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또 어디를 들어오시렵니까
39화 또 어디를 들어오시렵니까
나는 작전소 건물에 들어오면서 느꼈다. 여기에는 절대고수가 있다고. 내가 아는 고수의 기준은 곽진도다. 그에게서 가장 강렬한 기운이 보였으니까.
그런데 이 건물 안에서는 곽진도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압도적인 기운이 떠다니고 있었다.
같이 감각이 예민한 명재희는 눈살만 좀 찌푸리고, 성유범은 아무 이상 없어 보였다. 제일 예민한 나만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내가 맹주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 무림맹이 작전하는 구역에 분장을 할 수 있는 사람, 곽진도보다 강한 사람.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키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무림맹주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리 강호에 대한 상식이 없어도 이 사람은 알 수밖에 없었다.
칠존(七尊)의 일익. 용상검(龍翔劍) 또는 검존(劍尊)이라고 불리는 종리운.
“재밌는 친구로군.”
종리운은 인피면구를 뜯어냈다. 계속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고정되어 있던 것도 인피면구 때문이었다.
인피면구 속의 얼굴은 이립을 갓 넘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젊어 보였다. 분명 지금쯤이면 검존이 지천명이 넘은 나이였다.
“검존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황금세가의 금목환이라고 합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내가 전생에서도 지금 생에서도 잘하는 게 있다면 예의범절이었다. 허구헌날 박혀서 그런 교육만 받았으니까 말이다.
내가 인사를 할 때도 명재희와 성유범은 여전히 빠져나간 넋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스읍.”
청무대장이 그렇게 대놓고 눈치를 줘야 깰 정도였으니. 명재희와 성유범은 벌떡 일어났다.
“청무대 부대장 성유범입니다.”
“그래. 자네는 예전에 날 봐놓고도 왜 그렇게 당황을 하나? 분명 청무대 격려할 때 갔었는데.”
“···그, 그게 너무 예상치 못하게 나오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종리운은 그저 껄껄 웃었다. 그 만사가 똑 부러지게 움직일 것만 같던 명재희도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내가 원보를 줄 때 빼고는 저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매, 맹주님. 영광입니다. 비연각 은영조 명재희입니다.”
“그래. 각주한테 얘기는 들었다. 아주 인재라지.”
“···아, 아닙니다.”
명재희가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이는 장면은 꽤 장관이었다.
나도 슬슬 미와 추의 기준을 알아가는데, 확실히 명재희는 예쁜 쪽에 속했다. 아직 너무 어려서 귀여워 보일 뿐이기만 하지.
종리운은 껄껄 웃더니 굽었던 허리마저 폈다. 축골공까지 썼던지 오 척에 불과했던 키가 칠 척까지 컸다.
“부하들도 있지만, 처음보는 친구들도 있고, 외인(外人)도 있으니 인사를 해야겠군. 무림맹이라는 집단의 수괴인 종리운이라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수괴라니요.”
청무대장은 딴지를 걸었지만 종리운은 무시를 해버렸다. 그 이후에 청무대장도 자신을 천지약이라고 소개하고, 부대장도 다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물론 난 그들보다 종리운에게 은근슬쩍 눈이 가있었다.
중원에서 추앙받는 칠존의 일원. 이 사람이 어떤 성향을 가졌냐에 따라서 앞으로 내가 갈 길이 많이 달라질 터였다.
종리운은 슬쩍 웃으며 서두를 꺼냈다.
“그나저나 그 진법이 꽤 나오기 힘든 걸로 아는데, 너무 빨리 나온 것 아닌가. 평균 두 시진이라고 들었는데. 안 그런가, 부대장?”
갑자기 대장 말고 부대장 쪽으로 향하는 느닷없음에 성유범의 눈동자가 얼었다.
“마, 맞습니다.”
“진법에 이상이 있었을 확률은?”
“겉으로 보이기에는 없었습니다. 또한 청무대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진법이니까 실수했을 확률은 현격히 낮습니다.”
“그러면 그냥 실력으로 통과했다는 거군?”
“일반 아이라면 통과하기 힘들었겠지만, 아무래도 진법, 탈출에 일가견이 있는 비연각 소속이 있다면 아무래도···”
성유범은 말을 끌었다. 종리운은 그 대답만으로도 만족한 듯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귀로 흘리면서 종리운을 관찰하고 있었다. 종리운이라는 사람을 파악하는 건 어떤 일보다 중요했다.
이렇게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손을 두는 습관, 발끝의 각도, 눈빛의 움직임, 어느 하나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때 종리운이 홱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눈을 피하기보다 바로 그의 눈을 바라봤다. 종리운의 입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래, 금목환 공자. 나인 건 어떻게 알았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맹주님이 절 더 궁금해하실 수 있도록요.”
