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또 사야죠
59화 또 사야죠
하오문주 이향(李響)은 초로(初老)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어깨가 드러나는 감색 능라주단(綾羅紬緞)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만큼 관리에 신경을 썼다. 언제나 가벼운 등산을 다니며 운동을 했고, 피부에 좋은 것들은 모두 바르고 다녔으며, 얼굴에 주름이 지게하지 않기 위해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강서지부장 요화라는 초짜가 오만 냥짜리 의뢰를 덥석 물고 온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이향도 번쩍 손을 들고 환영을 할 거대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오만 냥에 가까운 무공을 준비해야 했다는 것이 그녀를 예민하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 발상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무공을 돈으로 산다고? 그것도 절정 무공을? 누가 팔 건데? 얼마에 팔 건데?”
“···맞습니다.”
하오문주를 보좌하는 장삼(張三)은 땀을 뻘뻘 흘렸다. 이렇게 하오문주가 신경질적이면 장삼은 무조건 기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장삼도 이해할 수 있는 분노였다. 하오문이 오래 되기는 했지만, 절정무공을 돈으로 산다는 의뢰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정파 사람들에게 무공이라는 것은 하나의 얼, 하나의 정신이다. 그걸 돈을 주고 사고판다는 개념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무공은 무인들에게 목숨보다 귀한 것이니 말이다.
물론 돈으로 사려는 노력을 한 사람들도 역사에 없었던 건 아니다. 어중간한 무가들이 은자 몇 천 냥으로 무공을 사려고 했던 적이 있었고, 그 사실이 들통 나자 무공을 사려 했던 문파는 온갖 무인들에게 지탄을 받았었다. 정신과 얼을 전본분토(錢本糞土) 따위로 사려했으니 말이다.
구파일방을 포함한 대다수 정파의 인식이 이러니 사려는 사람이 없을 수밖에.
“내가 볼 때는 황금세가 가주가 그냥 애라서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세상 물정 모르는 상계 꼬맹이다운 발상이야. 무인들 자존심이 얼마나 센데?”
이향은 계속 투덜거렸다. 이미 하오문은 의뢰를 한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여강에서 그렇게 화려하게 남창으로 들어갔는데 모르면 바보였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이향은 오만 냥에 가까운 거금을 바로 황금전장에서 환전해버렸다. 그 오만 냥에 가까운 원보를 들고 오는데도 몇 백 명에 가까운 하오문도들이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암시장(暗市場)에 공고는 어제 걸어놨지?”
“네.”
세상에는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중원에는 합법적인 물건들만 돌아다니지 않는다. 보통 장물, 양귀비 씨앗, 가짜 원보 같은 불법적인 물건들이 사고 팔리는 곳이었다.
일단 이향은 암시장에 하오문이라는 이름을 숨기고 무공을 산다고 공고를 내놓기는 했다.
“내가 볼 때는 삼재검법을 이십사수매화검법으로 속여서 팔려는 사기꾼들만 득실할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니면 구결이 사라져서 의미 없어진 쓰레기 무공이라든가.”
이향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삼은 계속 눈치를 봤다. 사실 장삼은 이향에게 어제 걸어놓은 공고의 결과를 보고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향의 불만이 너무 많아 듣고 있었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허나 이제는 말할 때가 되었다.
“일곱 분 정도가 팔겠다고 연통을 보내왔습니다.”
“···뭐?”
이향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다시 시큰둥해졌다.
“사기꾼들 아니야? 신원은 알아봤어?”
“둘은 확실합니다. 무영자(無影子)와 약선입니다.”
“뭐어?”
이향의 목소리가 다섯 배는 더 커졌다. 무영자는 현존하는 신투라 불리는 최고의 도둑이었고, 약선은 삼선 중 하나로 말할 것도 없었다.
“···돈으로 이게 돼?”
이향이 멍하니 읊조렸다. 원래 도둑인 무영자는 그렇다 쳐도, 정파에서 가장 어른으로 모셔지는 삼선 중 하나인 약선이 왜 이런 음지에서 무공을 팔고 있다는 말인가.
그럼 왜 옛날에는 무공을 사려했던 문파들이 욕을 먹었어야 된다는 말인가.
그 답은 장삼이 해줬다.
“자존심을 챙기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나 보죠.”
“···아.”
이향은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탄성을 내뱉었다.
*
오늘은 뜻밖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오문 강서지부를 통해서 하오문주가 내방한다는 소식이 들어온 거다.
