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이건 내 검이었다
50화 이건 내 검이었다
이른 아침 무렵. 종리운은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가뜩이나 가만히 있지 못하는 손가락은 더욱 부산해졌다. 갈유월과 금목환의 비무가 있었던 날부터 하루. 종리운은 꼬박 하루를 밤 샜다.
집무실 책상 위에는 수많은 책들과 죽간들이 펼쳐져 있었다. 무림맹의 서고인 진무문고(眞武文庫)의 책들로, 종리운이 가져온 것이다. 자료들은 바로 재능과 역대 초절정무인에 관한 것들이었다.
- 정파사 본기(正派史 本紀)
- 등봉조극(登峰造極) 일람
- 사문휘 열전(史紋輝 列傳)
- 역대 무곡성(武曲星)과 천살성(天殺星)들
온갖 재능, 초절정에 관한 자료들이었다. 종리운의 일차적인 결론은 이것이었다.
“정말 무곡성인가.”
모든 자료를 덮은 종리운이 고개를 하늘로 꺾었다.
무곡성이란 전설에 가까운 무재(武才). 보는 무공을 그대로 펼칠 수 있으며, 지능이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는 특성. 그야말로 천재의 종합이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무곡성은 구천검성(九天劍星) 사문휘. 최근이라고 해도 가히 이백 년 전 사람이니 자료의 신빙성도 따지기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 금목환의 모습은 무곡성이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었다.
몇 달 배우지도 않은 무공으로 갈유월을 이기는 실력. 목현학의 증언. 모두 금목환이 천재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후.”
무곡성이 맞다면 금목환은 예정된 천하제일인이었다. 무림맹주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놓칠 수 없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개인적인 호감이 컸다면, 이제부터는 공적인 문제였다. 그런 재능을 가진 아이라면 먼저 품는 게 당연히 이득이었다.
일단 비무에 참관한 무사들과 장로들에게는 함구령을 내려놓았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감추기에는 너무 커다란 재능이지만 일단은 안 막는 것보단 막는 게 나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생각할 차례였다. 금목환이라는 인재와 무림맹을 엮을 방법을 말이다.
똑똑.
그런 생각을 막 하려고 할 때 문이 두드려졌다.
“누구냐.”
“금목환입니다.”
절도 있는 두드림에 예상은 했지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애가 아침잠도 없나.’
비슷한 나이인 갈유월은 안 깨우면 미시까지 자는데, 정말 무곡성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단 말인지. 문 바깥으로 안 들리게끔 헛기침을 해 밤새 갈라진 목을 다듬었다.
“들어오게.”
최대한 근엄한 목소리. 무림맹 무사들을 전부 모아놓고 훈시를 하는 것 아니면 꺼낼 일이 없는 목소리였다.
금목환은 문을 열고 꾸벅 인사를 했다. 아침인데도 부스스한 모습 없이 깔끔하고 단정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어서 오게.”
종리운은 금목환의 얼굴을 보면서 머리를 빠르게 돌렸다. 사실 칠존 정도나 되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환심을 사는 건 본인의 몫이 아닌 상대의 몫이었으니.
무림 초출 때도 입에 발린 소리는 안 해봤던 종리운에게는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흠, 흠. 공자. 그 다시 보니 말이야, 아주 잘생겼군. 지금도 이렇게 잘생겼는데, 조금만 크면 소저들을 여럿 울리겠구먼. 하하.”
“···네? 아, 네. 감사합니다.”
금목환의 눈이 잠깐 크게 떠졌다가 돌아왔다. 웬만해선 대답을 끌지 않는 금목환도 늦게 답이 나왔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게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는 것 같았다.
‘젠장.’
종리운은 자신의 어리숙함을 속으로 욕하고 재빨리 실수를 수습했다.
“일단 비무 잘 봤네. 해남의 남해십이검이었지. 대단한 성취더군.”
“감사합니다.”
“해남 문주가 아주 뿌듯해하겠군. 배운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런 성취라니 말이야.”
금목환은 다시 말문이 막혔다. 이번에도 실수를 한 걸까. 종리운은 순간 방금 말에서 무엇이 실수였는지 빠르게 되짚어봤지만, 딱히 없는 것 같았다.
“아마 해남 문주님은 모르실 겁니다. 외총관님께 정식으로 사사받은 건 맞으나, 해남에 직접 가서 장문인에게 입적을 허락 받은 적은 없습니다.”
