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45화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회의는 빠르게 끝났다. 애초에 강운과 목현학 장로는 황금세가에 얽힌 일을 몰랐으니 질문할 것도 없었지만, 금목환이 할 일을 명확하게 지정해줬기 때문이다.
그걸 보고서야 강운은 정말 금목환이 이 작전을 지휘했다는 사실을 수긍했다. 그의 말에는 틈이 없었다.
“근데 좀 자존심 상하는 걸. 아이의 말을 전달하려고 이렇게 무공을 쌓은 건 아닌데.”
“복귀하는 김에 부탁드린다고 했지.”
“사실상 지시지. 손목은 필요 없으니 이거나 가져다 달라고 했으니까.”
“큭. 그러게 손목은 왜 거나?”
목현학은 한심하다는 듯 웃었고 강운은 마차 위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무림맹 청무대 무사들을 이끌고 무한으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강운은 그 와중에 금목환에게 서한들을 받았다.
하나는 오늘 한 것을 그대로 적은 회의록이었고, 하나는 개인적인 서한이라고 했다.
“그렇긴 해도 일명만뢰한테 심부름을 시키는 녀석이 있을 줄이야. 맹주가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좀 알겠네.”
목현학이 말했다. 여러 마교와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일명만뢰 강운. 지금도 그의 추종자가 많은 와중, 심부름을 시키다니. 대단한 패기라고 할 수 있겠다. 애초에 강운을 몰라서 가능한 걸지도 몰랐다.
하여튼 범상치 않은 아이인 건 맞았다. 청무대장한테 금목환이 맹주 앞에서 지휘권을 어떻게 얻어냈는지 들었기 때문이다.
“맹주가 관심 가질 만한 걸. 따로 약속까지 잡을 정도면 말이야.”
“신산을 소개 시켜주려나. 그러면 그 아이에게는 엄청난 기연이지.”
“그렇지. 뭐, 차기 무림맹 책사가 될 수도 있겠군. 그래도 좀 아쉬운 걸. 저 똑똑함이 무공의 오성 쪽으로 갔으면···”
강운이 입맛을 다셨다. 사람들마다 재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계산을 잘하고, 어떤 사람들은 시를 잘 지으며, 어떤 사람들은 힘이 좋고, 어떤 사람들은 이해력이 좋다.
열두 살에 벌써 전장을 진두지휘할 정도면 엄청난 재능인데, 저게 무공 쪽으로 갔다면 참 대단했을 것이었다.
“그러면 유월이랑 사형제 지간이 됐겠지.”
“유월이 성격에 가만히 안 있을 걸.”
“됐네. 어차피 의미 없는 상상이니.”
목현학이 마차 안에서 드러누웠다. 금목환이라는 아이에 대한 생각은 딱 그 정도까지만 하면 적당했다.
문사는 문사에게 흥미를 느끼고 무사는 무사에게 흥미를 느끼니, 목현학이 관심 없는 것도 당연했다.
*
나머지 자잘한 뒤처리들은 곽진도에게 맡겼다. 어차피 지금은 여유를 가지고 움직일 때였다.
형산파는 싸움이 났다는 사실만 알뿐, 그곳에 자신들도 연루되어있는지 모를 터였다. 곧 조사를 하다보면, 어디서 옹문규가 사라지고, 어디서 옹소후가 사라졌는지 대략 짐작을 할 터다.
그러나 이 넓은 중원에서 사람 찾기, 사람 추적하기는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힘들다. 설사 진상을 파악한다고 해도 한참 뒤늦을 거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 좀 쉬어라.
곽진도는 내게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 나는 연공부였다.
시험해볼 게 많았다. 옹소후와 싸우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그는 나한테 마구잡이로 검기를 썼고, 나는 그것을 흘려내며 찬찬히 관찰했다.
곽진도가 말하기를, 기를 두를 수 있는 건 지학은 되어야 할 거라고 말했다. 그건 절대적인 내공 양의 축적이기 때문에, 웬만한 오성을 가져도 힘들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옹소후가 낭비하는 기를 봤을 때 충분히 나도 가능할 것만 같았다.
