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형산을 칠 수 있겠군요
40화 형산을 칠 수 있겠군요
금목환과 명재희는 다시 황금세가로 돌아갔다. 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지휘관으로서 준비를 할 게 많다고 했다. 그에게는 가문이 걸린 일이었다. 종리운은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충격에 대한 여운은 여전했다.
“정말 반로환동한 고수가 아닙니까?”
성유범도 나가고, 지금 방에는 종리운과 천지약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중앙에는 먹칠이 된 지도가 있었다.
“정순한 내기가 느껴졌어. 적은 양이지만. 뭔가 도가 쪽이기는 한데, 처음 보는 성질이란 말이야. 그렇다고 후배한테 무공의 근원을 캐묻는 무뢰배 짓을 할 수도 없고 말이야.”
“···맹주님이 처음 보는 성질의 내공도 있습니까?”
천지약은 못 믿겠다는 눈빛을 해보였다. 야인(野人) 출신으로 검존의 길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봤겠는가. 내공만 부딪쳐보면 어떤 문파의 어떤 무공인지 확실히 알 터였다.
그런데 그런 종리운이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금목환이라는 녀석은 무슨 귀신이라도 되는 것인지, 두 눈으로 안 보면 믿지 못할 일들만 잔뜩 던져두고 갔다.
아무리 종리운이 칠존이고, 대선배라고 하더라도 무공의 근원을 캐묻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혹시 그냥 병법이 좋아서 주구장창 공부한 아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조금 설명이 됩니다.”
천지약이 말했다. 종리운은 잠시 생각해봤다. 사실 그게 제일 현실적인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종리운은 그건 직감적으로 아니라고 느꼈다.
“그건 아닌 듯한데. 그렇게 재미로 공부했으면 야사(野史)나 파게 되지, 저렇게 정석에 통달하여 변용을 줄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해.”
“···그건 그렇습니다.”
“일이관지야. 저 나이에 저렇게 꿰뚫는 게 있으면 분명 무언가 더 가지고 있는 거야. 비연각주한테 포상이라도 내려야겠군.”
종리운은 흡족하게 웃었다. 천지약도 믿기지가 않을 뿐, 금목환이 인재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무림맹에 온다고 하지도 않았는데요.”
“그래서 마지막에 얘기하지 않았나.”
금목환이 종리운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말할 때, 천지약은 당연히 돈이라고 생각했다.
무림맹이 재정도 넉넉치 못하니까. 황금세가에서 돈을 주면 얼마나 그림이 좋은가. 허나 종리운은 다른 말을 했다.
- 자네의 시간을 사지.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한 번 다시 보자고.
금목환은 당연히 수긍했다. 그에게는 전혀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때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지금도 검존을 보고 싶어 하는 검사들과 무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검존이 보고 싶다고 약속까지 걸어놓은 어린 아이가 있다니. 그들이 들으면 대성통곡 할 일이었다.
종리운은 천지약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모르고 명령을 덧붙였다.
“목 장로하고 강 장로 지금 쉬고 있지?”
“···두 달 걸린 길림성 임무 마치고 어제 막 복귀 신고했을 겁니다.”
“지금은 쉬고 있는 거 맞지 않나.”
종리운의 말에 천지약이 할 말을 잃었다. 두 장로들이 이렇게까지 구를 사람들은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구파 중 하나로 갔다면 빈객 취급을 받고 있을 무인들이었다.
그리고 그걸 떠나서 황금세가의 일에 그 두 장로를 보낸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과한 처사처럼 느껴졌다.
“맞습니다.”
“황금세가로 둘이 가라고 하면 되겠군.”
천지약은 그 명령에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물론 그 친구가 인재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데려올 가치가 있는 친구입니까? 당장은 맹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요.”
“당장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야.”
종리운은 단칼에 대답하고 천지약을 바라봤다. 천지약은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종리운이 단순히 감정에 이끌려 판단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종리운이 내비치는 눈빛은 지독히 냉철했다. 내공을 전혀 풍기지 않는데도 천지약이 바짝 긴장할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맹주님의 판단을 의심했군요."
"아니네. 입에 발린 소리만 하는 것보단 나아."
종리운은 고개를 숙인 천지약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제 무림맹도 횃대에 앉아있을 수만은 없겠군.”
*
주산파 장문인, 동용극(東龍戟)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형산의 장남, 옹소후가 와서 동맹을 제안한 것이다.
