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럼 내가 이겼네
48화 그럼 내가 이겼네
“허허.”
종리운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검존 앞에서 재능을 논하는 이 어린 아이를 어떡하면 좋을지. 어떻게 보면 용감했고, 어떻게 보면 발칙했다.
자신을 만난 무인들은 언제나 자신을 낮췄다. 당연했다. 칠존은 노력만으로 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엄청난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재능도 필요했다. 종리운이야말로 중원에서 손꼽히는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얘기다.
근데 그런 검존 앞에서 본인을 재능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무공에 재능이 있다라.”
말도 안 됐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열두 살에 저런 지식을 쌓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무공까지 배운다라.
혹여 그런 것이 아닐까. 원래 뭐든 모르면 재밌고, 본인이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니. 무공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재미를 느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비연각의 보고와도 딱 맞아떨어졌다. 금목환이 무공을 배운지는 지금 채 일 년도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절정 고수까지는 몰라도 초절정 고수가 되기는 힘들었다. 초절정 고수들은 대개 네 살, 다섯 살부터 무공을 단련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종리운에게 퍼뜩 기가 막힌 책략이 떠올랐다. 이 어린 아이의 치기를 잘 이용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칠존이 하기에는 많이 부끄러운 생각이지만 그만큼 종리운은 금목환이 탐났다.
“그러면 말일세. 우리 내기를 한 번 할까.”
종리운이 미끼를 던졌다. 금목환은 갸웃했다. 그 어리고 이쁘장한 얼굴이 더 없이 순진해 보였다. 아까 태극과 천지인을 논하던 냉철한 눈빛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래도 아이는 아이였다. 가끔 어느 분야에 너무 뛰어난 아이는, 어떤 분야에 대해서는 순백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 금목환에게는 무공이 그런 부분인 것 같았다.
“내 제자하고 한 번 붙어보겠는가? 아까 봤었지. 유월이라는 애하고 말이야.”
“봤습니다. 내기로 무엇을 거는 건지요?”
“소원 하나씩 들어주는 거지.”
종리운은 슬며시 웃었다. 가끔 갈유월이 너무 들러붙을 때면 가끔 쓰는 전략이었다.
자신의 몸을 털끝이라도 건드리면 계속 옆에 있어도 된다고. 대신 못 건드리면 겸허히 훈련을 할 것. 물론 아직 갈유월이 이겨본 적은 없었다.
“소원이랄 건 딱히 없습니다. 그냥 아버지를 뵙게 해주시면 됩니다.”
“그게 전부면 내가 미안하지 않은가. 아무리 대의를 위해서 보호를 하고 있어도, 내 아버지도 아니고 공자의 아버지인데. 음, 뭐가 좋을까. 천기고(天器庫)에서 선물 하나를 주겠네. 원래 장로가 될 때 한 번만 열어주는 곳이지.”
천기고는 무림맹이 가지고 있는 신병이기들의 집합소였다. 이 정도는 걸어놔야 양심이 덜 찔릴 듯했다. 사실 어처구니없는 제안이었으니. 대신 갈유월에게는 절대 다치지 않게 하도록 유의를 시켜야 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난 공자가 무림맹으로 들어오는 걸 소원으로 하지. 그게 더 깔끔하군.”
종리운이 웃었다. 금목환도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비무의 시간과 규칙을 간단하게 논의했다.
이제 가타부타 말은 필요 없었다. 가장 강호에 걸맞는 방책이 있었으니까. 말보다 검이 더 가깝다는 강호의 격언과도 어울렸다.
종리운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금목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평화롭게 차를 마셨다. 찻잔에 가려진 금목환의 얼굴이 잠깐 냉정하게 변했다. 물론 종리운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
무림맹에서 비무가 안 열리는 건 아니다. 오히려 허구헌날 열린다. 강호에서 비무란 훈련의 일종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화제가 되는 비무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강운과 종리운의 비무라든가, 여자를 뺏긴 호위무사와 여자를 뺏은 호위무사의 비무라든가.
그런 면에서 이 비무는 화제가 됐다. 당장 무림맹주의 제자와 황금세가의 막내공자가 비무를 한단다.
무림맹에서 보기 어려운 귀여운 아이들의 비무에다가, 무림맹주 제자의 무공을 직접 볼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 화제가 되는 것이다.
