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이제 알겠다
44화 이제 알겠다
옹소후는 한 쪽 눈을 부릅뜨면서 금목환을 바라봤다. 현재 그의 모습은 왼쪽 눈동자 중심을 횡으로 쭉 갈린 모양새였다. 더 깊이 파였으면 뼈까지 베일 뻔했다.
‘어떻게 안 걸까.’
옹소후는 몰랐지만, 금목환은 옹소후가 전장에서 벗어날 때부터 계속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추적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옹소후에게는 중요한 건 아니었다. 단지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단독으로 나왔다는 게 중요했다.
이건 기회였다. 물증을 가져갈 수 있는 기회. 옹문규의 죽음을 복수해서 금목환의 목을 가져간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중원에 조금 소란이 있겠지만, 그냥 아무 성과도 없이 아버지에게 갈 수는 없었다.
“너, 그 일검으로 나를 못 죽인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옹소후가 구향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금목환은 희한한 검로를 쥐었다. 옹소후는 견식이 짧아서 어떤 무공인지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게 남해십이검이냐?”
“아니.”
“그럼 죽어라!”
옹소후는 기습적으로 선수를 날렸다. 각이 큰 곡선의 쾌검이었지만 옹문규의 검보다는 훨씬 빨라서 마치 뱀이 나는 듯했다.
금목환은 검면의 뒤를 손으로 대면서 막았다. 챙, 소리가 나면서 금목환의 작은 몸이 밀렸다.
옹소후는 계속해서 몰아치려고 했다. 막으면서 뒤로 갔으니, 무게중심은 분명히 뒤로 쏠려가고 있을 터였다. 그 틈을 놓치기는 싫었다.
바로 회안보를 펼치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몸이 움직이는 데 풍압이 생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발이 채 땅에 닿지도 않는 데 다음 발을 옮기는 듯했다.
‘됐다.’
옹소후는 금목환의 등을 점한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최소 지금쯤이면 허리의 반은 돌아있어야 검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검이 금목환의 목이 있던 곳을 빠르게 베어나갔다. 옹소후의 눈이 번쩍 떠졌다. 피육을 가르는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격 실패는 곧 수비의 차례라는 뜻이었다. 옹소후는 반사적으로 검을 일자로 세웠다.
금목환은 뒤를 안 돌아보고 앞으로 허리를 약간 숙인 채로 피하는 걸 선택한 것이었다. 금목환은 그 다음 바로 몸을 돌리는 회전력으로 검을 뒤로 베었다. 옹소후의 발목을 향하는 검로였다.
그 검격은 날카롭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옹소후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사실 이 한수로만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옹소후의 경지는 일류, 금목환은 모르긴 몰라도 옹문규와의 싸움에서 기를 발출하지 않았다. 물론 옹문규를 이겼으니 최소 이류는 되겠지만, 약관 이전의 나이는 무공 수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소였다.
실제로 옹소후와 옹문규는 비무를 자주했고, 늘 옹소후가 쉽게 이겼다. 옹문규가 더 재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녀석 한 수가···”
옹소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뒤에서 몸을 돌리고 있는 금목환의 왼쪽 눈을 마주쳤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순식간에 금목환의 신형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목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발목은 허초였고, 금목환의 목적은 뒤를 잡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신법이었다. 좌우로 흔들리며 사라져서 어디 쪽으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옹소후는 간신히 검을 등 뒤로 돌려서 막았다. 그때 알아챘다. 옹문규와의 비교는 할 수 없는 재질이라고.
바로 옹소후는 기를 발출했다. 기를 발출함과 못 발출함은 차이가 컸다. 같은 합을 주고받아도 내공이 밀리는 쪽은 지속적인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푸른 기가 옹소후의 검에 둘러졌다. 금목환은 땅을 두 발로 모아 박차고 멀찍이 뒤로 물러났다.
그것을 본 옹소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직 기를 못 쓰는군?”
금목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건 곧 수긍이나 다름없었다. 옹소후는 푸른 기를 담은 검으로 구향검법을 펼쳤다.
옹소후의 검형구향이 금목환의 아홉개의 혈맥을 노리며 뻗어나갔다.
투투투툭.
금목환은 신법도 아닌 걸음으로 한 걸음 나아가 검을 내지른 후 휘저었다. 마치 장난감 목검을 다루는 아이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옹소후는 그 모습에 웃을 수 없었다. 그 휘저음이 공교롭게도 아홉 개의 검로를 콱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이건 파형검법(破衡劍法)이라고 하는 무공이야.