“···어? 그런가?”
그것 때문에 잠시 망설였던 거군. 물론 문제는 없다. 천류유성검은 해남의 무인이고, 충분히 제자를 받을 수 있다. 그래도 문파에 입적을 하려면 본파에 들르기는 해야 했는데, 그걸 안 들른 것이었다.
“네. 좀 바빠서 해남에 갈 형편이 안 됐습니다.”
“그렇군.”
종리운도 알다시피 황금세가는 주산파와 일전을 벌였었다. 무사들은 대다수가 무림맹이었어도, 안에 있는 사람들과 시설물들을 소개(疏開)하고 전략을 짜느라 시간이 없었을 터다.
그렇다면 해남에 정신적으로 속해있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남해십이검을 익힌 순간부터 입적하는 건 예정되어 있는 일이다.
그래도 꼭 해남파 출신 무인이 해남에서만 활동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장 천류유성검 곽진도도 황금세가의 외총관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은가.
무림맹에도 얼마 없지만 구파일방, 오대세가 출신의 사람들이 있다. 대다수가 방계이기는 하지만 직계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신산 제갈헌이 그랬다.
종리운의 머리가 더욱 빨리 돌아갔다. 현재 금목환은 황금세가의 가주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괜히 무림맹에 적을 두라고 압박할 수 없었다.
지금은 금목환을 아무 이유 없이 지원해줘야 할 때였다. 경계심을 풀게하고, 나중에 기회가 왔을 때 확 낚아챌 수 있게끔.
종리운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흠, 흠. 갈 길이 바쁘니 오래 붙잡아둘 수 없군. 일단 천기고로 가볼까.”
“네.”
종리운이 일어나고, 금목환도 뒤따라 일어났다. 종리운은 맹주실을 열어 앞장을 서려고 했다.
그때 복도 저 멀리서 갈유월이 서성이고 있는 게 보였다. 갈유월은 종리운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다른 쪽으로 숨어버렸다.
‘상심이 크나보군.’
종리운은 씁쓸했다. 갈유월의 재능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장강과 대양(大洋)을 비교하기에는 가혹했다. 특히 저 어린 나이에는 말이다.
금목환과의 비무가 끝나고 격려를 해주러 갔지만 만나주지 않았었지. 상처가 치유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한 듯했다.
“제가 본 재능 중에 가장 특출했습니다.”
느닷없이 금목환이 뒤에서 말했다. 금목환 역시 숨는 갈유월을 본 모양이었다.
“허허. 자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공치사처럼 들리는데.”
“아닙니다. 형산의 후기지수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종리운은 목을 돌려 금목환을 슬쩍 바라봤다. 금목환의 목소리는 진지했고 눈빛 또한 흔들림이 없었다. 종리운은 미소를 지었다.
“저 아이한테도 큰 자양분이 되었을 걸세.”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그들은 천천히 무림맹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천기고는 일반 무기고와 달리 신병이기가 있는 곳. 유동성이 많은 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천기고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아는가?”
“견문이 좁아서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신투행전(神偸行纏)이 여기 있던가요.”
“그 정도면 많이 아는군.”
종리운이 웃었다. 신투행전은 과거 전설적인 도둑, 신투가 썼다던 각반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각반에는 신투가 썼던 경공의 구결이 적혀져 있다고 했다.
“가지고 나오면 안 되는 물건이라도 있습니까?”
“그런 건 없다네. 다만 그곳에는 그냥 고대의 고수가 썼다는 이유로 들어가 있는 철검도 있으니 조심하게나.”
“신병이기는 좇는 게 아닌 따라오는 거라고 하죠.”
“그래서 추천하기는 힘들다네.”
신병이기나 장보도가 얽힌 사건에 얼마나 많은 피가 얼룩져있던가. 그래서 신병이기에 관해서는 금목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었다.
분명 끌리는 운명 같은 게 있을 터였다. 자신의 애병(愛兵), 풍한(風寒)도 그렇게 끌려오지 않았는가.
“여기가 천기고라네.”
그들이 멈춰선 곳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금목환이 말했다.
“진법이군요.”
“그렇지. 진법 안에 갇힌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진법 밖으로 빠져나오게 되어 있다네.”
“진법임을 알아채는 진법을 만드는 건 하수라고들 하죠. 훌륭한 진법입니다.”