덩달아 무림맹주 제자의 상대도 화제가 됐다. 대체 어떤 후기지수이기에 무림맹주 제자와 비무를 한단 말인가.
사람들은 적어도 남궁세가나 무당파의 후기지수가 올 줄 알았다. 근데 황금세가의 막내공자란다. 상계인데다가, 바보가 된 세가의 막내공자가 갑자기 왜 나온단 말인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무림맹 장로회도 마찬가지였다. 장로회는 강운과 목현학을 포함한 장로들 다섯이 모여 있었다.
“근데 황금세가 막내공자는 갑자기 왜 나오는 거야?”
“모르지. 맹주님한테 예의 없게 굴었나?”
“그래도 맹주님이 그렇게 보복할 사람은 아니지 않나.”
“그것도 그렇긴 하지.”
장로들은 하나같이 자신만의 예측을 던지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갈유월의 승리는 이미 전제되어 있었다.
그들은 다른 무림맹의 무사들과 달랐다. 맹주를 독대할 수 있으니 갈유월도 많이 볼 수 있고, 그녀의 성취도 알고 있었다.
“근데 유월이면 사고 치지 않을까? 걔 성격이 좀 이상하잖아.”
“맹주님은 모르지. 맹주님 앞에서는 천사니까.”
갈유월의 성격은 장로회에서도 유명했다. 종리운만 따라다니고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것으로 말이다. 평소에는 말수도 없는 애가 맹주의 시간만 뺏으면 으르렁거리고 질투를 하고는 했다.
그 진폭이 너무 크니 장로들 입장에서는 위태로워 보였다.
또한 갈유월과 황금세가의 공자가 맞붙으면 어떻게 될지는 눈에 선했다. 갈유월의 훈련을 지켜본 장로들은 모두 걱정했다.
갈유월은 무공이 또래에 비해서 월등했다. 무림맹 본단 보호대인 현무대(玄武隊)의 대원들이 일류인데,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무공도 고강한데다가 성격도 이상한 아이를 동년배와 붙이다니, 맹주가 갈유월의 성격을 모르니 할 수 있는 실책이었다.
모든 장로들이 걱정할 때 구석에서 소리가 났다.
“막내공자가 그냥 수락한 건 아닐 거야. 분명 한 수가 있을 걸.”
장로들의 눈이 모두 그쪽으로 갔다. 누워있는 데다가 갓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었지만, 장로들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강호에서 비동형이라고 불리는 경공의 달인, 목현학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목 장로님.”
“말 그대로야.”
목현학은 갓을 내리지 않은 채로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강운도 말을 거들었다.
“나도 그 말에 찬성. 걔의 무공은 몰라도, 바보는 아니야. 오히려 너무 똑똑해서 소름 돋는 애지.”
강운과 목현학의 말에 나머지 장로 셋은 갸웃했다. 강운과 목현학은 그냥 장로들과 달리 수석 장로였다. 그들의 안목이 그렇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긴 했다.
두 수석장로가 맹주의 명에 의하여 황금세가로 파견을 나갔던 사실은 알고 있다. 허나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모르는 장로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수석장로의 말들이니 토를 달지 않으면서도, 갈유월이 이길 거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었다.
*
무림맹의 건물 안에는 타원형으로 된 연무장이 있었다. 모든 부대가 훈련하는 곳 중 하나다. 그래서 하루도 땅이 고를 날이 없는 곳인데, 오늘만큼은 아주 깔끔했다.
바로 무림맹주 제자가 비무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모든 무림맹 무사들의 관심이었다.
무림맹주 제자 갈유월은 거의 맹주에게만 딱 붙어있어서 보기 힘든 아이였기 때문이다. 또 같은 나이 또래와 비무를 하는 것 역시 처음이었으니 더욱 관심이 쏠렸다.
“와, 쟤도 귀엽게 생겼다.”
“어쩌면 좋냐. 지금이라도 말릴 사람?”
담담히 준비하는 갈유월도 관심 대상이었지만 그 불쌍한 상대방도 관심 대상. 목검을 휘둘러보는 남자아이는 무림맹 무사와 장로들에게는 안타깝게만 보였다.
더욱 안타깝게도 금목환은 너무 귀엽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성격은 안 좋지만 갈유월의 외형은 모두가 인정했는데, 그것과 비견할 정도였다.