사실 주산파의 목적은 황금세가를 삼키는 게 아니라 떼어먹는 것이었다. 그것도 조금.
흑도에서 오래 구른 동용극은 직감적으로 그걸 알아차렸다. 많이 먹으면 탈이 날 수도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본인들의 세력이 커졌고, 천주성은 빠져 형산파와 양분을 하는 세력이 된 거다. 동용극이 주산파를 만들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제 주산파는 흑도 문파하면 손에 꼽힐 정도의 거대한 문파가 됐다.
마치 지난날의 고생이 보상받는 것 같아 감동적이기도 했고, 기분도 좋았지만 지금 여기서 내색할 수 없었다. 옹소후가 뻔히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용극은 최대한 기쁨을 내색하지 않고 위엄을 갖추며 말했다.
“그럼 형산에서는 홍백규(洪栢奎) 장로가 직접 나온다는 말이오?”
“황금세가를 확실히 먹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운봉검(雲峯劍) 대협이 온다면 황금세가가 확실히 손에 떨어지겠군.”
형산파 초절정고수이자, 형산삼절(衡山三絶) 중 하나가 아닌가. 일설에 의하면 형산삼절은 이미 전성기가 지난 남악검군 옹진수를 뛰어넘었다고 했다.
“이렇게 확실한 길이 있었는데, 우리도 참 바보 같소.”
“그렇습니다. 저희 아버지, 아니, 장문인께서도 주산파와의 연합을 꽤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허허. 여지까지 동상이몽(同床異夢)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수어지교(水魚之交)였단 말이군.”
반대로 억지로 문자를 쓰려고 노력하는 동용극을 보며 옹소후는 토악질이 나올 뻔했다. 이딴 흑도 무뢰배들과 섞이는 건 말도 안 됐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에서는 최선의 방법이다.’
형산파가 참전한다는 거짓말을 하고, 주산파를 충동하여 황금세가를 먹는다는 작전이었다. 운봉검 홍백규는 당연히 허풍이었다. 지금 형산 안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말한 까닭은, 주산파도 그에 상응하는 무력을 보내라는 뜻이었다.
동용극이 아무리 천박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어도 장강수로채에서 구르다 나온 절정고수였다. 지금 옹소후가 부릴 수 있는 최선의 패.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였다. 옹소후는 동용극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무공이 고강하긴 하지만, 얼마나 멍청하면 형산에 사람을 직접 보내지 않고도 이 말을 덥석 믿는다는 말인가. 물론 동용극은 자신이 형산의 장남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는 했지만 너무 부주의했다.
“자. 이게 저희의 제안입니다. 장문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옹소후는 은근한 눈빛으로 동용극을 바라봤다. 동용극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운봉검이 나온다는데, 이쪽도 급을 안 맞출 수 없지 않겠소. 내가 직접 나서리다.”
옹소후는 그 말에 뛸 듯이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들은 허름한 형산의 무인들을 볼 것이다. 황금세가로 침투한 몇몇과 자신.
그들은 운봉검은 어디 있고, 왜 이렇게 사람 수가 적냐고 물어보겠지만 그건 대충 에둘러 대답하면 됐다. 중요한 건 황금세가의 함락이었다.
일은 이미 너무 커져버렸다. 옹소후는 여기다 목숨을 걸을 각오를 했다.
*
금정원의 회의실. 곽진도와 여상우, 내가 모여 있었다. 서로 각자 맡은 일이 있었고, 그걸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먼저 보고한 건 여상우였다.
“주산파는 지금 안탕산 부근일세. 아마 삼 백명 정도 될 것 같은데, 주산파의 정예들이 많아. 아무리 무림맹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병력이라네. 또 형산이 추가적으로 얼마나 많은 무인들을 보내올지 모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객관적으로 상황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주산파가 안탕산(雁蕩山) 부근이라. 내 예상보다 속도가 조금 빨랐지만 괜찮았다. 나는 주산파와 형산파와의 협상이 좀 길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생각보다 속도가 빠르군요.”
“그러게 말일세.”
“근데 동용극이라는 자가 고수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계속 잠행을 붙이는 게 가능합니까?”
“비연각의 신법은 강호 일절이야. 황금세가에서 얼마를 제시하더라도 못 주지.”
“···아. 그렇군요.”
나는 괜히 곽진도 쪽을 바라봤다. 저렇게 신법에 자신감이 있는데,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떠련지. 난 빠르게 주제를 돌렸다.
“형산은 어떻습니까?”
