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해남행(海南行)
65화 해남행(海南行)
“해남파를 간다고? 황금가주가?”
“네. 그렇습니다.”
종리운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비연각에서 갑자기 급서(急書)가 날아온 것이다. 정체는 목현학이 철취신응을 통해 보내온 서한이었다. 그것은 바로 금목환이 해남파로 향할 예정이라는 사실이었다.
비연각은 종리운에게서 금목환에 대한 정보를 우선순위로 가져다 달라고 했기에 바로 보낸 거다.
“···후. 어떻게 안 가게 할 방법은 없을까?”
“저도 생각해봤는데, 명분이 없더군요. 그 친구가 남해십이검을 쓰는 건 맞지 않습니까. 해남파에 입적은 해야죠. 입적 목적으로 가는 것 같던데요.”
“그딴 무공은 괜히 배워서!”
종리운이 분개를 했다. 제갈헌은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 말, 해남파 장문인이 들었으면 바로 생사결로 갈 수도 있었다. 전대 초고수와 현대 초고수의 대결이라. 재미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백수(白壽)를 넘은 적유엽은 전대 고수로 취급되기는 하지만, 광랑검(狂浪劍)이라는 위명은 강호에 명백하게 남아있었다. 워낙 싸우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다혈질이라 붙은 별호였다. 심지어 그는 이 별호를 마음에 들어 하기도 했다.
“···큼, 말실수를 했군. 광랑검 선배가 들으면 당장 남해십이검을 일수에 관통하는 묘기를 봤을 텐데 말이야.”
“맞습니다.”
종리운이 이렇게까지 경계하는 이유는 명백했다. 성격 까칠한 적유엽은 다른 구파일방과 친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구파일방 중 하나의 장문인이다.
금목환의 재능을 보면 분명 눈이 돌아갈 게 분명했다. 광랑검이 성격이 어떻게 되든 간에, 장문인으로서 재능 있는 후기지수를 보면 거두어들이고 싶은 게 정상이었다.
어떻게 금목환이 거기서 행동할지는 모르나, 만약 또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골치 아파졌다. 해남이 아무리 중원의 벽지에 위치해있다고 해도 말이라는 건 발이 없다.
“근데 황금가주도 자신의 재능은 대충 알고 있지 않나? 그렇게 막 보여줄까?”
“딱히 숨기는 기색은 없던데요. 목 장로에게 탈명표풍을 바로 보여준 걸 보면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랬지. 그래도 뭔가 불안하군.”
종리운은 바로 턱을 괴고 검지손가락을 혹사시켰다. 참, 검존을 이렇게까지 동요하게 만드는 후기지수라니. 제갈헌은 황당했다. 더 황당한 건 보좌로서 그게 납득이 간다는 것이다.
“그럼 일단 해남에 가는데 사람을 좀 붙이면 되겠군요. 그래도 무림맹 사람이 붙어있으면 둘 다 문제를 안 일으키고 조용히 해남을 빠져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그렇지. 황금가주가 거기서 해남파 본산으로 들어가는 건 당연히 아니니까.”
“그럼요. 황금가주한테는 구파일방이 현재 황금세가를 주시하고 있으니, 걱정된다는 식의 명분을 붙이면 될 겁니다.”
“그건 거짓말이잖나.”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렇게 될 거니까.”
종리운은 제갈헌의 말에 알쏭달쏭했다. 하긴 강호에서 이 정도의 거짓말과 암수는 귀여운 축에 속했다. 종리운도 제갈헌의 제안을 수락했다.
“누굴 보내지?”
종리운은 바로 다음 질문을 보냈다. 보내기로 했을 때 누구를 보내느냐. 금목환을 좀 잘 아는 사람,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 사람이 가야 했다. 물론 제갈헌은 이미 그 질문 전에 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번에 비연각에서 가주의 시종 역할을 했던 아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꽤 친한 듯합니다.”
종리운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긴 저번에 금목환과 전략을 논의할 때, 같이 오기는 했다. 그래도 금목환과 개인적인 친분까지는 알 길이 없었는데, 이번에 알게 된 거다.
종리운의 생각에 금목환과 개인적으로 친하면 그것만으로 인재였다.
“명재희, 였나? 그 친구가?”
“네. 맞습니다.”
“그럼 그 친구를··· 아.”
바로 승낙을 하려한 종리운의 입이 잠깐 닫혔다. 뭔가 생각하는 바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었다.
“혹시 유월이도 같이 보낼 수 있나?”
“유월이요?”
갑자기 나오는 갈유월에 제갈헌은 고개를 갸웃했다. 종리운이 바로 부가설명을 붙였다.
“저번에 유월이가 황금가주와의 비무에서 참패하지 않았나···아. 그런 이유로 유월이의 견식도 넓혀주고, 아무래도 너무 무림맹 안에 있으니까 애 성격이 이상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오, 뭐, 그런 거지.”
종리운은 말 중간에 계속 이상한 소리를 냈지만 제갈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요즘들어 가끔 어깨가 뻐근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거지만, 종리운이 너무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당연히 안 되죠. 장난하십니까?”
