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직인은 제가 찍겠습니다
53화 직인은 제가 찍겠습니다
아버지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갑자기 아버지가 땅바닥에 피를 울컥 토했다. 피는 거뭇한데다가 엉겨있었다. 난 놀라지 않았다. 지금 아버지의 몸 상태를 제일 잘 아는 건 나였다.
내가 아무리 심독신공을 몰아냈다고 해도, 장장 십 년 동안 시달렸던 몸이다. 후유증이 없을 수가 없었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꽤 시간이 걸릴 터였다. 정상으로 돌아와도 예전 같지는 않을 거였고.
“피랑 뭉쳐있던 독이 빠져나오고 있군요. 지금 아버지는 여기 안가든, 세가 내부에서든 숨어서 최소 일 년은 정양해야합니다. 독을 몰아낸 거지, 그동안 약해진 기와 몸은 회복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구나.”
아버지는 소매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래도 어떻게 지금까지 고생한 자식들에게 짐을 다시 떠맡기겠느냐. 아버지로서 도리가 아니다.”
사실 본인의 몸 상태는 본인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고집을 부렸다. 난 이해했다. 그는 당장 나 혼자 있는데도 몸 둘 바를 몰라 할 정도로 미안해하고 있다.
내 형제들 앞에서는 어떻게 되겠는가. 허나 형제들은 나처럼 부드럽게 말해주지 않을 것이었다.
형제들에 관한 건 말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아버지가 세가로 돌아오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았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아버지의 얼굴은 슬슬 파리해졌다. 그의 몸상태에 비해 많은 얘기를 한 것이다.
“지금 아버지는 가문을 이끄실 상태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중원으로 나가서 만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정세가 어떻게 튈지 모릅니다.”
나는 다시 말했다. 아버지는 퍼런 입술만 떨었다. 내 말이 정답인 걸 알고 있지만, 차마 인정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간신히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목환아. 어째서 막내인 네가 온 것이냐? 월상이나 화청이는, 수린이는?”
“형님, 누님들은 세가에 있습니다. 지금 세가 업무는 형제들이 맡아서 하고, 외부의 일을 제가 하고 있습니다.”
“반대가 되어야하지 않더냐? 중요한 바깥일을 월상이가 하고, 막내인 네가 세가에 있어야지. 당장 열둘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열둘이면 소학(小學)은 다 뗀 게냐?”
살짝 웃음이 났다. 소학이라. 소학은 전생에서도 일곱 살 전에 떼었다.
“역경(易經)까지 다 배웠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역경? 네 나이에?”
“누님, 형님들도 제가 외부의 일을 도맡아서 하는 것에 어떤 말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아버지의 눈이 내 입으로 쏠렸다. 답이 어지간히 궁금한 듯했다.
“제가 천재니까요.”
내 말에 아버지는 입을 닫았다. 아버지가 내 과거를 모른다면, 지금부터 알려주면 되는 거다. 알아도 필요 없는 헌 과거들을 버린 채로 말이다.
“···당돌하구나. 자기 입으로 천재라니. 근데 네가 지금까지 말했던 행적들이 천재가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기는 하구나. 무림맹주랑 독대하고 전략을 짜는 열둘이 어디 있겠느냐.”
아버지가 쿨럭 기침을 했다. 기침은 폐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는 듯 끓는 소리가 컸다. 손바닥으로 가렸지만 역시 피가 묻어나왔다.
손바닥에 묻은 피를 털어낸 아버지는 잠깐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이 느리게 떠다니고 있었다.
“금인은 등령당 네 어미 묘지 안에 있단다.”
아버지가 말했다. 나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아직도 미안함이 있는 것일까.
“네 말대로, 난 여기 있는 게 맞는 것 같구나. 차라리 내가 깨어났다는 걸 숨기려무나. 네가 믿는 사람한테만 말해라.”
“그럴 겁니다.”
아버지는 내 대답에 웃었다.
“정말 똑똑하구나.”
“근데 여기 음식이나 물은 있습니까?”
“내가 깨어날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놓은 음식도 있을 거다.”
그렇다면 걱정할 건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여기서 언제 나올 줄 몰랐다. 이런 진법 안에서 바깥으로 나오는 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나올 수도 없다라. 그건 우리가 지금까지 겪었던 연금과 많이 닮아있었다. 그건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난 그걸 알기에 물어봤다.
“여기서 혼자 지내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믿고 있단다. 본인을 천재라고 말하는 아들을 말이야.”
아버지는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내게 처음 건넨 농담이었다. 민망함과 미안함을 가려주는 수단이었다.
“언제든 중원이 안정되면 나를 구해주러 오려무나. 여기서 가련히 기다릴 테니. 아비가 끝까지 무능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나는 일어났다. 아버지도 일어났다. 내가 말리려 했지만, 그것까지는 말려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기어코 현판 앞까지 나왔다. 마치 강호 초출을 보내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목환아.”
“네.”
“무림맹주랑 외총관에게 안부 전해주거라.”