어린 나이에 비무를 잘못해서 콧대가 뭉개지고, 뼈가 내려앉은 무인들이 얼마나 많던가. 저 타고난 외모가 한 순간의 비무로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모두가 준비됐다. 전신을 보호하는 상하의 일체형 복장인 데다가, 얼굴 부근은 금속 격자로 되어 있어 앞을 볼 수도 있고, 막을 수도 있게 되어 있었다.
원래 비무를 할 때 이렇게까지 안전을 고려하지는 않지만, 종리운도 신경을 쓴 것이었다.
사람들의 우려가 어찌 됐건, 비무 시간은 다가왔다. 비무 시간이 다가와질수록 연무장은 조용해졌다. 갈유월과 금목환은 보호장구를 모두 차고, 종리운은 그걸 하나씩 확인했다.
확인이 끝난 후, 종리운이 미리 합의된 비무 규칙을 말했다.
“비무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기를 발현할 수 있어도 발현하지 말 것. 치명적인 혈자리를 노리지 말 것.”
“네.”
갈유월은 쉽게 대답했지만, 금목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종리운이 금목환을 바라봤다. 복면까지 써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혹시 비무를 앞두고 긴장한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곧 이어 금목환의 복면에서 나오는 말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생각해봤는데, 기를 쓸 수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조용한 연무장을 둘러싼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무사들이 웅성거렸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기를 쓰게 해달라고 한 것 같은데.”
“애초에 기를 쓸 수 있는 거야? 저 나이에 그러면 훌륭한데?”
“아무리 그래도 좀 위험할 텐데.”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말들이 연무장을 떠다녔다. 당황스러운 건 종리운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하지만 이 비무는 자신의 욕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금목환이 다치면 정말 볼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종리운은 금목환이 기를 쓴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었다. 열두 살이 기를 쓴다라. 이것만 해도 굉장한 성취였다.
“공자는 기를 쓸 수 있나?”
“발현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요.”
“···허.”
종리운은 생각을 바꿔먹었다. 열두 살에 기를 발현할 수 있으면 재능이 있는 게 맞았다. 이 막내 공자는 자만을 한 것도 아니고, 교만하지도 않았다. 그저 재능이 있는 걸 재능이 있다 말할 뿐이었다.
의외기는 하지만, 갈유월을 이길 수 있을까. 갈유월은 무림맹주가 직접 뽑은 제자인 만큼 천재 중의 천재였다. 열 살에 기를 발현하고 열 하나에 일류 둘을 상대할 정도니까.
천재 중에서도 격이 있는 법이다. 종리운은 괜히 후회되기 시작했다. 원래 현(縣)급의 천재들이 가장 절망할 때가 성(城)급의 천재들을 만날 때니까. 그런 감정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 갈유월은 물 만난 고기마냥 얼굴을 아래 위로 퍼덕거렸다.
“저도 좋아요. 사부님.”
“···난 추천하지 않는데. 괜찮겠나, 공자?”
“전력을 다해야 비무의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맞지만.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는 금목환에게 종리운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인다 싶으면 바로 내가 끼어들겠네.”
“네. 그러시죠.”
금목환은 참 간단하고 시원했다. 종리운은 찜찜한 눈빛으로 한참 뒤의 단상으로 갔다.
단상으로 가는 도중, 갈유월이 아주 작게 금목환에게 말을 걸었다.
“야. 이럴 거면 처음에 왜 기를 쓰지 말자고 한 거야?”
“네가 못 쓰는 줄 알고. 나중에 들으니 쓸 수 있다고 해서.”
금목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머리를 숙이고 다리를 털어서 복장을 확인하는 걸 보면 아주 안중에도 없다는 것 같았다. 갈유월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무사 아저씨들도 무서워하는 자신을 또래가 무시한다라.
갈유월은 신선하다는 느낌과 동시에 자존심에 금이 가버리고 말았다.
“너 진짜 크게 다치겠다. 날 원망하지는 마. 난 기를 잘 조절 못해.”
“그럼 내가 이겼네.”
금목환이 답하며 머리를 들었다.
“난 잘 다룰 수 있거든.”
비무가 시작되기 전, 드디어 금목환과 얼굴을 마주한 갈유월은 갑자기 긴장되는 걸 느꼈다.
갈유월이 쳐다보는 금목환의 눈에는 푸른 기가 일렁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