제갈헌은 바로 쏘아붙였다. 지낭의 할 일. 사리분별이 혼란해보일 때 직언을 하는 것이었다.
“유월이가 무림맹 안에서나 장로님들한테 예쁨 받고 살아서 그렇지, 성격이 개판입니다. 근데 그런 황금가주 같은 빈객한테 보낸다니요. 애가 매일 나이 많은 사람이 져주니까 진짜 이긴 줄 알고 기어올라요. 뭐, 다행히 또래인 황금가주가 그 콧대를 밟아 비벼서 요즘 조용해지긴 했죠. 그래도 천성은 개···”
제갈헌은 말을 멈췄다. 종리운의 탁상 옆에서 유령처럼 슬그머니 갈유월이 나온 것이다. 갈유월의 눈빛은 원한이 잔뜩 담긴 귀신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언제 얘는 또 숨어서 들어온 건지. 아까 무림맹주가 이상한 소리를 낸 것도 갈유월이 뭐 소매를 잡고 흔들거나 했던 모양이었다.
뒷얘기를 하다 걸리면 민망한 법. 그게 아이일 경우에는 더하다. 제갈헌은 눈을 감고 결국 죄책감에 굴복했다.
“같이 보내도 될 것 같습니다.”
*
광동 광주(廣東 廣州). 중원 바다 교역지의 중심으로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였다. 무림에는 태산북두인 소림의 하남이 정신적 중심이라면, 광동은 상계들의 중심지였다. 상가를 하려면 광동을 절대 빼먹을 수 없으니 말이다.
“자, 자. 오리껍질 구이입니다. 맛있습니다!”
“새끼 비둘기 구이입니다! 방금 구운 거니 빨리 드세요! 거기 아버지분! 너무 귀여운 남매군요. 그런 귀여운 아이들한테 비둘기 요리가 제격 아니겠습니까?”
어깨에 가판을 메고 비둘기 구이 요리를 파는 사람은 한 거한을 봤다. 허리춤에 검을 찬 것이 딱 봐도 무림인이었지만 상인은 개의치 않았다.
상인들도 어느 정도 경력이 생기면 괜찮은 무인인지, 아닌지 감이 온다. 저들은 무조건 명가에서 광동을 구경 온 아이들이었다.
한 명의 남자아이, 두 명의 여자아이였는데 셋의 차림은 깔끔한 비단이다. 칠 년이 된 상인의 눈으로 저건 분명히 고급 주단이었다. 명가들은 당연히 상인에게 패악질을 할 확률이 적었다.
“···먹을 테냐?”
거한이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생긴 것만 험상궂게 생겼지 아주 따뜻한 아버지가 아닌가.
상인은 실실 웃으며 다가갔다. 자신의 예상이 정확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버지나 딸 둘이나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는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상인에게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죄송한데 저희가 동전이 없어서요.”
상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세상에 아무리 부자라도 은자만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물론 안 살 때 민망해서 변명하는 사람이 많으니, 대수도 아니었다.
“아하, 그럼···”
“먹으면 안 돼? 맛있어 보이는데.”
등을 돌리려는 상인은 잠깐 멈췄다. 쾌활하게 생긴 여자아이였다. 자세히 지켜보니 이들의 얼굴은 다 귀엽고 예뻤지만, 가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닮지 않았다.
말을 안 하고 있는 여자아이는 눈이 매섭게 생겼고, 남자아이는 선이 고운 미남의 상이었다. 문파에서 내려왔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문파들은 각자 차림이나 특징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특히 명가이면 명가일수록.
“그럼 네 개만 주세요.”
남자아이는 바로 은자를 하나 꺼내서 팔을 뻗었다. 정말 시끄러운 시장바닥이었지만, 사람들이 돈 냄새는 귀신 같이 맡는지 시선이 집중됐다.
동네 가판에서 은자라. 은자 하나면 동전이 오백개의 가치였다. 고작해야 동전 세 닢밖에 안하는 비둘기 요리를 은자로 산다니, 자연히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상인은 입이 바싹 말랐다. 왠지 잘못 걸린 것 같았다. 혹시, 이 돈을 받으면 과유불급이라면서 손목을 자르는 건 아닌지. 무림인들 중에는 그런 미친놈들이 많다고 했다.
“안 주시나요?”
“···아, 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낙장불입. 일단 상인은 비둘기구이를 먼저 줬다. 아이는 비둘기 구이의 꼬치를 받고, 은자를 넘겼다.
정말 예상과 다르게 아주 쉽게 넘겨줬다. 정말 동전 세 닢을 주듯이 말이다. 상인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들은 바로 비둘기 꼬치를 들고 유유히 떠났다.
“거스름돈 안 받아도 돼?”
“응.”
비둘기구이를 먹고 싶다고 얘기했던 여자아이가 미안하다는 말투로 남자아이에게 말했지만, 남자아아이는 그냥 조용히 대답할 뿐이었다.
