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넘칠 정도로, 많이
29화 넘칠 정도로, 많이
명재희는 옥묘각 지붕 위에서 사방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 위에서 보니 숨어있는 자들이 명백하게 보였다. 그들은 무언가를 적으면서 옥묘각을 방위 단위로 감시하고 있었다. 금목환이 혹시 밤에 나올까 기다리는 것일 터다.
들킨 지가 언제인데 저렇게 꼼꼼 숨어있는 것을 보면 애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쩌랴. 자신은 이미 돈을 받아버렸다.
축귀신법(逐鬼身法). 귀신을 쫓을 수도 있다고 할 만큼 은밀하고 신속한 신법. 은영조의 위명을 강호에 널리 퍼뜨린 무공이었다.
“···너무 많이 받은 것 같아.”
명재희는 볼을 긁었다. 밑에 숨어있는 네 명은 그래도 나름 은신술로만 치면 강호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자신이 한 명을 발견하지 못한 게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다만 정보전에 특화된 은영조의 훈련과 명재희의 감각이 그들을 굽어보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은영조도 그렇지만, 보통 저런 야객(夜客)들은 경공을 비롯한 신법에만 특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보통 쓰는 게 단검이나 비수 같은 것이니 정면으로 싸우는 무공을 익힐 필요도 없고, 효율도 떨어지는 거다.
그러니 이런 정보원들끼리의 싸움이라면 일신 무공의 경지로 싸우는 게 아닌, 오로지 신법 대결이었다.
“그래도 주는 건 받아야지.”
명재희는 동그랗게 말린 자신의 머리카락에 꽂힌 비녀를 뽑았다.
긴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휘날리는 게 화려했지만, 금목환의 침실 쪽에 집중하고 있는 야객들은 눈치 채지도 못했다.
명재희의 비녀의 양쪽 끝을 잡아당겼다. 뭉툭했던 한 쪽 끝이 벗겨지며 날카로운 촉이 나타났다. 그건 비녀가 아닌 판관필(判官筆)이었다.
붓처럼 생겼지만 붓 끝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붙어있는 무기였다. 암살자들이 주로 쓰는 무기이기도 했다.
휘잉.
밤에 바람 부는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들이 흔들렸다. 우수수 나뭇가지들이 부딪는 소리가 지났다.
전각 위에 있던 명재희는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
밤이 깊은 새벽. 황금세가의 장로들이 금정원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분위기는 무거웠다.
초조한 눈빛들이 오고 갔다. 조용한 회의실에서는 마른 입술만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형산(衡山)에서는 답이 왔나?”
“아직 안 왔소. 지금쯤 대공자가 장문인한테 엄청 깨지고 있겠지.”
형산파는 현재 황금세가가 있는 강서 남창에서 가장 가까운 명문 문파였다. 구파일방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위세는 구파일방에 못지않았다.
“대공자보다 우리 목이 더 먼저 날아가게 생겼소. 본파가 자그마치 몇 년을 공들인 일인데···”
그들은 엄밀히 말하면 황금세가의 장로들이 아닌, 형산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당금 세가에서 급속도로 일어나는 변화를 서찰로 보고를 한 상황이었다.
정말 보고하기 싫었지만, 하루 만에 연락이 두절되어버린 감시자들까지도 보고를 해야 했다.
그들은 지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천주성과 절강의 주산파(舟山派)만 견제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외총관이 나와서 세력들을 잠식하고 있다니. 직접 보는 간자들도 이해가 안 될 정도인데, 형산파에서는 절대 이해 못할 게 분명했다.
“여기서 무림맹의 이상한 동향까지 넣었으면 직접 목을 베러 왔을 수도 있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그건 확실하지 않으니 뺐어야지.”
“그렇게 생각하자고.”
