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무례하군요
32화 무례하군요
“크네요.”
옹문규가 탄성을 내뱉었다. 그는 황금세가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따라온 다섯 삼대제자들도 역시 입을 쩍 벌렸다.
남창의 금씨세가가 어째서 황금세가로 불리는지 건물이 설명하고 있었다.
문루(門樓)의 높이는 삼 장(丈)은 되는 듯했고, 정문에서 뻗어나간 좌우의 벽을 합치면 다섯 장(丈)은 되어보였다.
문루를 통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상계 사람, 표국 사람, 전장을 찾는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서 호위무사들은 형산의 사람들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옹소후를 제외한 형산의 사람들은 온 목적을 잊은 듯 주변을 향해 머리를 돌리기 바빴다. 문루의 높이 정도는 가뿐히 넘는 건물들이 정문 안에 산재했다.
“저 정도 건물이면 방이 몇 개나 될까요.”
“한 오십 개는 되겠군. 대청은 일곱 개 정도일 거고.”
옹소후 역시 오랜만에 와봤지만, 황금세가에 올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황금세가의 창고를 털면 중원의 모든 사람에게 십 년 치 양곡을 공급할 수 있다는 얘기도 허풍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부를 쌓고 있으니 그 거대하고 자존심 덩어리인 구파일방이 합종(合從)을 한 것일 테다.
“너희들은 그저 내 수행으로 온 것이다. 내가 지시하지 않은 행동은 하지 말도록. 특히, 문규. 너도 마찬가지다.”
“그럼요. 저도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옹문규는 웃었다. 옹소후에겐 그 웃는 얼굴을 무시했다.
그들은 높은 건물들을 헤치며 계속 안으로 나아갔다.
북적였던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고 비슷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만 보였다. 이제부터는 황금세가에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보이는 것이었다.
황금세가의 장원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황금전장, 표국, 상단의 본부 같은 외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은 외원이고, 황금세가의 사람들이 사는 곳, 그러니 진짜 본가는 내원이었다.
내원과 외원은 해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바라보는 형태였다. 해자에는 두 장 정도 되는 길이의 석교가 있었다.
좌우 난간의 끝에는 호위무사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서서 졸다가 앞에 옹소후가 다가오고 나서야 깼다. 형산이었다면 바로 치도곤을 놔도 할 말이 없는 태만이었다.
“어떤 분과 약속하고 오신 건지요?”
하품 섞인 호위무사의 말에 옹소후는 당당하게 말했다.
“형산이다. 감사(鑑査)하러 나왔다.”
옹소후의 말에 호위무사들이 허리를 뻣뻣하게 폈다.
“아, 네. 들어가시지요.”
당연히 황금세가의 내원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허나 그건 일반인한테나 해당되는 내용이고, 허가된 문파에 한해서는 감사라는 명분으로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물론 허가된 문파는 수많은 중원의 문파 중에서도 구파일방, 오대세가와 그에 비견하는 문파들로 스무 개도 되지 않았다.
“일단 호위들부터 개판이군.”
옹소후는 짐짓 호위들을 싸늘하게 바라봤다.
호위들도 알고는 있었다. 가끔 명가의 사람들이 황금세가를 감사하러 온다는 것을. 허나 이렇게 말도 안 하고 온 경우는 드물었다.
“너희들은 중원에서 가장 큰 금맥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런 놈들이 졸고 있다니, 너희들이나 세가에게나 책임을 물어야겠구나.”
옹소후는 순간 발검했다. 호위무사들도 무인들이었지만, 그들은 옹소후가 검병에 손대는 것도 보지 못했다.
투둑.
순식간에 두 호위무사들의 코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호위무사들은 두 손으로 코를 부여잡고 소리를 질렀다. 옹소후는 그것마저 한심해 했다.
무사들이라는 것들이 검 한 번 못 빼보고 엎드려 있는 꼴이라니.
“만약 형산이었다면 목이 날아갔을 게다. 감사히 생각하도록.”
물론 옹소후도 황금세가의 현실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니 가신들의 기강이 제대로 서있을 리가 없었다.
옹소후가 호위무사들의 코를 벤 건 기선제압이었다.
그의 의도대로 석교 뒤의 시종, 시녀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안으로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며 형산파의 방문과 냉정한 손속에 대해서 얘기를 퍼뜨릴 거다. 이건 자신의 아버지인 옹진수가 자주 쓰는 방법 중 하나였다.