참 이상한 조합이었다. 저 산적 같은 거한은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어째서 일행의 중심이 남자아이처럼 보이는지.
순간 상인들이 갑자기 그 무리들 쪽으로 몰려들었다. 비둘기 꼬치 네 개에 은자 하나를 쓰는 사람이라. 정말 놓치면 안 되는 손님이었다.
그러나 거한이 앞길을 막으면서까지 몰려드는 상인들에게 갈(喝)! 하고 소리를 쳤고, 그 소리는 광동 가판 거리를 울려놨다. 심후한 내공을 가진 무인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상인들은 먼지처럼 흩어지고 그 무리들은 다시 유유히 갈 길을 떠났다. 상인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판을 정리했다.
오늘 아침에 새끼 돼지 구이, 소유저(燒乳猪)를 먹고 싶다고 울고불고 했던 아들이 생각났다. 동전 스무 냥이나 하는 비싼 음식이었기에 당연히 안 된다고 매몰차게 나왔지만, 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맛있네.”
“그러네.”
명재희의 말에 나는 대답해줬다.
지금 나는 곽진도, 명재희, 갈유월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곽진도도 얘기를 했지만, 편지에 붙인 이런저런 명분 때문에 붙인 게 아니라, 우리를 약간 지켜보고 싶다는 차원에서 붙인 아이들일 것이었다.
그러나 숨길 것도 없고 또 무림맹과 더 관계가 긴밀해지면 나도 좋을 일이니 수락했다.
그래도 명재희를 보낸 건 이해가 되지만, 갈유월을 보내는 심리는 도무지 이해를 못할 일이었다. 당장 황금세가에 와서부터 짧게 안녕, 한 마디가 전부인데다가 말도 안 하지 않은가.
지금도 슬쩍 바라보니 비둘기 구이만 집중해서 냠냠 먹고 있었다. 뭐, 어떤 생각을 가지든 크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여튼, 상인들은 은혜를 베풀면 호구처럼 본다니까.”
곽진도가 옆에서 투덜거렸다. 물론 나도 상인이다. 황금상단을 이끄는, 황금세가를 이끄는 가주니까. 그래도 곽진도의 말은 이해됐다.
우리는 그렇게 비둘기 꼬치를 먹으면서 해남으로 가는 배에 승선했다. 해남과 광주를 오가는 사람이 많다보니, 갑판이 꽤 넓은 배였다. 노를 젓는 사람들의 근육도 웬만한 무인들 못지않았다.
나한테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난 바다도 처음 보고, 배도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여기서 바다가 물결을 치는 걸 보면 깨달음에 도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우리가 시간에 맞춰서 왔는지, 배는 곧 출발했다. 나는 배가 가르는 물결을 굽어봤다.
“뭐 보는 거야?”
“바다.”
“여전하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까.”
명재희가 웃었다. 우리 뒤에 곽진도와 갈유월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갑판에는 우리를 제외하고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은 하늘이 맑았고, 바다도 험하지 않았으니 바닷길을 구경하기는 안성맞춤인 날씨인 것 같았다.
명재희도 날 따라서 배에 두 팔을 걸치고 바다를 바라봤다. 나도 뱃전을 가르는 물결에서 앞에 곧 부서질 바다를 보았다.
그렇게 난 고개를 점점 들어올렸다. 해가 지고 있어서 그런가, 바다고 온통 노을을 비추고 있었다. 오르내리는 파도가 예리하게 빛나고 부드럽게 잠겼다.
이런 바다가 육 초식, 수세광대를 의미하는 것일까. 곧 바다로 나오니 사방이 바다였다. 수연만범이 물에 덮인 그 상태를 이야기한다면, 수세광대는 그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로 이어나가는 걸 뜻하는 걸까.
바다는 더 퍼질 곳이 없어 보이면서도 어딘가를 더 채우고 있을 거다. 역시 묘리를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익히는 건 달랐다.
언젠가는 입적을 하기 위해서라도 해남파를 들를 거라고 생각했다. 좋은 경험이 되는 것 같았다.
기분 좋은 사색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큰 소리가 났다.
“어! 곽진도. 상계의 부하가 여기 웬일인가?”
“···목송(木松). 네놈은 무당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해남에는 왜 오느냐?”
얇은 목소리와 뒤에 괄괄한 곽진도의 목소리가 났다. 명재희는 그 소란에 뒤를 돌아보았다.
“나야 사손(師孫)을 데리고 중원을 돌아다니고 있지. 황금세가 총관 일은 잘하고 있나?”
“신경 끄게. 말코.”
“아, 혹시 그건 진짜인가? 황금세가의 자식 따위를 제자로 거뒀다는 이야기. 거짓말이겠지?”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제 내 시선은 수평선에 걸리고 있었다. 아무리 내력을 높이고, 눈을 좁혀도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경계가 모호했다. 그 모호함 사이에 남해십이검의 극의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뒤에서 계속 소리가 커지고 있었지만, 난 수평선을 노려보느라 바빴다.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