어느새 내가 먹은 해모환의 내공이 꽤 내 것으로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썼고, 됐다. 좀 허무했지만 그래도 기를 유형화 시켜 다룰 수 있다는 건 큰 의미가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 초식도 가능할 것 같은데.”
남해십이검의 다음 초식들.
오 초식. 수연만범(水延漫犯).
육 초식. 수세광대(水勢廣大).
칠 초식. 굉해일(宏海溢).
곽진도는 천천히 나가라고 했다. 빠르게 달리면 지나치는 일이 분명히 생길 거라고 했다.
펼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야 천천히 해보라고도 말했다.
난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지나칠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공을 들여서 배우고 있는 건 맞았다.
내가 만약 남해십이검을 형산의 구향검법, 월성검법을 대하듯이 했다면 모든 초식을 써봤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남해십이검은 내 검술의 근간이자 기둥이었고, 잘 쌓아놔야 했다. 혹시나 몇 번 휘두르다가 잘못 몸에 배이면 큰일이었다.
“일단 움직여보자.”
지금 나는 곽진도와 같이 연습할 때의 나와 달랐다.
난 신법을 밟았다. 내가 날 볼 수 없음에도, 내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검에 푸른 기가 맴돌았다. 기의 색깔이 뚜렷해질수록 펼칠 수 있다는 확신이 짙어졌다.
*
종리운은 강운 장로에게서 두 개의 서한을 받았다. 하나는 회의록이었고, 하나는 금목환의 서신이었다.
공과 사 중에 중요한 것은 공. 종리운은 먼저 회의록을 뜯었다.
“음.”
역시 지난번에 보여준 통찰력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듯, 이번 회의에서도 훌륭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형산파가 정보가 느린 상황부터 중원의 관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부터 황금세가는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그 중에서도 백미는 마지막에 무림맹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사실 금목환이 무림맹의 차후 행동에까지 제시를 하는 건 오지랖일 수도 있었고, 괜히 불쾌감을 살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허허. 무슨 신산이 쓴 서한 같군.”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불쾌감을 표할 수 없었다. 금목환은 현재 무림맹이 구파일방에 비해 운신폭이 좁은 상황과 더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종리운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무림맹의 책사, 신산 제갈헌에게서나 받아봤었다.
“재밌군.”
종리운은 흡족해하며 다음 서한을 뜯었다. 금목환의 사적인 서한이라고 했다. 솔직히 종리운은 공적인 서한보다 이게 더 기대가 됐다.
중앙에 있는 봉인을 뜯고 종리운은 서한을 확인했다. 그 내용을 확인한 종리운의 미소가 짙어졌다.
- 세가가 정리되는 대로 찾아뵙겠습니다.
빽빽했던 아까의 서한과는 달리,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종리운도 붓을 들었다. 이 재미있는 꼬마한테 답신을 보내야 했다.
*
나는 수련을 하면서 곽진도에게 가서 매일 어떻게 되는지 확인했다. 일은 빠르게 처리되고 있었다.
천주성, 형산파, 주산파의 사람이 빠진 이상 물갈이는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이런 급물살 속에서 한 발 얹고 있던 군소방파들은 대다수가 도망가는 걸로 정리되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을까, 곽진도가 우리 형제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고 보면 난 형제들에게는 관심을 거의 안 준 셈이었다.
형제들도 각자 할 일이 바빴을 터였다. 사람들이 물갈이 되는 건 직계 거처를 제일 신경 썼어야 하니까.
불러 모은 곳은 금정원의 지하에 있는 회의실이었다. 내가 들어가니 아직은 곽진도 밖에 없었다.
“금정원이 싹 비었군요.”
“그 많던 돈벌레들이 사라진 셈이지.”
“그렇네요.”
장로들은 황금세가를 노리는 대표적인 인물들이었으니까. 이제 남은 건 거의 없었다.
전에는 제일 불편한 공간이었지만, 반대로 제일 편한 곳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다른 장로급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다니, 감사할 일이네요.”
