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6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물어볼 때가 됐다. 오히려 지금이 아니면 물어볼 때가 없었다. 우리에게 지금만큼 좋은 기회는 없었다.
곽진도의 눈이 흔들렸다. 형제들의 동요 역시 당연했다. 아버지의 실종은 이제 십 년이 넘은 참이다. 그 동안 우리는 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건 우리 나름의 불문율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걸 오늘 깬 것이다. 곽진도가 물었다.
“그걸 왜 지금 물어보는 것이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제가 가주가 되려고요.”
난 그러면서 사람들을 둘러봤다. 모두가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 당황한 이유는 세가의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뿐 아니라, 전 중원의 사람이 아는 것이기도 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너도 알지 않느냐. 가주와 함께 금인(金印)이 없어졌으니 말이다.”
곽진도는 그것을 지적했다.
우리 세가가 이렇게까지 잠식당했음에도 무너지지 않은 이유. 가주의 도장, 즉 금인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세가의 중차대한 일을 결정할 때 늘 사용되던 금인. 그것은 임의로 만들지 못하게 되어있고, 또 임의로 만들 수도 없었다.
규칙상 금인과 가주가 사라졌을 경우, 이십 년이 지나야 새로 만들 수 있었다. 세력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만약 독단으로 일을 처리하려 했다면, 세가의 일에 관여할 정통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파에서 정통성만큼 중요시되는 가치는 없었으니.
“그러니까 아버지를 찾으려는 겁니다. 아버지가 분명 금인의 위치를 아실 테니까요.”
“···다 좋은데,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단서라도요.”
지난 몇 개월간 곽진도와 지내면서 느낀 건, 그가 황금세가, 황금세가 직계에 대한 애정이 꽤 많았다는 것이다.
무공을 배우면 안 되는 우리 가문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이궁천뢰검법, 심법이라는 무공을 알려주기도 했고, 내 설득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계속 신경을 썼다.
그런 사람이 어째서 전생에 세가에 들어온 적 한 번 없이 밖을 돌아다녔을까. 내가 생각하기엔 가주, 아버지와 관련된 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곽진도의 표정은 내 생각이 정답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잠깐. 이건 좀 얘기를 할 필요가 있구나. 네가 어떻게 가주가 된다는 말이냐. 네 위에 세 명이나 멀쩡히 있는데 말이다.”
말이 나온 건 곽진도가 아닌 금월상 쪽이었다. 나는 갸웃하며 물었다.
“형님, 가주가 되고 싶으십니까?”
“일 년 전까지는 그랬지.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그래서 싸늘하게 지낸 것이 아니냐.”
금월상이 말했다.
“나는 네가 알다시피, 너희들을 위해서 가주가 되려고 했다. 나 혼자서는 노력한다고 했는데, 너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네 부담을 덜어주지도 못했지. 그런 점에서 네가 가주까지 맡으면 너무 힘들지 않을까 싶구나.”
나는 고민했다. 금월상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내 생각을 말했다.
“우리가 핍박받았을 때와는 가주라는 위치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지금같이 세가가 외부의 적을 상대해야 될 상황에서는 가주는 제일 위험한 자리가 될 겁니다.”
곽진도도 이때만큼은 우리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건 온전히 우리 형제들만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때와는 달라진 게 하나 더 있지 않느냐.”
다 들은 금월상이 침착하게 말했다.
“네가 바꿔놓은 우리의 관계 말이다.”
금수린과 금화청은 고개를 숙였다. 금월상이 하려던 말은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했다.
“네가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우리끼리 많은 얘기를 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알게 된 시간이지.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수린이는 내가 사람들을 이끌고 싶어 하는 어린 욕망이 있는 줄 알았다고 했지.”
금월상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런 관계를 회복시켜준 건 다름 아닌 목환이, 너 아니겠느냐. 이번 전쟁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지. 나는 적어도 민망함을 느꼈단다. 너를 보호해야 할 내가 보호를 받고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셔도 되는데요.”
“아니, 그러지 않으면 안 돼. 너를 위해서라도, 나를 위해서라도.”
금월상은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았다. 우리는 그걸 조용히 바라봤다. 금월상의 검에서는 곧 유형화된 기가 크게 올라왔다. 일류의 경지였다.
곽진도도 눈에 이채를 띌 만큼 훌륭한 성취였다.
내가 금화청과 금수린을 바라봤을 때, 그들 역시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가주의 자리라. 사실 가주의 자리는 정통성에 관한 일이었다.