내 말에 종리운은 킥킥 웃었지만, 명재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식겁한 표정이었다.
이 사람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솔직하게 대하면 된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솔직하지 않을 때 나오는 반응은 의미가 없었다.
내가 여기서 숙이고 들어간들, 그건 무림맹주라는 사람을 아는 데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의미였다. 비상식적으로 열린 상단전을 말할 필요도 없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 강호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무기가 있어야지. 그건 누구에게도 드러내면 안 된다네. 요즘 어른들은 그걸 안 가르치고 이상한 것만 가르치더군. 당과를 주는 어른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강호의 금언이거늘.”
“그런가요.”
“그렇지. 아, 자네는 배울 겨를이 많이 없었겠군. 가주가 자리를 비운지 꽤 됐지? 아직 소식이 없던가?”
종리운이 날 물끄러미 바라봤다. 말 그대로였다. 지금 아버지는 가문에 없다. 오 년 전부터 실종된 상태니까.
아무래도 황금세가의 가주면 주목을 많이 받는 위치니, 잠깐 중원을 시끄럽게 달궜던 이야기기도 했다. 암살을 당했느니, 실족사를 했다느니, 하는 음모론들이 많이 떠돌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종리운이 하고 싶은 얘기는 그런 게 아닐 거다. 난 대답했다.
“이렇게 실종이 오래되면 슬슬 가주가 바뀌어야죠.”
“큭.”
종리운이 미소를 짓다 못해 결국 웃음을 토해냈다. 내 대답이 아주 취향에 맞았던 모양이다.
방금 내 대답이 종리운이 던진 질문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덧 종리운은 일어난 청무대장의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종리운은 중앙에, 난 머리를 사선으로 돌려야 볼 수 있는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비연각주의 말이 이해가 되는군.”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하지 않겠네. 나라는 사람이 더 궁금해 할 수 있도록 말일세.”
종리운은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 대답만으로 종리운이라는 사람의 한 꺼풀을 더 벗겨낸 것만 같았다.
웃음을 계속 유지한 종리운은 주제를 바꿨다.
“그래, 전력 증강이라. 남는 장로들 중 몇몇 보내주지. 요긴하게 쓰일 친구들일세.”
“···맹주님? 장로님들 중 일손이 남으시는 분이···”
“조용히 하게.”
청무대장이 말했지만 순식간에 묵살당해버렸다.
나도 알고 있다. 무림맹은 구파일방에게는 귀찮은 감시자 취급을 받고, 다른 군소방파들에게는 구파일방 하인 정도로 취급받는다.
만약 현재 검존이 무림맹주가 아니었다면 더 심한 취급을 받았으리라. 그들은 정파 내 사이의 갈등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데, 고질적인 부족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을 거였다.
그런 상황에서 무림맹 장로들을 보내준다니 나로서는 뜻밖의 수확을 얻어가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건 부가적인 것. 내가 여기 온 이유를 잊으면 안 됐다. 그러나 종리운은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것에 대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런데 그건 그냥 내 선물 같은 거고, 원래 여기 온 공자의 목적이 지휘권을 양도해달라는 것 맞나?”
“네, 맞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종리운은 반대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힘드네.”
“왜죠?”
“우리 병력이니까. 그것도 그거지만 생각해보게. 내가 여기서 자네에게 지휘권을 양도하면, 청무대장은 얼마나 맹에서 비웃음을 당하겠나. 저 사람, 열두살한테 병권을 빼앗겼대. 어머, 자기 여자는 제대로 지킬 수 있을까? 그것도 열두 살한테 뺏기는 거 아니야? 하하. 이런 조롱을 받을 수도 있고. 또한 기존 지휘관을 일방적으로 바꾼다면 내 용인술에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겠지. 특히 공자가 패배한다면 말이야.”
“···맹주님.”
청무대장은 눈을 감았다. 검존이 이런 사람이었구나. 나는 대충 확인했다. 마지막에 간드러지는 목소리 연기는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농담을 못 들은 척하면서 헛기침을 했다.
내가 말을 꺼내려고 할 때, 종리운이 이번에도 선수를 쳤다.
“지금까지는 정론을 얘기한 거고.”
종리운은 날 보면서 씩 웃음을 지었다. 방금까지는 나름 어색한 웃음이었다면, 이번 건 진짜 진한 웃음이었다.
“그래도 그 모든 결점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면 고려하지 못할 건 없지. 전쟁은 승리가 전부니까.”
“그럼 제가 여기서 보여드리면 되는 거군요.”
“뭘 말인가? 준비해온 거라도 있나보지?”