“원래 그들은 세가에 고마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 정도로까지 일이 처리되면 원주들도 몸을 사릴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그렇죠.”
전에 이청명 장로의 징계안을 처리해준 원급의 장로들, 총표두들을 비롯한 우리 세가의 터줏대감들. 그들이 사렸던 이유도 어느 정도는 이해 되니까. 일신의 무공 수준도 그렇고, 구심점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를 당장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세력들이 사라지기도 했고, 곽진도라는 구심점이 생겼으므로 그들도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가문의 뒤처리를 얘기하고 있자, 슬슬 한 사람씩 회의실로 들어왔다.
맨 먼저 금화청이 들어왔고 그 다음 금월상, 금수린이었다.
“오셨군요. 형님들, 누님.”
“그래. 오랜만이다.”
뜻밖에도 제일 먼저 인사를 답해준 건 금화청이었다. 그리고 바로 얼굴을 돌렸지만.
그 이후 금월상과 금수린하고도 인사를 나눴다.
그들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들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난 움직이느라 바빴으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금월상은 북서쪽을 담당하고 있던 세가 표사와 호위무사들로 이루어진 부대의 대장을 맡고 있었다고 하고, 금화청과 금수린은 곽진도가 무인들을 지휘할 때의 행정 공백을 메웠다고 했다.
곽진도의 말을 들어보면 오히려 자신보다 깔끔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해보면 우리만큼 준비된 행정 자원들은 없는 셈이다. 어릴 적부터 갇혀서 그런 것만 공부하고 자랐으니 말이다.
“모두들 왔구나.”
곽진도가 말했다. 나를 포함한 형제들의 눈빛이 곽진도에게로 집중됐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우리를 하나씩 둘러봤다.
“모두 고생 많았다.”
나는 그 말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형제들은 어렴풋이 알고 있을 터였다.
형제들은 그 어렴풋함의 정체를 빨리 확인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깃발을 멘 건 금월상이었다.
“세가는 탈환되었습니까?”
곽진도는 잠깐 말의 호흡을 늦춘 다음 답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형제들의 표정은 내 예상과는 좀 달랐다. 모두가 행복해하며 즐거워할 줄 알았지만,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멍하니 있었다. 금수린은 울기까지 했다.
나도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상상도 못 했을 터였다. 내가 전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포기하면서 살았을 터다.
그런데 이렇게 바뀌어버렸다. 자신을 감시하던 눈빛, 경시, 비하의 눈빛을 안 봐도 되는 것이다. 그 상황을 아직 체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막내가 정말 대단한 일을 했구나.”
금월상 역시 목이 살짝 잠겨있었다. 곽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너희들이 모르게 행동했던 일도 많을 거다. 이렇게 빨리 정리될 줄 알고 있었다면, 나 역시 세가로 빨리 돌아왔을 거다.”
곽진도가 잠깐 말을 끊은 다음 다시 이었다.
“나 역시,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너희를 방치했다는 것에 책임이 없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너희들에게 미안하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곽진도가 사과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난 미래에 관한 지식을 알고 있었다.
사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이청명을 이용해 천주성을 빼낸 것이었다. 천주성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면 절대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곽진도에게 남아있는 선택은 당연히 외부를 돌아다니는 것이었겠지.
그는 세가의 충신이고, 내 입장에서 고마운 사람이었다.
“외총관님의 몫이 컸습니다.”
“아니. 이건 누가 뭐래도 네 몫이다. 이걸 부정하는 건 오히려 나를 더 창피하게 만드는 일일 테다.”
전생의 곽진도는 우리 세가를 위해서 계속 뛴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우리들은 아무 말 없이 잠시 있었다. 서로에게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 우리에게 남은 과제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고작 산 하나를 넘은 셈이었다.
이제 이 사실이 중원에 알려지면 구파일방을 비롯한 사람들이 황금세가에 더욱 압박을 넣을 터였다. 그걸 막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게 많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내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
“그래.”
“이제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곽진도는 내 눈빛에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직감적으로 내가 뭘 질문할지 아는 듯했다.
“···말해봐라.”
나는 곽진도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