옹진수는 문도들이 해이해졌다 싶으면 가장 떨어지는 제자의 단전을 폐기시킨 다음 출산(出山)을 시키고는 했다.
경험에서 미루어 본 예상대로면 이 넓은 내원에 두려운 분위기가 가득 찰 때까지 한 시진도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시종들이 뒤로 달려가기 전에, 시종들의 시선을 빼앗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저 멀리서 내원 정문, 석교로 걸어오고 있었다.
옹소후가 보기에 그들은 자욱하게 퍼지려는 두려움이라는 안개를 밀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허.”
그 사람들이 누군지 확인한 옹소후는 헛웃음을 지었다.
황금세가 직계 네 명이 정문으로 오고 있던 것이다. 맨 선두에는 곰 같이 생긴 금월상과 좌우에는 금화청과 금수린이 있었다. 금월상의 다리 뒤로 작은 다리가 느긋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얼굴이 아직 안 보이지만, 저건 분명 금목환이리라.
“굳이 찾아갈 필요가 없었군.”
옹소후는 칼을 검집으로 넣었다. 그들을 맞이하기 전, 옹소후는 주변을 둘러봤다. 단독행동을 하지 말라는 마지막 경고였다.
삼대제자들은 옹소후의 눈을 마주치며 확인을 했지만, 옹문규의 눈은 다른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건 오른쪽에서 다가오는 금수린이었다.
옹소후는 옹문규의 흥미가 도는 눈빛을 보고 금수린을 바라봤다.
“호오.”
꽤, 아니, 아주 많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형산파 장문인 급의 품위를 가지려면, 저 정도의 미인은 옆에 끼고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 이딴 쓰레기 같은 상계에 있기는 너무 아까웠다.
옹소후는 그렇게 단정 지었다.
*
금월상은 소리를 지르는 호위무사들 때문에 속으로 몇 번이나 불경을 외웠는지 모른다.
사람 얼굴 중앙에 붙어있는 코가 혼자 떨어져 땅바닥에 있는 게 얼마나 낯설어 보이던지.
만약 금목환이 사전에 해준 얘기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냉정을 못 찾았을 것이었다. 금목환이 식당에서 말할 때, 처음에 강조했던 건 바로 강호의 잔인함이었으니까 말이다.
- 강호 사람들은 약자에게는 잔인하고, 강자에게는 비굴합니다.
- 그건 모두가 그렇지 않더냐?
- 그렇죠. 무공을 배웠냐, 안 배웠냐의 차이입니다.
그런 얘기를 나눌 때는 와닿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야 확 체감됐다.
금월상도 저 붉은 무복의 뻔한 수작을 못 꿰뚫어보지는 않았다. 기선제압을 하려는 의도일 터다.
허나 의도를 알아도 위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선명한 피와 낯선 살덩이를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래도 금월상 정도면 침착한 편이었다. 금화청과 금수린은 입술을 씹고 얼굴색이 변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때, 뒤에서 뭔가 마음이 진정되는 편안한 기운이 흘렀다. 뒤를 바라보지 않아도 그건 금목환이 내뿜어주는 기운이라는 걸 알았다.
너무도 정순함이 짙어 무공에 대한 견식이 짧은 금월상도 도가 계열의 심후한 내공이라는 걸 눈치 챌 정도였다.
맨 앞에 있는 금월상이 옹소후를 맞았다. 옹소후는 날씬하고 날렵하게 생겨서 두 사람이 더욱 대비됐다.
“형산의 옹소후요. 감사를 하러 왔소이다.”
“황금세가의 금월상이오.”
“호위무사들의 기강이 바닥을 기고 있어 대신 예법을 알려줬소.”
옹소후는 그렇게 말하고 금월상을 향해 포권했다.
옹소후의 발밑 근처에 호위무사들은 여전히 코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금월상은 호위무사들을 애써 외면하면서 금목환의 말을 상기했다.
- 호위무사들은 분명 흉(凶)을 당할 것입니다. 당황하시겠죠. 괜찮습니다. 그들이 올 때에는 주산파의 간자가 근무를 서게끔 해놓을 겁니다.
만약 그냥 호위무사였다면 금월상은 일말의 동정을 느끼고 마음의 평정이 깨졌을 거다.
허나 저런 사람들도 세가를 좀먹으러 온 벌레들이라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감사를 드릴 일이군요.”
금월상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형제들과 같이 산책을 하다가 오시는 걸 봐서 왔소. 그런데 감사라면 잘 됐군. 현재 가주님이 안 계시니 내가 동행하는 게 낫지 않겠소?”
