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잘 배웠습니다
49화 잘 배웠습니다
연무장 중앙과 단상은 스무 장은 족히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종리운은 이 스무 장을 단박에 갈 수 있었다.
그래도 갈 일이 없는 게 제일 최선일 터였다. 종리운은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외쳤다.
“시작!”
그 신호와 함께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갈유월의 출수는 섬전과도 같았다. 빠른 발검과 함께 검존의 신풍검법(神風劍法)이 펼쳐졌다.
좌우의 어깻죽지로 날아가는 검격. 얼마나 빨랐던지 잔상이 어느 쪽일지 모를 정도로 둘 다 선명했다.
무림맹 무사들이 보기에, 금목환은 자신의 어깨에 두 개의 검격이 닿을 때까지 아무 행동도 안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앗!”
목검이지만 기를 담은 순간 진검과 진배없는 예기. 무림맹 무사들은 금목환이 꼼짝없이 당할 줄로만 알았다.
쾅!
“큿!”
그러나 폭음과 함께 뒤로 물러난 건 뜻밖에도 갈유월이었다. 어느덧 금목환은 목검을 쇄골로부터 위로 세 치는 띄어진 곳에 수평으로 눕히고 있었다.
금목환의 목검은 멀쩡했지만, 갈유월의 목검은 그녀의 손목과 함께 부르르 떨렸다. 심지어 금목환의 검에는 푸른 기도 일렁이지 않았다.
“···이화접목(移花接木)이라고?”
단상 옆에 있던 장로 하나가 중얼거렸다.
적의 힘을 이용하여 그대로 받아치는 수법. 그런 고급 수법을 저 나이대의 비무에서 볼 수 있는 건 굉장히 뜻밖이었다.
그건 기를 자신 몸처럼 다루는 사람이나 가능한 것이었다. 당연히 기를 가진 지 오래됐어야 하고, 보통 무사들로 치면 절정에서나 쓰는 방법이었다.
근데 지금 열두 살짜리 아이가 절정의 무리(武理)를 쓴 것이다.
“저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옆에 있는 강운은 읊조렸고, 목현학도 조용히 끄덕였다. 무엇보다 놀란 건 종리운이었다.
그러나 놀란 걸 말로 표현할 새도 없이 이번엔 금목환이 달려들었다. 갈유월은 아직 자신에게 돌아온 내공을 다 소화하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지금 그녀는 당황하고 있었다. 어른들도 이기는데, 본인 또래한테 밀린다는 건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유월은 질 수 없었다. 지금 사부님이 보고 있었다. 갈유월은 억지로 물러나는 걸 멈췄다. 기의 운용이 거칠어 뼈가 삐걱거렸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 이기는 게 중요했다.
갈유월은 적어도 명확히 직시했다. 믿을 수 없지만, 금목환은 자신보다 강했다. 일 합만 나눠봐도 알 수 있었다.
발뒤꿈치를 땅에 내딛은 갈유월은 바로 신풍검법 삼 초식, 신풍취성(神風吹聲)을 썼다.
전방 석 장을 초토화 시킬 수 있는 무공이었으나, 갈유월은 사실 이 무공을 불완전하게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진기를 한껏 끌어올린 신풍취성이 펼쳐질 때, 갈유월은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오른쪽 한 발로 땅을 방금 내딛은 금목환이 흩어지듯 사라진 것이다.
콰콰···
쾅, 하는 폭음 소리와 신풍취성이 폭음을 내며 전방으로 분출되려 했지만, 그 소리는 중간에 끊어졌다.
하늘에서 금목환이 기를 수평으로 만들어 땅을 뒤덮어버린 것이다. 바로 남해십이검 오 초식. 수연만범이었다. 위에서 눌린 신풍취성은 순식간에 해소되고 말았다.
그것은 기의 양으로 압도한 게 아니었다. 오로지 기를 다루는 기술이었다. 최소한의 기로 타인의 기에서 약한 부분을 비집고 들어가 무력화시켰다.
그러면서 금목환은 내려오는 힘으로 갈유월의 정면을 내려쳤다. 갈유월에게는 자존심이 상하게도 어떠한 기교도 들어있지 않은 삼재검법의 태산압정(泰山壓頂)이었다.
갈유월은 바로 머리 위로 칼을 들어 막았지만, 그때 다시 금목환에게서 한 번 아까의 유령 같은 움직임이 나왔다.
어느새 금목환은 갈유월 뒤에서 그녀의 목에 목검을 대고 있었다.
비무가 결판이 났다.
*
무림맹 맹주실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종리운과 강운, 목현학이 있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오랜 적막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강운이었다.
“유월이가 질 줄은 몰랐군.”
“그 나이에 그 정도로 무학을 이해하는 게 가능한가?”
강운과 목현학은 금목환의 움직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갈유월이 누구인가.