애초에 무림맹은 구파일방의 비리와 압제를 벗어나는 걸 목적으로 한 설립한 집단이니, 같은 정파라도 기존 문파들과는 마찰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림맹은 형산파가 황금세가를 먹으려고 하는 걸 진즉에 알고,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주의를 주던 곳이었다.
매일 귀찮게 서찰을 보내던 것들이 요즘 따라 잠잠한 것이 더 수상한 거다.
“···일단 본파에서 답이 올 때까지는 사리고 있자고.”
“그래. 여기서 더 실수를 했다가는 장문인의 구향검법(九向劍法)에 도륙이 날 걸세.”
그렇게 황금세가의 장로들, 아니, 형산파의 장로들은 비밀스러운 회의를 마쳤다.
*
형산의 무복색은 불의 여신 축융을 기리기에 붉은색이었다.
붉은 영웅건과 붉은 무복, 어깨에는 두 개의 금실을 새긴 옷을 입은 사람이 책상을 규칙적으로 두들겼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곧잘 나오는 버릇이었다.
지금 그의 앞에 펼쳐져 있는 서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강서의 비각(秘閣)을 이용했으나 발각 당함.
한숨만 나오는 내용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 쉽다는 감시 붙이는 것도 못한다는 말인가.
처음 남자는 천주성이 빠졌다는 얘기를 듣고 쾌재를 불렀었다. 당장 자신들이 쉽게 못 움직이는 이유는 천주성이었는데, 알아서 빠져주니 얼마나 좋았던지.
허나 뜬금없이 외총관 곽진도가 나타나서 그 빈자리를 모두 자신의 세력으로 채웠다고 했다.
남해삼객 중 하나면 추종자도 많을 터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두드린 사람은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말했다.
“공자님. 문주님이 오늘자 보고를 궁금해 하십니다.”
남자는 문주라는 이름이 들리자마자 양쪽 관자놀이를 짚었다. 분명 자신의 아버지를 지칭하는 말인데 머리가 아파왔다.
그 이유는 명백했다. 장문제자 경쟁 때문이었다. 현 형산파의 장문인, 옹진수(翁珍秀)가 자신의 첫째 아들, 옹소후(翁素珝)한테 장문제자 경쟁에 참여하라고 한 것이다.
애초에 옹소후는 이대제자였기에 참가할 자격도 되지 않았지만, 옹진수가 문칙(門則)을 바꿔 이대제자도 참여할 수 있게까지 만들었다.
“···괜히 한다고 했군.”
당연히 문파의 장문인은 세습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몰래 얘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옹진수는 자신의 아들에게 장문제자가 될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형산파의 숙원사업 중 하나였던 황금세가 장악의 실권도 아들에게 넘겨줄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그래서 옹소후는 약관이라는 어린 나이에 황금세가의 장악을 담당하는 총괄을 맡고 있었다.
그 일을 맡고난 후 옹소후는 잠을 두 시진 이상 자본 적이 없었다. 퀭한 눈으로 서찰을 계속 넘겨보자니 별 헛소리까지 나왔다.
- 현재 황금세가의 급격한 변화가 곽진도가 아닌 막내공자 금목환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런, 미친놈들!”
옹소후는 바로 욕을 하며 서찰을 찢어버렸다. 자신도 이 일을 오래했기에, 황금세가 직계들이 얼마나 무력한 사람들인지 안다.
자신이 그런 상황을 더 주도시키기도 했고, 그것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있었다. 근데 제일 무력했던 금목환이 뭘 한다니. 이딴 말도 안 되는 보고는 왜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두드림도 없이 바로 문을 쾅 밀었다. 장문인 아들이자 형산파 이대제자의 문을 이렇게 박차고 들어올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아버지이자 장문인, 옹진수였다. 분명 방금 가겠다고 전했는데, 그 새를 못 참고 온 것이었다. 그만큼 옹진수는 급한 성미를 지니고 있었다.