“신산의 작품이지. 나중에 공자를 보면 좋아할 걸세. 공자도 진법에 견문이 있다고 알고 있으니 말이야.”
종리운은 그렇게 말하면서 진법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금목환도 종리운이 딛었던 곳으로 똑같이 딛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어느 허름한 문 앞에 서있었다. 문 옆에는 으레 있는 현판조차 없었다.
“여기가 천기고라네.”
“안에서 많은 기운들이 느껴지는군요.”
“천기고 앞은 도수부도 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게 흐르지.”
“그렇군요.”
금목환은 문을 바라봤다. 종리운이 보기에는 분명히 흥미가 동한 눈빛이었다. 하긴 천기고 앞에서 흥미를 안 보이는 무인이 이상한 것이리라.
“그럼.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네.”
“신병이기들은 질투가 많다네. 그러니 너무 그들을 재지는 말게나.”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종리운은 웃으면서 문 앞에서 비켜줬다. 금목환은 짧게 목례를 하고,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문을 열어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이제는 무림맹주가 아닌 단순한 무인으로서 이 천재에게 어떤 신병이 속삭일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
천기고. 말만 무성한 곳이었다. 혹자는 그냥 구파일방에 꿀리지 않기 위한 무림맹의 허세라고도 했다.
사실 천기고에 있는 신병이기들은 대개 공개되지 않는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괜히 뭐가 있는지 밝혔다가 도둑이라도 들면 어쩐단 말인가.
신투행전이 그나마 최근에 무림맹이 회수한 신병이기라 알고 있는 것뿐이지, 그 외는 잘 모른다.
“신병이기라.”
무림맹에 올 때 전혀 생각지도 않은 상황을 많이 만나고 있었다. 뜬금없이 초식 하나를 전수받지 않나, 신병이기 창고로 들어가지 않나.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했다. 내 가치가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무림맹이 날 주목할 만큼.
먼저 앞쪽 선반을 둘러봤다. 허름했던 문과는 달리 안쪽은 굉장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진법을 설치한 모양이었다.
“신기한 색깔이군.”
나는 선반 중간에 있는 검 하나를 보았다. 어떤 공법으로 제작한 건지는 몰라도, 칼날이 푸른빛을 띄었다.
만질 생각은 없었다. 종리운의 마지막 말은 너무 쑤시고 다니지 말라는 얘기와 같았다.
난 일반 대장간을 온 게 아니었고, 그 정도는 충분히 지켜줘야 했다. 여기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견식이 넓어지는 기연을 얻은 셈이니 말이다.
“아, 담로(湛盧)구나.”
난 검병에 있는 구야자(歐冶子)라는 음각을 보고서 깨달았다. 구야자라는 명장이 만든 검이었다. 만든 지 최소 천 년은 지난 고검(古劍)도 있다니. 참 신기한 곳이었다.
나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시간을 오래 끌지는 않을 것이었다.
눈에 띄는 걸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 물론 신병이기의 형태를 아는 사람이 강호에 몇이나 되겠냐만은, 그래도 조심해야 했다.
분에 넘치는 물건을 욕심냈던 사람들은 언제나 피의 대가를 치렀다.
중원에 널리 알려진 구야자나 간장의 검은 그런 쪽으로 보면 가장 가져가지 말아야 할 검들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태을헌원신공의 진기를 퍼뜨렸다. 하나씩 기물들과 교감했다.
다행히도 담로, 간장, 막야 같은 검들은 내 진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난 눈을 감았다. 그래야 이 수많은 보물들에 매혹되지 않으리라.
눈을 감고 진기를 따라 걸었다. 진기가 인도하는 곳으로 나아갔다.
여러 골목을 돌았던 내 발이 어느 순간 멈췄다. 지체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부드럽게 무언가가 감겨왔다.
“음.”
눈이 번쩍 뜨여졌다. 검병을 잡은 손바닥 안으로 기운이 한 줄기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건 빠르게 내 몸을 훑고 다시 손바닥으로 빠져나와 검병으로 돌아갔다.
아주 적은 기운이었지만, 그 기운의 정순함은 태을헌원신공을 상회했다.
외형은 그냥 흔한 고검(古劍)이었고, 검면이나 칼몸테두리에 검을 식별할 수 없는 어떠한 특징도 없었다.
하지만 잠깐 내 몸을 왔다간 기운만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내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