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돈은 얼마나 있으세요?
56화 돈은 얼마나 있으세요?
가진 힘만큼 책임이 생긴다고 했던가.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대전 회의실은 외원 원주들과 곽진도가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내가 있고, 좌우로 내 형제들이 있었다.
“정말 아기 때 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가주 자리에 앉아계시다니. 참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렇게 가주님께 보고 회의를 드리던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군요.”
“언제였는지 뭘 몰라? 십 년 전이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 사람아.”
나는 한 마디도 못한 채로 외원 원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건 좌우에 앉은 내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아가씨는 정말 아름다워지셨군요. 이 정도면 강서제일미(江西第一美)라 칭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아, 하하. 네, 감사합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알아봤지. 정말 가모(家母)님하고 똑 닮지 않았나?”
“그렇지. 그렇지.”
“가모님하고 닮은 건 막내공자님도 그렇지. 남자인데 뭐 저렇게 예쁘장하게 생겼는지.”
“막내공자라니, 이제 가주님이라 불러야지.”
“맞다, 맞다.”
이해는 됐다. 십 년 동안 가주가 공석이었으니 가주한테 현황 보고를 해야 했고, 그 바람에 잘 모일 일이 없던 외원 원주들이 한 데 모인 것이다.
그래도 이 외원 원주들은 황금세가의 충신들이었다. 곽진도의 부름에 날 도와줬던 사람들이니까.
무력도 없고, 외원 사람들이니 내원에 간섭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중에 곽진도에게 들어보니, 그들은 나름 열심히 가문을 지키고 있었다.
세가가 먹힌 이후로 새로운 사람을 모으지 않아, 간자가 들어올 틈을 아예 막아버린 거다. 당장 실무적으로 일을 해야 할 곳에 간자를 넣기도 어려웠겠지.
그들은 그렇게 자리를 꿋꿋이 지킨 것만으로 제 몫을 다 한 것이다.
“자, 자. 이제 회의들 합시다. 각자 할 일 바쁜 사람들이.”
같이 떠들고 있던 곽진도는 시간이 되자 큰 소리로 사람들을 주도했다. 순간 외원 원주들이 착석하고 대전이 엄숙해졌다.
이들은 그냥 수더분하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당장 일신의 무력이 부족할 뿐, 상계 쪽에서는 중원 최고의 경력자들이었으니까.
황금세가는 상계에서 구파일방과 다름 없는 위치였다. 아니, 구파일방보다 더하다. 우리에겐 경쟁자 따위는 없었으니 말이다.
“황금전장 전장주 전광영입니다. 현황 보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전장주를 시작으로 현황 보고가 시작됐다. 물론 이미 나는 서책으로 각 조직들의 현황을 보고 받았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대충 파악했다.
이 회의의 진정한 목적은 이 일들을 맡아서 할 우리 형제들에게 현 상황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서책을 필사해서 줄 수도 있겠지만, 직접 얘기로 듣는 게 훨씬 이해가 쉬울 테니까 말이다.
“황금전장의 이율은 어떤 식으로 매년 변동하는 겁니까?”
“진법에는 얼마나 예산이 써지고 있죠?”
“표국의 표사들을 내원으로 돌릴 순 없습니까?”
다행히 형제들은 각자 맡은 영역에 관심을 보이며 질문을 해나갔다. 각 조직의 장들은 그것에 대하여 명쾌히 대답했다.
그렇게 현황보고가 두 시진에 걸쳐서 끝났다. 그때 금월상의 옆에 앉아있던 곽진도가 입을 열었다.
“우리 가주님은 딱히 의견이 없으신가?”
그 말에 모든 조직의 장들이 내게 눈이 쏠렸다. 난 두 시진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보고 중 할 얘기는 딱히 없었다. 최고의 실무진들이니 만큼, 현황 보고 역시 깔끔했다.
내가 할 얘기는 현황 보고가 끝나고 난 뒤에 해야 했다.
“먼저 외원의 원주님들께 지금까지 세가를 잘 지켜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일단 내가 할 말은 그것이었다. 가주를 대표해서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
“···허, 허허.”
“저희가 어찌 감사 인사를 받겠습니까.”
외원의 원주들은 민망해하는 듯했다. 그들의 부채의식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우리가 힘들었을 때 도와주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그건 힘이 없으니 도와주지 못한 거지, 안 도와준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힘이 없는 상계의 문제였지. 난 다음 말을 하기 전에 곽진도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소집한 건 단순히 현황보고 때문이 아니었다.
“일단 제가 대표로 가주직을 맡았지만, 전 저희 형제들과 함께 세가를 이끌어나갈 생각입니다. 외원 원주님들도 이해하시겠지만, 우리 세가가 외부적으로 꽤 신경 쓸 게 많아질 거거든요.”