“네놈은 지금 생각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옹진수는 들어오자마자 대뜸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바로 가려고···”
“지금 장로들이 네가 잘못하나, 안하나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단 말이다. 아직도 그걸 볼 눈이 안 된다는 말이냐?”
옹소후는 그 이후로도 쏘아붙이는 옹진수의 말에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황금세가 건만 처리하면 넌 축융봉(祝融峰)에 이름이 새겨질 수 있고 장문인도 될 수 있다고 했다. 그 하나만 하면 되는데 그걸 왜 못하는 것이냐.”
그 이후로도 잔소리는 계속 됐다. 가뜩이나 잠이 부족한 옹소후는 앞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그래, 내가 친히 왔으니 이제 여기서 보고를 받아야겠구나.”
옹진수는 잔소리를 끝내고 맞은편에 턱하니 앉았다. 옹소후는 입술을 꽉 깨물고 침을 삼켰다. 이제는 정말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었다.
“···천주성이 빠졌다는 보고까지 전해드렸습니다.”
“그래. 그럼 끝난 거 아니더냐? 이제 그나마 남은 큰 덩어리는 절강의 주산파(舟山派) 정도밖에 없지 않느냐. 대체 뭐가 문제인 거냐?”
주산파 역시 절강의 터줏대감 세력인 보타암(普陀庵)을 몰아내고 둥지를 튼 강자들의 세력이었다. 아무리 형산이 역사가 더 길다고는 하지만, 주산파가 약한 세력은 아니었다. 황금세가라는 대마(大馬)를 먹는 걸 쉬운 일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옹소후는 살짝 억하심정을 담아 말을 뱉었다.
“천주성 세력들이 빠진 그대로 외총관들의 사람으로 채워졌습니다.”
“뭐?”
당연히 옹진수의 얼굴은 흉신악살이 됐다. 이렇게 된 거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을 풀기로 했다. 서찰에 나와 있는 그대로. 황금세가에 있는 머저리들이 변명한 그대로 말이다.
“교체가 틈도 없이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봤을 때, 천주성이 나갈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외총관 쪽과 천주성의 물밑 협상이 있었다는 설이 정설입니다.”
옹소후는 이제 옹진수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직계들의 감시가 많이 허술해진 상황이고, 황금세가 내 세력들이 저희들을 포함하여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외총관은 계속 세력을 파먹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희가 파견한 사람들이 비각을 잘못 써서 직계들의 감시 또한 발각이 되었다고 하고요.”
“계속해 보거라. 아주 어디까지 가나 보자꾸나.”
“또 다른 의견으로는 이 황금세가의 변화가 외총관 대신 막내공자 금목환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의견도 볼 수 있었습···”
쉭.
순식간에 옹진수의 허리춤에 묶여있던 호리병이 날아 옹소후의 머리를 강타했다. 내공을 싣지는 않았지만, 호리병은 깨지고 그 안의 술들이 옹소후를 적셨다.
“아주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하는구나. 막내공자가 황금세가의 변화를 주도했다니. 내가 멍청이로 보이느냐?”
“서찰에 쓰여 있는 대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옹소후는 꿋꿋했다. 옹진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보고만 받을 거면 왜 거기 있는 거냐! 네가 알아보고, 개선책을 찾아야 할 거 아니냐!”
그러려고 했다. 그럴 시간도 없이 들이닥쳐서 호리병을 맞을 수밖에 없던 거다.
“지금 당장 형산을 내려가서 황금세가를 직접 보고 와라. 어차피 이제 암약하는 세력 따위는 없으니까 가도 될 거 아니냐.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직접 보고서를 써서 내게 가져오도록. 한 달의 기한을 주마.”
옹진수는 그렇게 으르렁거리며 옹소후의 처소에서 나갔다. 옹소후가 주변을 둘러봤을 때 찢어진 서찰, 부서진 호리병 조각, 엎어진 술이 그의 눈에 서럽게도 한 눈에 들어왔다.