검존의 독문무공, 신풍검법을 전수받고 다른 장로들에게서도 틈틈이 가르침을 받는 아이가 아닌가. 또한 오성도 좋아서 가르치는 대로 흡수하니, 그야말로 무림맹이 기르는 후기지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근데 그게 상계의 아이 하나에게 어떻게 할 도리도 없이 지고 말았다. 당연히 사술은 아니었다. 이화접목의 묘리, 내공의 정순함 모두 정파의 무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유월이는 지금 어디 있나?”
“자기 방으로 들어갔지. 꽤 충격이 큰 모양이야.”
종리운이 대답했다. 목현학과 강운, 종리운은 서로 동배분이어서 사적인 자리에서는 말을 편하게 하고는 했다.
“그런 오성이라면 당장 중원에서 말이 나왔을 텐데. 그걸 숨기면서 가르칠 수가 있는 건가?”
“실전에 대한 것도 수련이 돼있어 보였어. 비무할 때 못 봤나? 완전히 냉가면(冷假面)이더군.”
종리운은 퍼뜩 비무 전 자신에게 보여준 순진한 표정이 떠올랐다. 비무를 말하자 갑자기 갸웃하면서 순진한 표정을 보여줬지.
그렇다면 그게 모두 연기였단 말인가. 칠존 중 하나인 검존이 열둘의 아이에게 놀아난 것인가. 적어도 그건 아니기를 바랐다. 그건 종리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니까.
“대체 누구 제자지?”
무엇보다 그들의 공통적인 의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당장 떠오르는 건 삼선(三仙)이었다. 언제나 머무름 없이 부평초 같이 다니는 전대의 초절정고수들. 그러지 않으면 저 정도 성취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더욱 납득이 안 되는 게 있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목 장로. 그건 비연각 신법이었지?”
강운과 목현학의 말이 없어졌다. 그건 어떻게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비연각주가 바보도 아니고, 그걸 왜 알려준단 말인가.
그리고 금목환이 쓰는 방축귀매신법은 묘하게 달랐다.
“그래. 내가 다듬어준 느낌하고 좀 다르긴 하지만, 묘리는 같아.”
세 명의 초절정고수가 있음에도 금목환이 쓰는 무공과 무위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연무장에서는 최대한 놀란 티를 안 내려고 침착하게 있었을 뿐.
“무공이 유출됐는지, 아닌지, 아니면 비슷한 다른 무공인지.”
“그런 확률은 나뭇가지 하나가 번개 두 번을 맞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무공은 수많은 세맥과 근육들의 움직임 순서를 조합한 경우의 수와 같다. 이름만 다르고 같은 무공은 거의 불가능했다.
“알아보는 방법은 쉽지. 그 공자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강운이 말했다. 강운의 말대로 정말 쉬운 방법이었다. 목현학이 답했다.
“그건 내가 물어보는 게 맞겠군.”
모두가 그건 인정했다. 그 신법은 목현학이 전문가니까. 바로 비무를 끝낸 아이를 불러서 겁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중에 부르기로 했다.
종리운과 목현학, 강운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들의 짧은 회의는 결국, 이 결론으로 일치되고 말았다.
“강호를 뒤흔들만한 재능이 나타났군.”
*
“진짜 재능이군.”
최대한 기를 흘렸지만 여전히 팔이 저릿했다. 갈유월은 내가 생각하기에 진짜 재능이었다. 옹문규가 형산에서, 중원에서 손꼽히는 후기지수라고? 웃기지 말라고 해라. 갈유월 하나만 있어도 옹문규 정도는 열 명이 동시에 덤벼도 이길 수 있을 터다.
내가 상단전으로 기의 흐름을 훤히 보니까 흘려낼 수 있었기에 가능한 승부였지, 아니면 나도 그 흉폭한 기에 휘말렸을 터다.
“···아직 멀었구나.”
나는 오른손의 주먹을 폈다, 쥐었다를 반복했다. 부족했다. 고작 열 하나에게 이런 느낌을 받았다.
갈유월처럼 진짜 재능이 있는데다가, 절대적인 시간까지 많이 쏟아 부은 고수들은 어떻게 감당하라는 얘기인지.
당장 천주성의 목단화만 해도 나를 개미 밟듯이 쉽게 죽일 수 있었다. 단지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싸울 상대는 너무 많다. 그중에서는 목단화만큼의 고수들도 있고, 그보다 고수들도 있을 거다. 물론 직접 칼을 맞대서 싸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방법이 제일 정확했다. 자신의 목숨을 남에게 맡기는 멍청한 행동은 한 번이면 족했다.
“여러모로 생각을 많이 해놔야겠어.”
둘째 형이 가주가 되고, 내가 지하로 들어갔을 때는 팔 년 후. 내가 약관이 될 때다. 그때 관례(冠禮)랍시고 내게 난삼(襴衫)을 입힌 다음 팔다리를 잘랐었다.
난 종이와 붓을 들어 내게 벌어진 일과 내가 알고 있는 중원의 일들을 정리했다.
생각보다 중원에는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다. 한 사건이 들어가면 한 사건이 튀어나오는 식이니까. 그 중에서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사건들이 분명 있을 터였다.