금월상의 침착한 대응에 옹소후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애초에 무인들과 상계 사람들은 피에 대한 내성이 다르다.
무인들은 어릴 적부터 사람이 죽어나가고, 죽을 때는 가장 추한 모습을 보이며, 비참하다는 걸 익히 배우지만, 상계 사람들은 아니었다.
바닥에 엎드려서 구역질하는 사람은 부지기수였고 거품을 물며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 금월상이라는 녀석은 꽤 풍모를 지키고 있었다. 옹소후는 상계 출신 주제에 무인 흉내를 낸다는 게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본은 되어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오. 혹여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다면 구향검법을 견식 시켜줬을 터인데.”
옹소후의 노골적인 도발에 금월상이 멈칫했다. 이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도 못할 것이다.
숙이면 숙이는 대로 조롱하면 되고, 반항하면 반항하는 대로 처리하면 됐다.
허나 답이 나온 건 그 뒤에서였다.
“기회가 된다면 보고 싶군요.”
그 말을 하면서 나온 건 눈빛이 가라앉은 금목환이었다. 옹소후는 금월상을 의식하느라 금목환을 잠깐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장 여기서 제일 궁금한 건 금목환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금월상이 생각 외의 대처를 하니 관심이 쏠렸던 거다.
옹소후는 금목환을 찬찬히 바라봤다. 생각해보니 볼 때마다 어깨를 구부리고, 머리를 숙이고 다녀서 얼굴을 제대로 볼 기회도 없었다.
옹소후가 상상한 금목환의 얼굴은 내리까느라 쳐진 눈과 음습한 코, 말을 안 해 소심한 입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어깨를 뻗고 정면을 보다 못해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은 반안(潘安), 송옥(宋玉)의 환생인가 싶을 정도로 미려했다.
“형산의 구향검법이 진진함에 있어서 일절이라 늘 견식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위를 올려다보며 말하는 금목환의 얼굴은 냉막했다.
섬세하게 조각한 것 같은 얼굴과 다르게 고저 하나 없는 목소리는 시비인지, 진심인지 헷갈렸다.
옹소후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꼬투리를 잡고 싶었지만 명분이 부족했다. 금목환이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나이라는 게 걸렸다. 어차피 정보만 얻으려고 온 거니 굳이 무리하게 행동할 필요도 없었다.
“···막내공자가 형산의 검법에 관심이 있나보군. 나중에 견학 오면 삼대제자들의 훈련을 보여주지.”
“감사한 말씀이군요.”
그렇게 잠깐의 신경전은 끝났다. 옹소후는 금목환이라는 사람이 더 궁금했지만,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금월상의 뒤로 갔다.
커다란 몸뚱이로 금목환을 완전히 가린 금월상이 말했다.
“어디부터 감사하실 예정이십니까?”
“장로들이 있는 곳이 어디요? 그곳부터 가고 싶군. 장로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보고 싶어서.”
옹소후가 말했다. 일단 먼저 확인해야 할 건 형산이 심어놓은 사람들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었다.
“아. 금정원 말씀이시군요.”
금월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옹소후는 살짝 일이 꼬이는 걸 느꼈다. 이들이 마중을 나온 것도, 이들이 도발을 교묘히 피하는 것도 상정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괜찮았다. 아직 실수도 없고, 파악만 하고 떠나면 될 일이었다.
아직 옹소후는 황금세가의 직계들이 형산의 간자들에 대해서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생각하니 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 그는 적어도 황금세가의 직계들의 눈과 귀를 막은 건 확실히 했고, 그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형산의 간자에게 상세한 설명을 듣고 간다면···
“소저. 참 머릿결이 좋군.”
그때 옹문규가 황금세가의 딸의 머리카락을 올려 자신의 코에 댔다. 옹소후도 예상할 수 없었던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작고 하얀 손이 나와서 옹문규의 손목을 낚아채려 했다. 신속하고 정확한 금나수법이었다. 허나 옹문규도 눈치를 채고 몸을 통째로 뒤로 확 뺐다.
금나수를 펼친 건 놀랍게도 금월상의 뒤에 있던 금목환이었다.
“무례하군요. 형산파···”
금목환은 옹문규는 쳐다보지도 않고, 옹소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전히 냉막한 표정과 고저 없는 말투였다.
옹소후는 반사적으로 옹문규를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출수할 것만 같은, 분노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옹소후는 속으로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금목환 역시, 이 상황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