종리운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답했다.
“아뇨. 따로 준비해온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쟁은 준비한대로 흘러가지는 않으니까요.”
이번에는 내가 선수를 쳤다. 난 성유범을 바라봤다.
“여기 작전용 황금세가 전도(全圖)가 있겠죠?”
“···그렇소.”
“그거하고 붓 좀 가져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유범은 움찔하는 기색도 없이 바로 바깥으로 나갔다. 난 강요 같은 부탁에 기분을 나빠할 줄 알았더니, 도리어 이 숨 막히는 공간에서 빠지게 해주는 걸 기뻐하는 것 같았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성유범이 지도와 붓을 비껴들며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난 성유범을 도와 지도를 책상 위에 끝까지 폈다. 펴고 난 후에, 난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그건 명재희가 대신 말해줬다.
“더럽게 크네.”
“스읍.”
청무대장이 숨을 들이마셨다. 명재희는 움찔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 감탄사였던 거다. 종리운은 그냥 껄껄 웃고 말았다.
“그래. 뭘 보여줄 텐가?”
“제가 지휘관이 되면, 어떻게 할 지를 설명드립니다.”
“호오.”
종리운의 눈이 호기심에 가득 찼다. 그건 긴장된 호기심이 아닌, 어린아이가 하는 전쟁놀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더 닮아있었다. 이제 그럴 수 없게 되겠지만.
난 붓을 같이 준비 된 먹에 흠뻑 적신 뒤 전도의 중앙을 그었다. 대전이 있는 곳이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종리운은 턱을 괴고 금목환을 바라봤다. 금목환의 붓은 자유로이 동서남북을 횡단했다. 누가 보면 낙서라고 생각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전도 안에서는 깔끔하게 구획이 설정되고 있었다.
웃음이 나올 뻔한 걸 참았다. 비연각주가 칭찬을 하기에 어떤 아이인지 보려고 왔는데,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아이였다.
열두 살이 오백 명에 달하는 대군의 군진(軍陣)을 즉흥으로 말한다니. 그것도 자신 앞에서. 귀여우면서도 맹랑했다.
“끝났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전도를 설명하겠습니다.”
금목환이 말했다. 그 이후 나오는 말은 종리운의 태도를 바꾸게 하기 충분했다. 귀여움이라. 대군진, 중군진, 소군진을 정확하게 나눈 다음 운용을 논하는 열두 살의 어디에 귀여움을 찾을 수 있을까.
‘곽진도가 써줬나?’
종리운이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열두 살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얘기가 쭉쭉 뽑혀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정문에는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하게 보이는 진법을 짤 겁니다. 이런 곳들은 한 사람이 만 사람을 능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지세(地勢)가 없으면 만들면 됩니다.”
그 이후부터도 지세를 포함한 삼세(三勢), 이권(二權)을 적용시켜 모든 병진의 운용을 설명하니 군진의 밀밀함이 고요한 호수와도 같이 어떤 틈도 보이지 않았다.
종리운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금목환의 말에 거의 넋을 놓은 채로 구경하고 있었다.
“잠깐, 적이 이렇게 들어온다면 어떻게 할 거지?”
종리운은 손가락으로 북부를 가리켰다. 이제부터는 질문 답변 시간이었다. 종리운은 계속 적들의 시선으로 공격을 해나갔고, 금목환이 방어하는 식이었다. 논검(論劍)이 아니라 논전(論戰)이었다.
치열한 일진일퇴였다. 종리운은 여러 가지 전략과 병법을 구사하고, 받아치는 금목환도 마찬가지로 병법과 군진을 이용해 막았다.
그들이 전도에 손가락으로 계속 짚고 움직이자 마치 먹물에 기세라도 있는 듯 번져갔다.
한 시진 가량의 논전 끝에 전도는 번진 먹물의 흔적으로 거뭇하게 되어버렸다. 원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종리운은 계속 턱을 괴고 볼에 검지를 짚었다 뗐다. 일 각이 아무도 말하지 않고 지나갔다.
그때 먼저 입을 연 건, 금목환이었다.
“또 어디를 들어오시렵니까.”
그렇게 말하며 웃는 금목환을 보고, 종리운은 가만히 있지 못하던 손가락을 드디어 책상 위에 올렸다.
“이건 그냥 궁금한 건데, 그렇게까지 병권(兵權)을 잡아야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이건 세가가 바깥으로 나가는 첫 걸음이니까요. 무림맹의 승리가 아닌, 세가의 승리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 건?”
“그건 이제부터 말씀하시지요.”
종리운은 금목환의 마지막 답에 껄껄 웃고는 말했다.
“자네가 이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