머리를 굴리는 와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종이를 접어서 품에 넣은 뒤 문을 열었다. 난 그를 보자마자 목례를 했다.
“오셨군요.”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말투군.”
검은색 무복의 남자는 목현학 장로였다. 눈이 작고 째져서 꽤 날카롭다는 인상을 주었다.
“장로님의 무공을 썼으니까요.”
“내 무공은 아니지. 내가 비연각한테 만들어준 무공이지.”
“그렇군요.”
“어떻게 배웠나.”
목현학은 단도직입적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고저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질문으로 들리지 않고, 겁박으로도 들리지 않았다.
난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미 생각해놓은 상황이었고 준비해놓은 대답이었다.
“보고 따라했습니다.”
“흠.”
최대한 표정이 변하지 않던 목현학도 그 말에는 눈썹이 잠깐 출렁였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하나의 무공을 따라하는 건 형을 따라하는 게 아닌, 내공의 운용과 묘리를 꿰뚫음을 말한다. 네가 무슨 장삼봉, 달마 같은 일대종사(一代宗師)라도 된다는 말이냐.”
“전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그때. 감춰져 있던 목현학의 소매가 흔들렸다. 어느새 드러난 손에는 단검이 있었고, 목현학은 단검을 내 심장쪽으로 질렀다. 그러나 난 그것을 피할 수 없었고, 전신이 찔리는 착각을 했다.
“···후우.”
나는 멈췄던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목현학의 소매는 다시 손을 덮고 있었고, 손가락 다섯 개가 끝으로 나온 것으로 봤을 때 단검도 들고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방금 내가 쓴 건 암표결(暗豹訣)이라는 무공의 탈명표풍(奪命飄風)이라는 초식이다. 네 말이 맞다면, 이것 역시 따라할 수 있을 터.”
목현학은 진지했다. 나는 잠깐 멈췄다. 그래도 목현학은 초절정 고수. 너무 빨라서 움직임이 명확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내공을 움직였는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역시 거짓을 말했던 거냐.”
목현학이 실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지금껏 그의 말투 중에 가장 노골적이었다. 난 대답했다.
“아뇨.”
나는 왼쪽 손으로 오른쪽 갈비뼈를 잡고 오른 손을 내밀었다.
“단검 주시죠.”
목현학의 표정이 다시 처음과 같이 돌아왔다. 그는 소매를 까뒤집었다. 그곳에는 크기별의 비침과 단검들이 빼곡했다. 목현학은 하나를 집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난 그걸 잡아들자마자 목현학의 심장 앞으로 시범을 보였다. 탈명표풍이라. 한 번의 찌르기처럼 보이나, 그건 너무 많은 변화를 담고 있기에 보이는 착시였다. 그런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온몸에 힘을 빼고, 바람에 나부끼듯 근육이 흔들려야했다.
묘리를 알게 되면, 팔은 저절로 움직였다. 내가 봤던 진기의 흐름이 적절히 세맥에 닿는 순간 단검이 변화무쌍해졌다.
이게 탈명표풍일까. 목현학에 비해서는 적은 변화 수였고 느렸다. 하지만 난 단검을 회수했다. 여기서 더 변화를 만들어내면 근육이 찢어질 게 분명했다. 기를 담은 세맥이 근육을 잡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나는 그렇게 무공을 마치고 단검을 다시 건넸다.
“맞게 썼는지 모르겠군요.”
목현학은 내가 주는 단검을 잠깐 받지 않았다. 그의 작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엄청난 진폭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가 주는 단검을 받아 다시 소매 속으로 넣었다.
“···그렇군. 네 말이 거짓이 아닌 건 잘 알았다. 그렇다면 그건 네 무공이다.”
목현학은 최대한 진중하게 말하려고 하는 듯했으나,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래도 탈명표풍이라는 초식을 바로 따라한 게 그의 동요를 불러온 것 같았다.
그리고 목현학은 등을 돌렸다. 가겠다는 의미였다. 나는 한 걸음 내딛으려는 그에게 말했다.
“탈명표풍이라는 초식. 잘 배웠습니다.”
목현학은 선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내게서 지금 등을 지고 있어 표정을 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곧 답이 나왔다.
“오늘은 쉬고, 내일 아침에 맹주실로 가보게나. 맹주한테 뭘 받기로 했다던데.”
목현학은 그리 말하고 빠르게 걸어갔다. 꿋꿋한 어깨에서 더 이상의 말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단호함이 드러났다.
어차피 더 이상 할 말도 없었다. 난 그저 시현만 해주려고 했는데, 내게 무공을 줬으니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 했다.
이제 목현학은 무림맹주에게 나를 천재라고 알릴 것이었다. 그것이 방금 무공 시현의 원래 목표였다. 보다 적극적인 무림맹의 도움을 받으려면 내 가치를 올려야 했다. 다음 날에는 내 가치가 얼마나 올라가있을지. 나는 그것을 기대하며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