“그렇지.”
곽진도가 동의했다. 그 말에 회의장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들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당장 내부의 적들을 몰아냈지만 이게 전부가 아님을. 강호와 연관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연관될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일단 제 형제들에게 가주 업무 위임 대리장을 전부 써주려고 합니다. 괜찮으십니까?”
이런 사항도 장로들의 회의를 거쳐야 되는 것.
“물론이죠. 가주님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외원 원주 중 한 명이 답했다. 난 미소를 지었다. 옛날 장로 회의에 참석했을 때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그때는 모두 나를 견제했지만 지금은 나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외총관님은 수석 장로로 자리를 옮기셔야겠습니다.”
“뭐?”
내 말에 곽진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곽진도와는 상의하지 않은 얘기였기 때문이다.
수석 장로의 자리는 장로들의 위급. 세가에서 가주를 제외한 모두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였다.
“···그건 좀 부담스러운데?”
“제 부탁입니다.”
이 세가는 이제 사람도 바뀌고, 직책도 바뀌고, 많은 게 바뀔 터였다. 자연스럽게 돌아가게끔 말이다.
“그리고 외원 모든 조직에게 이십만 냥씩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가주가 없어서 통과되지 못한 사안들이나, 사업 확장 같은 걸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금선원주를 제외한 모든 원주들의 눈이 커졌다. 황금전장의 전장주, 전광영이 발언했다.
“그 무슨··· 이만 냥을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이십만 냥은 세상에서 제일 많은 돈을 굴리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인 전광영도 낯선 금액인 듯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평민들 일 년 생활비가 은자 두 냥이고, 특급 표행을 가는 절정 수위의 표두들이 은자 오십 냥을 받는다.
황금세가의 각 조직의 일 년 예산이 평균 만 냥에서 제일 많아야 삼만 냥인데, 이십만 냥을 준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하겠지.
허나 이건 지금까지 가내에 축적되어온 돈들에 합쳐, 지난 십 년간 이들의 활동에서 축적된 이익이 포함된 것이었다. 그것이 오백만 냥이나 쌓였을 줄은 몰랐던 거다.
그리고 외원의 원급 조직들은 금선원, 황금표국, 황금전장, 황금상단 이 다섯 개가 전부였다. 이렇게 돈을 써도 고작해야 백만 냥이라는 거다.
“이십만 냥 맞습니다. 무리한 금액 아닙니다. 십 년 동안 중원 상로를 점거하고 돈을 안 쓰고 있었으니 이 정도는 써줘야죠. 그래야 중원에 돈이 좀 돌지 않겠습니까.”
“···허허.”
내 말에 사람들이 헛웃음을 지었다. 난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 세가가 좀 적극적으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힘도 기를 것이고요.”
“···쉽지 않겠군요.”
금선원주가 우려를 드러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힘은 황금세가에 지금껏 없었던 거니 말이다.
“정파의 위선을 초대 가주님께서 너무 믿으신 게지. 처음 황금세가를 일구셨을 때, 구파일방에게서 무조건적인 보호를 약속 받고 무인을 양성하지 않은 거 아닌가.”
“됐네. 옛날 얘기를 해서 무엇 하겠는가.”
외원 원주들이 성토를 했다. 난 처음 듣는 얘기였다. 더 물어보니 그들도 딱 그 정도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초대 가주라면 내 증조할아버지였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말대로라면 정말 멍청한 사람이었다.
“바보 같네요.”
“하하. 뭐, 저희도 이해는 안 됩니다.”
금선원주도 너털웃음을 지었다.
초대 가주라. 황금세가에 있는 자잘한 규칙들을 만든 건 사실상 초대 가주, 내 증조할아버지였다.
그렇다면 증조할아버지가 악의 근원이었다는 걸까.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다른 문파에 의존했다면, 이제부터는 안 그러면 될 일이었으니까.
“이만 회의 마치도록 하죠.”
또 사람들이 날 둘러싸고 잡담을 하기 전에, 난 책상을 짚고 먼저 일어났다.
*
그 이후로도 난 정말 세가에 돈을 쏟아 부었다. 이렇게 쏟아 부어도 도저히 돈은 마를 생각을 안 했다.
호위 무사들의 봉급을 두 배로 올려줘 봤자 고작 은자 두 냥을 더 주면 된다. 세가 내부에 있는 나무의 가지치기를 전부 맡겨봤자 은자 오십냥이다. 황금세가를 두른 벽들의 도색을 전부 새로 하려면 은자 백 냥이면 됐다.
그러니까 내가 돈을 아무리 써도 줄어들지가 않는 거다. 물론 외부적으로는 많이 바뀐 것처럼 보일 터다.