그때 금목환이 입을 열었다. 아마 아까 남해십이검이냐고 물어본 것에 대한 대답인 듯했다.
”내가 대종사지.“
다시 금목환의 신형이 흔들리고 사라졌다. 옹소후는 순식간에 앞으로 나타난 금목환의 모습에 경악했다. 바로 검을 세워 막았지만, 그 검은 역으로 형산의 검결을 이용해 감아서 들어왔다.
“이런 미친!”
옹소후는 바로 피했지만 뺨에 칼이 스치는 건 막지 못했다.
금목환은 계속 옹소후 기준 왼쪽으로 돌면서 시야가 부족한 부분을 공격했다. 옹소후는 쩔쩔 메면서 뒤로 물러났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건 본인들이 내는 초식이 순식간에 파훼된다는 것이었다. 부딪쳐서 파훼하는 게 아니라, 뿌리부터 뽑고 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사술을 쓰는 구나! 쓰레기 같은 놈!”
옹소후는 바로 일갈을 내질렀다. 금목환은 대답도 하지 않고 검격을 계속 날렸다.
옹소후는 악에 받쳐 검을 기에 가득 담고 허공에 뿌려댔다. 금목환도 기와 맞상대하지는 않고 신법과 칼등으로 최대한 흘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금목환이 입을 열었다.
“기 쓰는 법. 이제 알겠다.”
순식간에 금목환의 칼에 푸른 불꽃이 돋아났다. 푸르게 날선 기가 옹소후의 심장을 향해 빠르게 돌진해갔다.
솨악!
뺨이나 눈을 베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피가 솟구쳤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한 옹소후의 머리가 풀밭을 굴렀다.
*
난 옹소후의 머리를 챙겼다. 물이 새지 않게 가죽으로 만들어진 주머니 안에는 누런 약물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명재희에게 받은 금령수(擒靈水)였다. 이 누런 액체에 담아두면 시체가 부패하지 않고 오래 유지됐다.
가죽주머니의 입구를 단단히 조인 다음 봉했다. 이건 누군가에게 선물로 갈 예정이었다.
나는 일을 마치고 대전으로 돌아왔다. 여기 전투도 거의 끝난 듯했다. 곽진도는 창밖으로 담벼락의 보수, 수리 등을 지휘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내적인 일은 응당 황금세가의 외총관이 할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황금세가의 외적인 일을 맡고자 했다.
그때 복도가 꺾인 곳에서 여상우가 불쑥 튀어나왔다. 가끔 까먹지만 이 자도 비연각 소속. 경공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사람일 터였다.
지체할 건 없었다. 난 바로 물었다.
“전투는 어땠습니까?”
“압승이었지.”
“다행이군요.”
“알고 있었을 거 아닌가?”
갑자기 훅 들어오는 여상우의 질문에 난 잠깐 멈춘 다음 답했다.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무한에서 남창으로 가는 무인의 도착시간을 맞추는 자가 무슨 겸손인가.”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없이 배운 특기다. 아마 전 세가, 문파를 뒤져봐도 이런 특기를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보통 책략가들은 앞에 나서서 공개된 정보를 취합하여 의사결정을 하니까. 나는 암실에만 갇혀있다 보니 매일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댔다. 예를 들어 호남에서 운남까지의 병력 이동 시간을 물어보면 바로 대답했어야 했으니까.
늘 느끼지만 이 두 다리로 걷고, 하늘 아래서 공기를 마신다는 건 참 놀라운 일이었다.
“뭔가 회한에 찬 눈빛이군.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자네는 열두 살이 맞나?”
“네.”
곧 건물 바깥에서부터 와글와글한 소리가 옮겨져 왔다. 병력을 정리한 청무대 사람들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때 여상우의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비연각주!”
나보다 몸집이 큰 여상우의 바로 뒤편이었기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의 연륜으로 보나, 여상우에게 하대를 하는 걸 보나 장로인 게 분명했다. 특이사항으로는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있었다는 점이다.
여상우가 뒤를 돌아보며 껄껄 웃었다.
“아, 장로님. 정말 덕분에 살았습니다.”
“나보다는 자네가 한 게 훨씬 많지. 언제 그런 책략을 배워온 건가?”
