?”
“네, 맞습니다.”
권동운은 살짝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적유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세가의 가주라고 알고는 있지만, 내 사손이니 말은 편하게 해도 되겠지? 나이도 많이 차이나고 말이야.”
“그러시지요.”
난 그렇게 말하며 이 둘의 관계를 정립했다. 곽진도와 해남파 장문인, 적유엽은 사제 관계였던 것이다.
“···어째서 부르셨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이 제자가 꼴도 보기 싫을 테니 빨리 입적만 시키고 하산하겠습니다.”
곽진도는 적유엽의 눈을 피했다. 적유엽은 곽진도를 아예 무시하고 내게 말을 계속 건넸다.
“목환아.”
“···네. 장문인.”
“그래. 혹시 해남파의 절기 중 무엇을 배웠는고?”
“남해십이검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구나.”
적유엽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제야 곽진도를 바라보았다.
“제자야. 혹시 사손을 받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작년 곡우(穀雨)에서 입하(立夏) 사이일 겁니다.”
“하하. 올해 지금 청명(淸明)을 지나고 있거늘. 그래도 다행이구나. 일 년은 채 지나지 않았으니까.”
곽진도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적유엽은 미소를 계속 띠는 중이었다.
“외부에서 제자를 받으면 얼마 안에 본산으로 입적시켜야 하지?”
“여섯 달입니다.”
“불출 절기를 사사한 경우에는?”
“···세 달입니다.”
갑자기 이 방이 기막으로 감싸지는 게 느껴졌다. 적유엽의 몸에서 나오는 기파였다. 그와 동시에 서늘한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그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 내 앞에 낯짝을 들이미는 건 죽고 싶다는 얘기냐?”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네가 황금세가를 돕는 걸 말린 적은 없다. 다만 세가에 적을 두는 걸 말렸을 뿐. 해남 장문인의 제자가 상계에서 일손을 돕는다고? 다른 문파의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느냐?”
“···그건 제 선택입니다.”
그때 곽진도의 부근에서 두꺼운 기파가 느껴졌다. 적유엽은 지금 곽진도에게 지금 엄청난 압박을 주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목환아. 너를 입적시키지는 못할 것 같구나.”
적유엽의 말에 곽진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스승님. 그건···”
“왜냐하면 당장 네 스승, 곽진도를 지금 파문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적유엽의 말에 곽진도가 입술을 말아서 깨물었다.
“그러나!”
적유엽이 탁상을 손으로 쾅 내리쳤다.
“곽진도. 네가 다시 본산으로 돌아오면 목환이도 입적시켜주겠다. 내 알기로 당장 황금세가도 무림맹과 동맹을 맺어 안정된 상태로 알고 있다. 네가 돌아오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을 터.”
곽진도의 표정이 난처하게 변했다. 그래도 그는 반박하지는 않았다.
나를 입적시키는 기한을 놓친 게 문칙 내부에서는 중과실로 처리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반대로, 곽진도가 그만큼 날 배려해준 것이었다. 내게 그런 소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만약 그걸 알았으면, 어떻게 시간을 내서라도 해남파를 한 번 들렀을 거였다. 물론 그 동안 해결했던 일들이 좀 어려워졌겠지만 말이다.
“그건 곤란합니다. 장문인.”
그래서 나는 이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 스승님은 저희 세가의 수석 장로시기도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