나는 형제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내 눈은 언제나 바깥과 미래를 향했고, 안과 과거를 향해 본 적은 없었다.
오랜만에 답을 내기 어려운 문제를 찾은 것 같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코밑을 쓸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럼 그건 나중에 논의하죠.”
“그래.”
우리는 이제 곽진도를 바라봤다. 곽진도의 눈은 아까보다 훨씬 정돈되어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뭔가 정리한 바가 있는 듯했다.
“···막내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알고 있다.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말이야.”
곽진도가 나를 바라봤다.
“궁금한 게 있다. 목환아, 넌 아버지를 찾고 싶은 거냐, 금인을 찾고 싶은 거냐?”
“당연히 금인 아닙니까. 우리를 버리고 도망간 사람인데. 세가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크게 공헌한 사람 중 하나기도 하죠. 그나마 가주가 있을 때는 호위무사라도 강한 사람 썼지, 없으니까 개판이 난 거 아닙니까.”
대답한 건 뜻밖에도 금화청이었다. 그의 눈에는 어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
곽진도는 침울하게 말했다.
“네 아비의 친구로서 말할 수 있다. 가주가 도망친 건 아니야. 물론 세가가 이렇게 된 것에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전생에서도 아버지는 내가 죽을 때까지도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실종된 건 내가 두 살 때다. 금월상, 금화청, 금수린은 나와 달리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은 있을 터였다. 그들은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모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격화될 조짐을 보이는 그들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일단,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는 알고 있으십니까?”
“···꼭 알아야겠느냐?”
곽진도는 나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말은 사실상 알고 있다고 시인한 것과 다름없었다.
“어떤 문제가 있어도, 저희 아버지의 얘기입니다. 가주를 승계 받기 위해서도, 아버지의 행방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구나.”
곽진도는 납득한 듯했다. 아마 전생이었으면 씨알도 안 먹혔겠지만, 지금의 나이니 설득 당한 것일 테다. 드디어 곽진도가 입을 열었다.
“나는 가주가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형제들은 그 말에 훅 힘이 빠진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안 그러면 곽진도가 전생에서 계속 나돌아 다녔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내 예상대로 곽진도가 말을 이었다.
“대신, 알고 있을 사람을 알지. 무림맹주가 알고 있을 거다.”
나는 살짝 놀랐다. 형제들이 놀란 건 당연지사였다. 너무 갑작스럽게 나온 이름이기는 했다.
이건 내가 전생에서도 몰랐던 사실이다. 무림맹이 내 생각보다 그럼 더 일찍 우리 세가와 연관되어 있었다는 걸까. 나와의 접선은 동맹의 시작이 아닌 연장선상이었던 걸까.
이건 아직까지는 내 예측일 뿐, 물어볼 건 물어봐야 했다.
“무림맹주하고 계속 연락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그건 아니야. 실종됐을 때 상황을 공유 받은 거지. 그때 네 아비는 무형지독에 중독 된 상태였는데, 가면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졌지.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가주가 무림맹에 비밀리에 도움을 요청한 거고, 무림맹이 가주를 안가에 숨긴 거지. 그 안가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몰라.”
형제들은 곽진도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전생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곽진도가 전생에 그렇게 바깥을 돌아다닌 이유도 알 수 있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려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 세가에 안 돌아오신 이유는 금정원 때문이 아니라, 그 독을 해결할 방법을 찾고 계셨던 거군요.”
“맞다.”
무형지독. 독중지왕이라고 불리는 그 극악한 독을 아버지 몸에 넣은 것이다. 그게 자그마치 십 년 전 얘기였다. 안가에 있다는 건 죽었다는 얘기는 아닐 터다. 물론 제대로 살아있는 상태도 아니겠지만.
곽진도가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안 알린 이유는 이해가 됐다. 알아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무림맹은 중원의 균형을 위해서 우리 아버지를 숨겼고, 그걸 최대한 비밀리에 감추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무림맹과 동맹 관계기는 하지만, 그건 가주를 보호하고 있는 목적의 연장선상이야. 목환이가 천주성을 빼낼 건 그들에게도 예상 밖이었을 터. 그래서 목환이에게 동맹을 부랴부랴 제안한 거지. 대신 가주에 대해 알려주는 건 그거와는 별개의 이야기야. 너희들이 가도 할 게 없고, 괜히 비밀이 유출될 수 있으니까.”
곽진도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우려된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럼 설득을 시켜야겠군요. 결국 세가의 안정은 가주의 자리가 명확해져야 되니까요.”