갑자기 장로는 여상우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마구 쏟아댔다.
“기가 막힌 전략전술이었어. 여기서 총사령관을 맡을 자가 자네밖에 없지 않나. 곽진도 그 친구는 전략을 짤 머리가 아니고.”
“그···”
“군진에다가 무인들의 진을 붙이는 미친 작업을 하면서, 서로 상충이 안 나게끔 거리 조절을 했다라. 비연각주가 요즘 잠잠하다 싶더니 한 건을 해주는군.”
“아니, 그게···”
여상우는 말하려 했지만, 일 층에서 장로를 따라오던 청무대원들도 그렇게 알고 있는 듯 환호했다.
“감사합니다! 비연각주님!”
“기가 막힌 진법이었습니다.”
그쯤 되서는 여상우가 그들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 그만하게. 이번 일은 다 막내공자가 계획한 거라네. 진영도, 전략도, 전술도, 장로들을 부른 것도, 그냥 이번 전투 자체가 이 친구 계획이니까.”
여상우가 그렇게 말하며 왼쪽으로 한 발 비켰다. 나도 그제야 시야가 트여서 장로라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얗게 샌 머리를 질끈 묶은 아저씨, 옷에 피와 먼지 등 전투의 흔적들을 명백하게 묻혀온 청무대원들의 눈이 모두 내게로 향했다.
“···하하.”
누군가의 입에서 그런 실소가 나왔다.
“이런 꼬마가 총사령관이라고?”
청무대원들은 자신보다 높은 비연각주의 말이었으니 눈치를 봤지만, 장로는 그럴 사람이 아닌 모양이었다.
“허허. 이번 해 들은 농담 중 가장 재미있군.”
장로는 내게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쭈그려 앉았다. 멀리서 볼 땐 그렇게 안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잔주름이 많았다.
“아이야.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금목환입니다.”
“나는 강운이라고 한다. 강호에서는 일명만뢰라는 별호로 불린단다.”
장로의 입에서는 그런 말이 나왔다. 잠깐 정적이 감돌았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반갑습니다.”
내 반응보다 격한 건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청무대원들의 반응이었다.
“아니, 어떻게 강운 장로님을 모른단 말인가···”
“강뢰도법이 나름 멋있어서 아이들은 거의 다 알지 않던가?”
난 그 얘기를 들으며 알았다. 여기 앞에 있는 장로는 나름 중원에서 유명한 무인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강운을 바라보자, 강운은 도리어 자기를 몰랐던 게 민망했는지 주제를 돌렸다.
“그래. 여기 이 아저씨의 말대로 네가 한 게 맞느냐?”
강운은 아주 날 전투에 공을 세우고 싶은, 어린 아이처럼 여겼다.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난 사실을 얘기했다.
“네.”
내가 이렇게 대답할 줄 몰랐다는 듯 장로는 뒷머리를 긁었다. 꽤 난처한 모습이었다.
“거짓말하는 아이는 나쁜 아이인데 말이야.”
“장로님. 맞습니다. 맹주님께 여쭤보시죠.”
대답을 한 건 내가 아닌 일 층의 뒤에서 올라오던 청무대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천지약과 성유범은 내가 총지휘관인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대원들한테 여기 막내공자가 지휘관이라느니, 같은 말은 안 한 듯하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문제는 장로가 아직도 못 믿는다는 것이었다.
“참나. 뭔 농담을 이렇게 하는지. 이 꼬마가 진짜 지휘관이면 내 손목을 내놓겠네.”
나는 이 상황이 빨리 끝났으면 했다. 당장 할 일이 모두 처리된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불행히도 이것만은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처리는 다행히도 청무대장이 대신 해줬다.
“저 친구가 작전을 짰다는 말에는 제 칼을 걸어도 됩니다.”
칼을 걸겠다는 말이 나오자 장로의 눈빛이 그제야 가라앉았다. 그리고 날 바라봤다. 가만히 이 상황을 구경하던 청무대원들도 나를 바라봤다.
그들의 눈 안에는 똑같은 아이가 비치고 있을 텐데 그들의 표정은 사뭇 달라져있었다.
분명 전투는 압승을 했는데, 표정만 보면 다들 대패한 것만 같았다.
아무튼 나에게는 상황이 끝났다는 게 중요했다.
“뒤처리에 대해 논의할 게 있습니다. 잠깐 얘기들 좀 하시죠.”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