멍한 머리로 주저앉아 어질러진 것들을 치우려 할 때, 옹소후는 이마 밑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흘렀다. 손으로 찍어 보니 피였다.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아버지에게 남은 일말의 애정도 없었다. 그냥 빨리 장문인이 되어 옹진수를 뒷방 구석으로 보내는 게 옹소후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황금세가만 해결한다면···
옹소후 머릿속에는 예나 지금이나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
똑똑.
방문에서 소리가 났다. 내가 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피곤해 보이는 명재희였다.
“시종이면 답을 듣고 들어와야 된다니까. 문 두드리고 바로 들어오는 거 아니야.”
“···아, 맞다. 까먹었어.”
명재희는 그렇게 말하면서 실실 웃었다. 그렇다고 내가 기철이처럼 뺨을 때릴 수는 없었다.
일단 명재희는 내 시종이 아니고,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도 다 알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특히 피곤할만했다. 사흘 연속으로 밤을 새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혹시나 해서 나 말고 다른 형제들한테도 간자가 심어져있나 확인했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난 결국 명재희한테 원보 세 개를 더 주고 삼형제의 간자를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명재희는 바로 수락했다.
그리고 난 명재희가 없는 틈을 타서 명재희의 신법을 연구하면서 따라해 봤다. 처음 볼 때부터도 신기한 신법이라 생각했지만, 직접 따라해 보니 굉장히 상승의 무공이었다.
내공의 경로를 훤히 보면서도 따라 하기 어렵다고 생각될 정도였으니. 명재희가 그렇게 능숙하게 쓰기까지는 피나는 노력이 동반됐을 거다.
생각보다 명재희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이번 신법 공부로 알게 됐다.
“왜 그렇게 봐? 더 시킬 거 있어?”
명재희는 날 올려다봤다. 마치 뭘 더 시켜달라는 말투다.
“아니.”
“···어.”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명재희는 실망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근데 내가 계속 생각해봤는데, 너 돈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니야?”
“왜?”
“솔직히 사람 네 명 처치하는 건 일도 아닌데, 원보를 하나씩 받으니까 좀 양심에 찔린다고 해야 하나···”
“아니, 난 제 값을 지불했다고 생각해.”
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몰래한 거긴 하지만, 명재희의 신법을 추적하며 꽤 많은 공부를 했으니까 말이다.
명재희가 없을 때마다 시도한 결과 완벽히 따라하지는 못해도 잠깐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무공만 두고 봐도 원보 네 개는 헐값인 수준이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할 말 없고.”
명재희는 여전히 찝찝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다음 말을 이어갈 때는 단호했다.
“그래도 나중에 돌려달라고는 하지 마.”
“안 그래.”
명재희는 지금 내 수중에 원보가 얼마나 있는지 알기나 할까. 이것도 황금세가의 금력에 비하면 조족지혈도 안 되는 수준이다.
이제 조금 황금세가에서도 우리 숨통이 열리고 있다. 곽진도와 무림맹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니까.
“아, 그리고 이거 각주님이 너한테 전해달래.”
명재희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품에서 꽉 묶인 죽간을 꺼냈다.
난 바로 죽간을 펼쳤다. 살짝 실망했다. 전생의 경험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기 때문이다.
죽간에 담긴 건 현재 세가에 남아있는 잔존 세력들이었다. 한 숟가락 얹으려는 군소방파들도 많았지만, 제일 큰 건 역시 형산파와 주산파였다.
그래도 성의가 있으니 쭉 읽어봤다. 각 세력마다 특이사항도 적혀있었고, 그건 조금 도움이 됐다.
“도움 되는 내용이야?”
명재희가 죽간을 넘보며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조금, 이라고 대답하려다가 형산파의 특이사항을 확인했다.
- 형산(衡山), 대공자(大公子) 옹소후(翁素珝) 하산(下山).
생각이 바뀌었다.
“많이.”
넘칠 정도로,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