“힘들 거다. 맹주를 만나기도 힘들 것이지만, 맹주를 설득하는 건 그보다 더 어려우니까 말이야. 그 사람은 신산 제갈헌의 말도 반은 거를 정도로 고집쟁이거든.”
그건 좀 의외였다. 그러고 보면 곽진도는 내가 어떻게 지휘권을 가져왔는지 몰랐다. 무림맹주가 남창에 찾아온 것도 당연히 몰랐겠지.
그것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상황이 진행됐고, 고작해야 내가 제안해서 청무대장이 받아들인 정도로 알 터였다.
그러니까 그는 모르고 있던 거다. 난 이미 무림맹주를 한 번 설득시켰다는 것을 말이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지요.”
나는 품속을 뒤적거려서 서한 하나를 꺼냈다. 형제들은 몰랐지만, 곽진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알아챈 것이다.
서한에 있는 봉인이 바로 무림맹주의 직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오늘 아침에 받은 답신이었다. 답신의 내용이 모호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대화로 답신의 내용도 명확해진 셈이었다.
나는 그것을 펴서 보여줬다.
- 내가 세가의 일을 정리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걸세.
서한의 내용에 형제들은 물론이고 곽진도도 할 말을 잃었다.
*
난 바로 무한을 향해 출발했다. 무한은 남창에서 가까워 그렇게 부담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곽진도는 내게 호위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필요 없었다. 지금 우리 세가에서 호위를 할 수 있는 건 곽진도밖에 없는데 그는 지금 무조건 세가에 필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곽진도가 내정을 담당한다면, 내가 외부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 난 지금 일을 하러 가는 거니까. 그래서 지금 내 옆에는 명재희가 끝이었다.
“딱히 너도 필요 없는데. 가깝잖아.”
“너랑 붙어있는 게 임무잖아.”
명재희는 그렇게 말했다. 난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내가 언제 아침에 일어나고, 잠을 자고, 무공 수련을 얼마나 하는지 정도를 기록하는 게 그 정도로 중요하다면. 그리고 그것도 처음에나 열심히 했지, 이제는 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냥 습관 삼아 붙여놓는 것이었다.
그래도 명재희랑 같이 가니까 좋은 점은 있었다. 당연히 나는 강서에서 처음 벗어나보는 것이었고, 기억 속에 있는 전도(全圖)에 의지하여 큰 관도로만 갈 생각이었다. 근데 명재희는 무한으로 가는 지름길을 전부 알고 있었다.
“너 되게 쓸모 있구나.”
“원보 받은 값은 해야지.”
우리는 간장강 유역을 따라 강서를 지났다. 그곳을 쭉 따라가니 장강(長江)의 본류를 볼 수 있었다.
여러 산과 땅 사이를 흐르는 강. 남창 같은 곳에서는 보기 힘든 탁 트인 곳이었다. 강과 강 사이를 건너게 해주는 나룻배나, 상선(商船)들이 드물게 보였다.
장강 유역을 거슬러 올라가니 동호(東湖)로 이어졌다. 이제 완전히 무한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여기가 무한이야.”
지름길을 이용하고, 가끔 경공을 이용하니 내가 예상한 것보다 정말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한 시간보다 반은 단축된 것 같았다.
동호의 부근에는 누각과 객잔들이 많고, 상인들, 여행객이 많아서 왁자지껄했다. 내 나이 또래들도 한창 돌아다니고 있었다.
무림맹의 건물은 무한의 시내 근처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 그 건물이 무림맹 본단인지 못 알아봤지만 말이다.
집중해야 볼 수 있는 작은 현판에, 외벽은 헐어있고 빛이 바래진 건물이 무림맹 본단이라고는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다. 매일 깔끔하게 관리되는 황금세가의 장원과는 정반대였다.
현재 무림맹 상황을 좀 알 법했다. 무림맹은 명분을 찾아서 움직이는 곳이다. 그 말은 돈이 안 되는 일도 명분이 있다면 하는 곳이라는 거다. 그러나 결국 돈이 없으면 저렇게 되는 것이지.
무림맹 정문에는 좌우로 창을 들고 있는 호위무사들이 있었다.
나는 여상우에게 받은 무림맹의 빈객 패를 꺼낼까, 맹주에게 받은 서한을 꺼낼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필요 없었다.
호위무사들은 나를 보면서 바로 허리를 숙였기 때문이다.
“금목환 공자님이시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맹주가 나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