그 말에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외총관님은 그렇다 쳐도, 무림맹주는 제가 아직 잘 모르는데요.”
“맹주 역시 신의를 아는 사람이다. 숭산의 맹약을 기억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무인이기도 하고.”
“숭산의 맹약이요?”
“케케묵은 이야기란다. 내 할아버지 때 이야기고, 이제는 아무도 모를 테니까.”
아버지는 그리 말하며 씁쓸한 표정을 했다. 숭산의 맹약이라. 중요해보이지는 않지만 기억은 해두고 있어야겠지.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
나는 아버지에게 간단하게 목례를 했다. 호흡이 가빠진 아버지는 현판 옆 기둥을 잡고 호흡을 몰아 내쉬고 있었다.
“빨리 들어가서 쉬시죠.”
“가주가 된다고 했지. 그럼 내가 여기서 몇 가지 물어도 되겠느냐?”
“그럼요.”
난 뒤를 돌려는 발을 다시 꺾었다. 아버지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나지막히 말했다.
아버지의 질문은 생각보다 많았다.
자신보다 강자 앞에서 약자의 편을 들 수 있겠느냐?
의와 협이 무너지는 곳에서 비통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
해묵은 원한을 해결했을 때 공허하지 않을 자신이 있겠느냐?
믿고 있는 사람이 거짓 음해로 흔들릴 때 더 큰 믿음을 줘서 안심시킬 수 있겠느냐?
눈앞에 있는 사람을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로 판단할 수 있겠느냐?
절망은 희망 앞에 무력하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느냐?
···
아버지는 그걸 다 말하고 한참 지친 기색이었다. 나는 그 질문들을 다시 한 번 곱씹어봤다.
- 그게 정파의 할 일이니까.
문득 맹주의 답이 머릿속에 떠돌았다.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정파의 할 일이라.
난 심사숙고한 뒤에 아버지에게 답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아버지는 내 대답을 듣고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하구나.”
“이제는 진짜 가봐야겠군요.”
“그래, 잘 가거라.”
나는 현판 없는 아버지의 거처를 빠져나와 무후궁으로 다시 올라갔다. 이제 진법으로 나아가면 아버지는 앞으로 한참은 다시 못 볼 터였다. 마지막으로 뒤를 돌았다. 역시 아버지는 기둥 뒤에 매달린 채 내 발걸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멀리서 아버지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난 허리를 숙여 그 인사에 대답을 하고, 다시 진법 속으로 들어갔다.
*
한 사람의 변화가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융중산(隆中山)의 은인(隱人)이던 제갈량이 한나라의 승상이 되어 출사표를 냈던 것처럼, 초나라 장왕이 삼 년간의 방황을 마치고 춘추오패(春秋五覇)로 올라설 때처럼 말이다.
곽진도는 그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금목환이라는 사람이 한 명 바뀌고 나서, 대체 얼마나 바뀐 것인가.
무력해보였던 황금세가의 직계들도, 세가의 상황도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는 중원의 상황까지 바꾸려 하고 있었다.
“이걸 나보고 믿으라는 말이오?”
“믿지 못하면 어떻게 하시겠소.”
지금은 형산. 형산파의 장문인 남악검군 옹진수와 무림맹주 검존 종리운이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애초에 산지도, 죽은지도 모르는 내 아들을 음해하는 이유가 뭐요?”
종리운은 옹진수의 말에 바로 옆에 있는 가죽주머니를 이끌러 책상 앞에 내놨다. 옹진수는 그것을 열어봤다. 그곳에는 옹소후의 머리가 있었다.
“죽은 건 확인했소?”
종리운의 담담한 말에 옹진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디서 발견한 거요.”
“황금세가 주변에서 발견됐더군. 주산파와 세가의 싸움에 휘말린 듯 하오.”
옹진수는 옹소후의 머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없어도 괜찮을 무능한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보니 울컥했다. 옹진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들을 잃은 것도 원통한데, 명예까지 없애려고 하는 거요? 정파에서 명예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시오?”
“아니까 이러고 있는 거 아니오. 장문인의 아들이 정파의 명예를 깎았잖소.”
쾅!
옹진수의 수도가 책상을 부셔버렸다. 종리운을 바라보는 옹진수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러니까 증거도 없이 어찌 그런 말을 하냐는 거요!”
옹진수의 살벌한 기운이 형산파의 전각을 채웠다. 종리운은 물론이고 옆에 앉아있는 곽진도 역시 초절정의 고수. 다만 곽진도 옆에 따라서 앉은 전 형산파의 삼대제자들은 꽤 힘든 듯 땀을 흘렸다.
“여기 증언들이 있지 않소. 전 삼대제자들이 옹소후가 얼마나 비겁하고 사파 같은 인물인지 다 말해줬잖소?”
“대체 우리 제자들을 어떻게 꼬셔먹었는지 모르겠군. 비겁자는 저기 앉아 있는 변절자 다섯 놈이오! 씹어먹을 자식들!”
