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무공 견식 좀 합시다
35화 무공 견식 좀 합시다
쏜살같이 도망가는 옹소후의 모습은 빠르게 작아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형제들의 표정이 힘없이 풀어졌다. 지금까지 그들은 내 주문에 따라 연기를 하고 있었다.
“일거불환이라더니. 정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구나.”
금월상이 말했다. 난 어깨를 으쓱였다.
“먼저 저들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왔다고 생각하시지요.”
“···그래, 그게 맞긴 하구나. 저들이 우리에게 간자를 심었으니까 말이다.”
여전히 정원에는 간자들의 목이 뒹굴 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언제 베였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하긴 곽진도가 친히 처치했으니 반항할 새도 없었을 거다.
곽진도가 담당하는 외당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애초에 곽진도가 세가에 잘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림맹이 명재희를 통해 넘겨준 정보에서 우리는 그런 외당에도 간자가 있다는 걸 파악한 거다. 곽진도에게 오기 전에 이들을 처치하고 오라고 했으니.
물론 금정원에 잠입한 장로들의 정체도 알고 있었지만, 아직 계획상 건드릴 때가 아니었다.
곽진도는 굴러다니는 목을 바라보며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산의 사람들이라 가져갈 줄 알았더니. 저 녀석은 자기 문파 사람들을 이렇게 버리고 갈 줄이야.”
“동생도 버리고 갔는데요.”
“그렇긴 하구나.”
나는 쭈그려서 굴러 나온 머리들을 주머니에 넣었다. 물론 옹소후의 두려움을 자극하려는 의도는 맞았지만, 이렇게까지 과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저 삼대제자들도 저렇게 놔두고 갈 줄도 몰랐고 말이다.
“쟤들은 어떻게 하냐?”
마침 곽진도가 물었다. 삼대제자들이 곽진도의 말에 흠칫했다. 세 명. 고작해야 옹문규의 나이와 비슷한 아이들이었다.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뭐, 어떻게 쓸 지는 대충 알겠다만.”
다른 형제들은 저 삼대제자들을 어떻게 쓸지 의아한 눈초리였지만, 곽진도는 내가 무공을 보는 눈이 남다르다는 걸 알기에 넘어가는 듯 했다.
“일단 가시죠. 아직 할 게 많지 않습니까.”
“···정리는 하고 가야 되지 않겠느냐?”
나는 주머니에서 흰색 호리병을 꺼냈다. 작은 호리병의 몸통에는 주의라는 글자가 붉게 적혀져 있었다.
“그건 뭐냐?”
나는 금월상의 물음에 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호리병 마개를 딴 다음 옹문규의 시체와 피에 호리병을 뒤집었다. 투명한 액체가 꼴꼴 거리며 나오더니 옹문규의 시체와 피를 태웠다.
“코와 입 가리세요. 좋은 연기는 아니니까요.”
내가 굳이 말 안 해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러고 있었다. 곽진도는 이 호리병에 담긴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성능 좋은 화골산(化骨散)이군.”
오늘 일이 있기 전 명재희한테 미리 받아놓은 것이었다. 시체와 피를 한 번에 태우는 독한 약이었다.
시체가 녹는 광경은 심히 보기 좋지 않았다. 내 형제들과 곽진도, 형산의 삼대제자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는 담담했다.
*
옥묘각의 사랑방에는 사람들이 득시글했다. 나를 포함한 우리 형제들, 여상우 장로와 양철목 장로, 곽진도까지 총 일곱 명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옥묘각의 사랑방이 지어진 이래에 가장 많은 사람이 들이찬 때인 것 같았다.
곽진도는 어두운 야명주로 밝혀진 사람들의 면면을 둘러봤다.
“이렇게 빨리 모일 줄은 몰랐는데.”
“나도 동감이오. 아무리 형산을 도발한다고 하지만, 막내공자가 그렇게 옹문규를 죽일지는 몰랐지.”
여상우는 날 바라봤다. 정확히 말하면 죽인 건 옹소후지만 어차피 맥락은 비슷했다.
“천주성을 뺐으니 형산 정도면 여유롭다는 의미가 아닌가?”
곽진도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봤다. 퍽 기대감이 섞인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천주성을 걷어낸 게 아니고, 이청명을 걷어낸 거죠. 천주성이 마음먹고 달려들었으면 저희는 아무 것도 못했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 하긴, 요즘 일이 너무 잘 풀리다보니 잠깐 착각을 했군.”
곽진도의 분위기가 훅 가라앉았다.
천주성이 빠진 건 자발적으로 빠진 거지, 형산을 쫓아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이청명과 흑도 무리 몇몇이 형산파랑 무게감이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
곽진도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냐. 당장 내일 형산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할 말 없는 상황이지 않느냐. 명분은 충분하지. 장문인의 아들이 죽었지 않느냐.”
“그건 우리가 막아줄 수 있소.”
여상우가 손을 들었다.
“세가에 먼저 형산의 간자가 들어왔고, 저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왔다는 걸 말하면 막을 명분은 좀 서지 않겠소. 애초에 우리가 하는 일이 대개 이런 것이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정파라도 문파간 은원이 있으면 서로 싸우기 마련이고, 그런 걸 중재하는 것이 무림맹의 주된 역할 중 하나였다.
특히 전면전을 하는데 무림맹에 보고 없이 할 수는 없었다. 그건 구파일방이 만든 규칙이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무림맹을 우리 편에 놓았다는 건 신의 한 수였다.
“···넌 우리 모르게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었구나.”
곽진도와 여상우가 얘기할 때 금월상이 내게 조용하게 속삭였다.