“요즘 황금세가가 장난 아니게 바뀌고 있다던데.”
“무슨 눈을 감았다 뜨면 조각상이 늘어나있던데. 표행에 참가하는 표사들한테 주는 돈도 두 배가 늘었다나봐.”
“그 정도면 사치 아니야? 저렇게 물 쓰듯이 쓰다가 망하는 건 아닌가 몰라.”
검은 죽립을 쓴 금월상이 그 말에 차를 뿜었다. 다행히 뿜기 전에 얼굴을 돌려서 마주 앉아있는 내게 묻지는 않았다.
“컥, 컥.”
“괜찮으세요?”
“···어, 그래. 괜찮다.”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차를 뿜어버린 거다. 형제들은 지금 내가 가진 돈이 얼마인지 다 들었으니까.
지금 금월상과 나는 검은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남창의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가문에 있는 차보다는 훨씬 떨어지는 질의 차였다.
“이 정도면 물을 마시는 게 낫겠군요.”
“그렇구나. 그래도 바깥 구경을 한다는 게 의의가 있는 게지.”
금월상은 창밖을 바라봤다. 당장 남창에서는 황금세가가 급변하고 있다는 이야기만 들릴 정도였다. 남창 사람들은 당연히 좋아했다. 우리가 이렇게 돈을 쓰면 남창에 결국 돈이 돈다는 뜻이니까.
전에 남창의 거리를 봤을 때보다도 좀 활발해진 감도 있는 듯했다. 건물 증축부터 진법가들, 건축가 등 여러 사람들이 오가니 말이다.
“남창 같은 큰 곳이 우리 세가가 어떻게 움직이냐에 따라 이리 좌지우지 되는구나.”
금월상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영향력을 너무 모르고 자란 셈이다. 휘두를 기회가 없었으니 말이다.
“남창 정도면 중원에 비하면 작은 곳이죠.”
그 말에 금월상은 질렸다는 듯이 웃었다. 우리는 중원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구파일방이 견제했을 거지만 말이다.
난 맛없는 차를 내려놨다. 더 마시다간 내 혀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어차피 여기 차를 마시러 온 것도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언제쯤 온답니까?”
“이 각 정도 기다리면 오니, 곧 오겠구나. 박 노야 말로는 그랬어. 나도 직접 온 건 처음이란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배짱이 좋군요.”
금월상이 옛날에 썼다는 정보 조직. 난 그곳과 만나러 온 것이었다. 역시 이것도 돈 쓰는 일 중의 일환이었다.
대충 어디인지 예상은 됐다. 이런 객잔을 통해 접선을 한다는 거나, 당시 금월상 같은 사람들한테도 정보를 팔아준다거나. 이런 곳은 내가 알기로는 한 군데밖에 없었다.
금월상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객잔의 점소이가 슬쩍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삼 층으로 가셔서 동철이 소개로 왔다고 하시면 됩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일어나서 삼 층으로 향했다. 삼 층으로 가는 계단에 오를 때, 웬 거한이 길을 막고 앉아있었다. 아마 실수로 들어오는 걸 막는 차원인 것 같았다. 그 험악하게 생긴 사람은 동철이 소개라니까 조용히 들여보내줬다.
삼 층의 문을 여니 어깨가 드러나는 기녀 복장을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책상 맞은편, 차 두 잔이 이미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여자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냈다. 나와 금월상은 자리에 앉았다. 난 앉자마자 물었다.
“여기가 하오문 강서 지부입니까?”
“그것도 모르고 오셨나요? 네, 맞아요.”
여자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우리는 실내였지만 계속 죽립을 쓰고 있었다. 여자는 그것 가지고 뭐라 하지는 않았다. 여기는 신원을 숨기고 오는 사람이 워낙 많을 터이니.
“그래. 목소리를 들어보니 꼬마 도련님 같은데. 뭐가 필요하죠?”
여자가 물었다. 난 즉각 대답했다.
“절맥에 걸린 아이들의 정보가 필요합니다.”
“어머,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조금 더 정확하고 상세하게 말씀해주셔야지. 전 중원의 절맥을 알려달라는 것 같잖아요. 그러면 어마어마하게 가격이 책정된답니다. 돈은 얼마나 있으세요?”
여자는 호호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날 귀여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가지고 온 주머니를 끌러서 상 위에 놓은 다음 주둥이를 열었다. 그 안을 본 여자는 웃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전 중원에 있는 아이들.”
“···어, 음, 어···”
주머니 안을 본 여자의 언어 능력이 갑자기 퇴화된 것 같았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지, 지부장님 모셔올게요!”
아까와는 다른 공손하고 다급한 말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