옹진수가 벌떡 일어나 전 삼대제자들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때 종리운이 크게 소리를 냈다.
“지금!”
벽력같은 육합전성(六合傳聲)이 전각을 울렸다. 가만히 있던 종리운이 기를 끌어올렸다.
“본 맹이 거짓을 말한다는 거요?”
“한 쪽의 이야기만 듣고 판단하지 말라는 거요!”
옹진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전히 의자에 앉아있던 종리운은 고개를 들어서 옹진수를 바라봤다.
“앉으시오.”
“···하, 지금 이 꼬라지를 만들어 놓고···”
“나랑 검을 나누기 싫으면 앉으시오.”
종리운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 말은 엄청난 위압감을 담고 있었다. 남악검군 역시 뛰어난 무인이지만, 전성기는 지났고 지금 종리운은 검존이었다.
그 말에는 곽진도도, 뒤에서 배석하고 있던 형산파의 장로들도 서늘할 수밖에 없었다.
옹진수는 입술을 물었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무림맹은 대놓고 형산파를 겁박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형산파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증거는 없다지만 실제 제자였던 무인들의 증언도 영향력이 있고, 무엇보다 무림맹의 의지가 확연했다.
지금 같이 불건전한 풍문을 두고 무림맹과 싸우는 건 형산파에게 독이었다. 옹진수는 눈을 감고 앉았다.
“···그래. 그렇다고 치시오. 그러나 형산파가 대대적으로 관련된 일은 아니라오.”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결국 옹진수는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을 버리고 명예를 택해야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무림맹의 행동은 평소와는 거리가 있었다. 원래 중원에 최대한 파장을 안 일으키려던 무림맹이 아닌가. 형산파 정도의 문파를 이렇게 다루면 분명 후폭풍이 따를 터였다.
“맹주. 이건 신산이 그린 그림이오?”
“알아서 생각하시오.”
“분명 구파일방에게서 견제를 받을 거요. 쥐꼬리만큼 나왔던 지원금도 이제는 끊길 수도 있고.”
“그거야 우리 사정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종리운은 그렇게 말하고 품에서 죽간 하나를 건넸다. 옹진수 뒤에 있던 장로 하나가 부리나케 달려나와 죽간을 대신 받았다.
- 봉문지약서(封門之約書)
죽간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종리운이 말했다.
“아무리 형산파가 대대적으로 관련되어있지 않더라도, 제자가, 그것도 장문인의 아들이 이런 점에 연루된 건 관리의 잘못이라고 보오. 그 책임을 물어 삼 년간 봉문을 지시하는 바이오.”
“···그래, 그래.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시오.”
옹진수는 포기해버렸다. 솔직히 지금 같이 문파가 어지러운 상황이면 자체적으로 봉문을 하는 게 맞았다.
또 훗날을 위해 칼을 갈아야 할 시간도 필요했고.
옹진수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인원들을 바라봤다. 적어도 여기 앉아있던 놈들은 전부 죽여주리라. 옹진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가만히 있던 곽진도가 말을 끼어들었다.
“그리고 황금세가의 습격 피해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배상을 하셔야하오.”
옹진수는 곽진도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곽진도도 지지 않고 옹진수를 같이 노려봤다.
종리운은 먼저 죽간에다가 직인을 찍었다. 죽간의 내용을 확인했다는 의미였다. 옹진수도 아무 말 없이 밑에 직인을 찍었다.
“우리는 직인이 없어, 수결로 하겠소.”
“흥. 뿌리가 없어진 나무로군.”
곽진도의 말에 옹진수가 이죽거렸다. 하지만 곽진도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런 중요한 내용에는 직인을 쓰는 게 가문의 명예에도 맞았지만, 없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애초에 내용이 중요하지 형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곽진도가 수결을 찍으려고 할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옹진수가 신경질적인 소리로 외쳤다.
“누구냐?”
“황금세가의 막내공자가 왔습니다.”
바깥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벙찐 옹진수가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한 소년이 거침없이 들어왔다. 저 녀석이 바로, 황금세가의 막내공자였다.
“황금세가의 금목환입니다. 형산파의 장문인께 인사드립니다.”
“···인사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
“그렇긴 하죠.”
옹진수는 금목환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옹소후는 황금세가의 막내 공자가 바뀌었다고 했다. 실제로 다 머저리인 줄 알았던 직계였지만, 금목환의 태도는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옹진수와의 말을 그렇게 끊은 금목환은 죽간 앞으로 다가갔다.
“직인은 제가 찍겠습니다.”
어느덧 금목환의 손에는 금색 칠이 되어있는 직인이 들려있었다. 그것에는 옹진수도, 곽진도도, 맹주도 눈이 둥그레졌다.
그들이 그렇게 비밀리에 찾아다녔던 금인이 저기 있는 것이었다.
금목환은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제일 밑에 직인을 찍었다.
- 황금가주(黃金家主)
죽간에 금인이 또렷하게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