지금 당장은 아이들을 위해 할 게 없었다. 영약을 먹었다고 바로 치유되는 게 아니다. 안정을 취하면서 영약의 기운을 몸속에 돌리는 게 진정한 치료다. 안정을 취하는 애들한테 딱히 조치할 건 없었다. 그저 외부를 진법으로 잘 감싸주는 것밖에는.
금월상과 곽진도에게도 무공서를 가져온다고 얘기를 해놓았다. 그들은 갑자기 웬 뜬금없이 무공서냐며 놀랐지만, 내가 하니까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었다.
난 객잔이라고 숨겨진 하오문 강서지부로 갔다. 처음 방문했을 때 그 차림 그대로. 검은 죽립에 검은 옷이었다.
예의 앉았던 자리는 비어있어서 그곳으로 자리했다. 하지만 자리에 앉기도 전에 점소이가 다가왔다.
“바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아, 네.”
난 의자를 빼려다가 다시 뒤를 돌았다. 계단에는 거한도 없었다. 문주가 온다고 해서 치운 모양이었다.
계단을 통해 예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강서 지부장 요화 대신 감색 능라주단을 입은 중년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하오문주였다.
그녀는 일어나서 치마 밑단을 두 손으로 잡고 허리를 숙였다.
“하오문주 이향입니다. 황금세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네. 금목환입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
난 하오문주의 얼굴을 유심히 봤다. 표정이 자연스러워 인피면구는 아닌 것 같았다.
“신뢰의 상징이랄까요. 물론 별 거 없는 사람을 만날 때는 면사를 쓰지만, 거물을 만나면 면사를 벗고 있죠.”
“거물이요?”
“제 감이랍니다. 과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같은 하오문도를 제외하고 무림에서 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열 사람이 채 안 된답니다.”
“영광이군요.”
내 말에 이향이 웃었다. 당연하겠지만 하오문도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 딱히 알려져도 상관없는 일이었으니. 어차피 알고 있는 마당에 검은 죽립을 벗었다.
이향이 살짝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크게 떴다.
“미려하신 분이군요. 그림으로 봤을 때도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그건 천분지 일도 못 담고 있었네요.”
“하오문주시라 마음에 없는 말을 잘하시는군요.”
“아니에요. 이건 진심이에요. 전 여자분들이 드나드는 기루도 운영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주님만큼 미려한 분은 못 봤답니다. 제 눈은 정확해요. 특히 이런 쪽에서는.”
보는 사람마다 잘생기다고 칭찬했지만, 난 그게 크게 와닿지 않았다. 난 바로 주제를 돌렸다.
“일단 가져오셨다는 무공을 좀 볼까요.”
“칭찬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이군요.”
이향은 웃으며 바닥에 있는 비단 포대기를 책상 위로 올렸다. 마치 시내로 올라가는 유생의 책보와 같은 모양이었다. 저 포대기 하나에 다섯 권은 있을 터였다.
“무슨···”
이게 무슨 무공이냐고 물어볼 찰나였다. 또 다른 비단포대기 하나가 올라왔다. 또 하나, 또 하나. 그렇게 넓은 책상에 여섯 포대기가 올라왔다.
이향도 어느 정도 무공은 배웠는지 그 무거운 책보 여섯 개를 책상에 올리면서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자, 이것들이 저희가 구한 무공비급들이예요. 나름 양심 있게 일 할만 남겨먹었어요. 사만 오천 냥으로 산 무공비급들인 거죠.”
“···그렇군요.”
내 대답이 살짝 늦었다. 이렇게 많은 무공들이 모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향도 내 속내를 알아챘는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가난한 고수들이 많더라고요. 가문이 망했는데 무공만 남은 경우도 있고요. 여하튼 생각보다 중원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었어요. 저도 이번에 하나 깨우쳤습니다. 돈으로 무공을 못 샀을 때는, 돈이 부족한 게 아닌지 생각해보자고요.”
나는 이향의 농담을 들어가며 포대기를 하나씩 풀어봤다. 정말 별의 별 무공이 다 있었다. 검법, 심법은 물론이고 도법, 부법(斧法), 편법(鞭法), 봉법, 권법, 장법, 각법, 암기술까지 다양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무공을 사고팔았던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렇게 대대적으로 무공을 사들인 사람은 가주님이 처음일 거예요.”