금수린과 금화청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금수린과 금월상은 물론이고 심지어 금화청 또한 면목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게 내가 그들을 데려온 이유기는 했다. 세가의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알려주는 것. 그렇다고 나한테 그런 미안한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 표정들을 짐짓 무시하고 여상우와 곽진도의 말에 끼어들었다.
“지금 우리가 할 건 딱히 없습니다. 저희는 저들이 어떻게 나오느냐, 에 따라서 움직이면 됩니다. 맞지 않습니까. 각주님?”
“맞지.”
여상우는 빙그레 웃었다. 난 창문 바깥을 바라봤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는만큼, 형산의 사람들도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을 거였다.
옹소후가 여기 온 목적은 황금세가에 있는 형산의 장로들을 만나기 위해서일 거니까. 오늘 같은 상황이 있으면 더 빨리 모여서 사태를 의논할 거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얘기를 곧 들을 수 있을 터였다. 비연각의 사람들이 장로들에게 하나씩 추적을 붙였으니까 말이다.
이제 우리가 감시당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감시를 하고 있었다.
*
남창의 한 객잔. 원래는 일층이 술을 마시는 손님들 때문에 왁자지껄할 시간대였지만 조용했다.
바로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이 객잔을 하루 통째로 빌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조용히 얘기할 공간이 다급히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옹소후, 그리고 황금세가의 간자로 있는 형산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옹소후가 불렀다.
“그런 간악한 짓을 하다니!”
장로 중 한 사람이 탁상을 주먹으로 쿵 쳤다.
옹소후는 짐짓 슬픈 표정을 해보였다. 장로들은 막 오늘 옹문규와 삼대제자들의 죽음에 대해서 들은 참이었다. 물론 옹소후가 지어낸 이야기들이었다.
곽진도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옹문규와 삼대제자들을 죽였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장로들은 옹소후가 한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옹소후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살인멸구를 시켰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이 일을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이 일이 아버지께 들어가면 저희에게 큰 화가 있을 것입니다.”
옹소후의 말에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형산의 장로들도 눈치 채고 있었다. 오늘일이 형산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옹진수라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걸.
저들이 간악한 수를 썼다고 부르짖는 건 옹진수에게는 소용없었다. 형산의 양자가 황금세가 안에서 죽었다는 건 그 자체로 형산파에 대한 커다란 불명예였고, 그 책임을 져야 했다.
그나마 그 책임을 희석시키는 방법은 옹진수가 이 일을 알기 전에 큰 성과를 내는 것이었다.
“당장 중요한 건 곽진도를 포함한 세력들입니다. 아마 외총관이 밖에서 긁어 온 사람들이겠죠. 그들만 처치하면 일은 쉽습니다.”
옹소후의 말에 장로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슬슬 옹소후가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채는 까닭이었다.
“그 말이라 함은···”
“맞습니다. 주산파와 연합을 해야 합니다.”
옹소후는 단언했다. 그에게는 이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독식을 하려고 몇 년을 암약해온 시간이 아깝기는 하나, 황금세가의 세력이 커져서 다시 빼앗기는 건 주산파도 원치 않을 터였다.
“만약 황금세가의 세력을 내치고, 주산파와 다시 틀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연합해야 합니다. 또 다시 천주성 같은 세력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옹소후의 열변에 장로들이 서로의 눈치를 봤다.
황금세가에 관련한 건 옹소후가 지휘관이었다.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주산파에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요.”
그렇게 형산파의 사람들은 계속 회의를 이어갔다. 객잔 위에 복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
명재희가 우리에게 형산파와 주산파의 연합을 알렸다. 여상우와 양철목, 곽진도는 동시에 우려감을 표했다.
형산파 하나 정도는 무림맹이 무사들을 보내 막을 수 있다지만, 주산파까지 포함하면 열세에 부치는 건 사실이었다.
“···일단 무림맹 사람들한테 주산파 무사들을 맡으라고 하죠.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형산파 사람들은?”
“우리가 맡죠.”
내 말에 곽진도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이가 없다는 웃음이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어떻게든 가능하게 만들어야죠.”
“우리 호위무사들 수준으로?”
“그래도 나름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천주성이 빠지고 난 후, 세가에는 여러 가지 변화들이 생기고 있었다. 호위무사들도 그 중 하나였다.
이제 곽진도가 개입해서 어느 정도 괜찮은 무사들로 뽑아놓은 것이다. 그래봤자 일류 정도의 무사들이지만, 전에 있던 허수아비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물론 곽진도가 말한 것처럼 형산을 상대하기에는 분명히 어려움이 따를 것이었다. 만약, 발전 없이 자신의 무공들로만 상대한다면 말이다.
“형산파 무공까지라면 어떻게 될 듯합니다.”
“형산파 무공이 뭔 줄 알고 하는 소리더냐?”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연공부 문을 열었다. 연공부 안에는 명재희와 세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당연히 형산파의 삼대제자들이었다.
그들을 설득하는 건 쉬웠다. 당장 자신을 버린 문파에게 의리를 따지는 멍청이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곽진도는 그들을 보면서 눈을 끔뻑이다가 내게 말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 거더냐?”
“뭘 말씀이십니까?”
“난 네가 저들을 살려두기에 네 무공을 보강하기 위해 살려둔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것도 그거지만요.”
내 말에 곽진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설마, 지금 네가 형산파 무공을 파훼할 무공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냐? 무공을 만드는 게 어디 쉬운 얘기인지 아느냐? 나 역시 이궁천뢰검법을 만들면서 얼마나 머리가 깨지는···”
“괜찮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무공을 수정하는 것과 무공을 아예 만드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상단전은 생각보다 유능한 친구였으니까.
난 버럭거리는 곽진도를 무시하고 형산파 삼대제자들의 앞으로 가서 어깨를 쳤다.
“무공 견식 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