“아마 황금세가 내부에 있는 인원들이 전부야. 장로들까지 합치면 한 삼십 명 정도. 외부에서 쳐들어올 때 호응하는 역할을 할 거야. 성동격서나 양동이나.”
“그러라고 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여상우는 내 목소리에서 내 뜻을 알아채고 픽 웃었다.
지금 안에 있는 형산 사람들은 살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손바닥 안에서 노는 셈이다.
아직도 형산은 오만하여 자신들의 정체가 들통 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황금세가의 눈과 귀는 탈환한지 오래였는데도 말이다.
“그 자존심 높은 형산이 어쩌다 주산파랑 붙어먹는지. 남악검군이 늙어서 구파일방에 대한 욕망이 사라졌나보군.”
여상우가 말했다. 난 무림의 역학까지는 잘 모르니 물어봤다.
“형산이 구파일방에 대한 욕구가 강한 모양이군요.”
“거의 미쳐있는 수준이었지. 얼마나 노골적이었으면 남악검군이 소림사 방장(方丈) 진권(眞權)의 불알을 핥았다는 얘기까지 나오겠는가.”
“그래서 황금세가를 먹으려고 하는 거야. 금력으로 어떻게든 발라보려고.”
곽진도가 혀를 차며 말했다. 나는 잠깐 머리를 굴리고 결과를 냈다.
“이건 완전히 형산파와 주산파의 동맹이라고 보기는 어렵군요.”
“무슨 소리냐?”
아마 형산파는 이렇게 움직였을 거다.
형산파가 황금세가로 들어왔을 때의 계산은 황금세가를 접수해서 평판이 깎이더라도 돈으로 충당하려는 마음이었을 테다.
앞뒤 순서는 모르겠지만, 너무 많은 군소문파들과 천주성, 주산파 같은 흑도 거물들도 엮이게 되니 상황이 애매해진 거다.
그런데 지금 딱 천주성이 꿰차고 있던 세력이 공석이 되어버렸고, 옹문규가 죽었다는 명분까지 있는 마당에 주산파랑 규합한다니. 차라리 단독으로 먹었으면 먹었을 테다. 옹진수가 진짜 소림사 주지의 불알을 핥았다면 단독으로 먹을 생각도 안 했을 거고.
그렇지만 이미 주산파와 형산파의 결합이라는 결과는 나왔다. 그건 누구의 최선인가?
“정확히 말하면 옹소후와의 동맹이군요.”
결론이 났다. 이건 자신의 실책을 덮으려는 옹소후의 단독 행동이었다.
생각해보면 형산파와 주산파가 협의를 빨리 끝낸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서로 오랜 시간을 들인 작전이고, 서로가 더 가져가려고 싸울 게 분명한데 바로 협의가 됐다.
여기서 옹소후는 주산파에게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밀었을 거고, 주산파는 의심하지 않고 받았을 거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니까 벌써 주산파의 병력이 안탕산까지 와있는 거다. 그렇게 따지면 그건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고려하고 있던 형산의 본 병력은 없다는 셈이 되니까.
나는 이걸 그대로 사람들에게 설명했고, 곽진도와 여상우도 눈빛이 가늘어졌다.
“한결 쉬워지겠군. 어차피 우리만으로 형산의 뿌리를 뽑기는 힘드니 말이야.”
곽진도는 그렇게 말하며 흡족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형산에 이름 난 고수들이 남악검군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역사가 있는 만큼, 그들도 고수들이 많다.
허나 곽진도와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이었다.
“여유가 생겼으니, 형산을 칠 수 있겠군요.”
그 말에 곽진도는 물론이고 여상우도 대경실색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가 도와주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무림맹과 형산은 같은 정파야. 우리 조직은 정파 간 갈등을 막는 게 목적인데, 어찌 싸울 수 있겠는가?”
“괜찮습니다. 원래 진정한 승리는 피가 없을 때 나오는 거니까요.”
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준비한 게 좀 아깝기도 하고요.”
주산파와 형산파를 동시에 고려하여 준비해놓은 게 많은데, 주산파만 부수면 김이 좀 빠지지 않겠는가.
여상우와 곽진도가 말문이 막혀있을 때,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기척이 없고 문을 안 두드린다,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명재희였다.
명재희의 뒤에는 다섯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들이 하나씩 방의 빛에 비치기 시작했다. 형산의 삼대제자들이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눈빛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또 하나의 준비가 마쳐진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