난 그 중 몇 권을 꺼내어 한 번씩 슥 훑어봤다. 남해십이검을 익힌 나에겐 잡기같은 기술들이라 딱히 읽어도 의미는 없었다. 그렇게 책을 보던 와중, 나는 낡은 죽간을 펼쳐보고 멈칫했다.
이건 좀 특이했다. 천혜침술(天惠鍼術). 이향은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건 삼선 중 하나인 약선께 받은 비급이랍니다. 본디 의료용 침법이지만, 잘 이용하면 판관필의 무공 비급도 될 수 있다고 하셨죠. 그건 만 냥에 산거예요. 제일 비쌌죠.”
약선의 무공이라. 삼선은 아무한테나 붙여지는 이름이 아니다. 칠존보다 배분으로든, 무공으로든 위급이라 인정받는 사람들이다.
“약선께서 기행이 남다르긴 하지만, 본인이 만든 침술을 이렇게 팔지 몰랐어요. 당장 새로운 약을 만들려면 돈이 많이 필요해서 파신 거라고 하더군요. 그건 성능은 확실해요.”
나는 천혜침술을 살펴봤다. 역시 침술서답게 사람의 모양과 혈자리가 나와 있었다. 침술이지만 무공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 찌르는 것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담겨 있었다.
신기하게도 침법의 순서를 역순으로 돌리면 무시무시하게 위협적인 살초가 되었다.
이건 나도 좀 배워볼만한 가치가 있었다. 판관필을 쓰는 무공이든, 단창(短槍)술이든, 아니면 검법의 찌르기에 응용을 하든 말이다.
나는 그렇게 모든 무공비급을 살폈다. 스르륵 넘기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이향이 물었다.
“그렇게 보면 대체 뭘 알 수 있는 거죠?”
“그냥 보는 겁니다.”
“···흠.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이향은 의심의 눈초리로 날 바라봤다. 난 그러거나 말거나 비급을 전부 확인했다.
다행히 명가의 무공은 하나도 없었다. 그건 있어봤자 쓰지도 못하니까 말이다. 물론 내가 개조를 해서 쓸 수는 있겠지만, 무공이 가진 향취 자체를 없애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나만 해도 이궁천뢰검법을 보며 남해십이검을 떠올리지 않았는가.
“좋은 거래군요. 밖에 수레 하나만 준비해주시겠습니까?”
나는 책을 다시 포대기에 덮고는 이향을 바라봤다. 무게는 상관없었지만, 당장 이렇게 수많은 책들을 들고 갈 손이 부족했다. 이향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럼요. 이미 다 준비해놨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같이 방을 나섰다.
이향은 하오문도들을 불러 책들을 수레에 옮기라는 지시를 했다. 나도 다시 죽립을 썼다.
“오길 잘했네요.”
수레를 밀려고 할 때 즈음 문득 이향이 말했다.
“왜요?”
“오만 냥보다 대단한 귀인을 만난 것 같거든요.”
“그런가요.”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지금 내 모습은 수레를 끌고 다니는 장사꾼처럼 보일 터였다. 이 수레의 값어치를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장담컨대 아무도 없었다.
난 곧 세가로 돌아와서 옥묘각으로 향했다. 커다란 수레를 밀고 가는 내 모습을 시종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건 옥묘각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또 무슨 짓이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일단 곽진도와 금월상을 상주시켜놨기 때문이다. 금월상도 곽진도도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수레를 보았다. 나는 덮여 있는 포대기를 걷었다.
“···진짜 무공서군. 어디 무림맹 서고라도 털어온 게냐?”
이미 곽진도와 금월상에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 둘은 그래도 놀란 눈빛이었다. 난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샀습니다.”
“돈으로 무공서가 사지더냐?”
“그렇더군요.”
“대체 얼마를 썼기에···”
곽진도는 멍하니 무공서들을 바라보다가 꿈에서 깨어난 듯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근데 이렇게 많은 무공을 다 가르친다는 말이냐? 과유불급이다. 차라리 하나의 무공을 대성시키는 게 낫다.”
“이것들은 하나의 무공이 될 겁니다.”
내 말에 곽진도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내가 무공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때 가만히 있던 금월상이 질문했다.
“그럼 그걸 네가 다 하나하나 가르치는 거냐?”
“아뇨. 가주인데 어떻게 훈련까지 맡겠습니까.”
나는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가르칠 사람들도 돈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서북쪽을 바라봤다. 무한. 무림맹이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