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방문자들
26화 방문자들
등목서랑(登木鼠狼) 여상우와 명명해검 양철목.
그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림에 더 알려진 건 광동 출신 고수인 명명해검 양철목이지만, 그는 여상우의 호위일 뿐이었다. 쉽게 말해 눈속임이다.
둘 중 알짜배기인 사람은 등목서랑 여상우다. 등목서랑은 별호가 아니었다. 여상우는 강호에 알려진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몇몇 사람들이 부르는 애칭 같은 것이다. 나무 위에 올라간 족제비처럼 신속하며 영리하다는 의미였다.
“예를 갖춰 사랑방으로 들이도록.”
“네. 알겠습니다.”
기철에게 지시를 내리고 최대한 정갈한 느낌으로 의자에 앉았다.
난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었다. 내 생각보다 빨리 오긴 했지만, 나쁠 건 없었다. 오히려 좋았다.
의미 있는 방문이었다. 내가 이청명 장로의 목을 친 이후 옥묘각으로 방문한 장로들이니 말이다.
곧 사랑방의 문이 열렸다. 앞에 선 기철과 뒤에 있는 여상우, 양철목이 보였다. 기철은 의자를 빼서 그들의 자리를 마련했다.
“곧 차를 올리겠습니다.”
“그래.”
기철은 고개를 숙이면서 뒷걸음질을 치며 나갔다.
예전에는 뒷걸음질에 익숙하지 않아 몇 번 넘어지고는 했는데, 이제는 뒤에 눈이 달린 듯 완벽했다.
“시종이 참 잘 따르는군요. 막내공자가 덕이 있나봅니다.”
“덕이 아니라 복이죠.”
나는 여상우와 양철목을 바라봤다.
“지금 이렇게 장로님들이 오신 것처럼요.”
“허어. 어찌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선자불래, 내자불선이거늘.”
“장로님들은 제가 불러서 오신 거니까 좀 다르죠.”
그 말에 여상우는 빙그레 웃었고 양철목은 눈알을 위로 굴렸다.
“공자가 언제···”
“큼, 큼.”
양철목이 말을 하려고 하자 여상우가 헛기침으로 끊었다. 양철목은 바로 입을 닫았다. 역시 대화권은 양철목보다 여상우에게 있었다.
“막내공자가 바뀌었다는 말은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게 되어버렸군. 그 누구도 전의 금목환을 생각하지 않아. 신기하지 않은가. 말 없던 막내공자로 보낸 시절이 훨씬 긴데, 사람들은 지금 모습에 이미 익숙해졌으니까.”
“장로님들은 익숙해지셨나 모르겠습니다.”
“서서히 익숙해지는 것 같네.”
곧 기철이 차를 끓여 나왔다. 우리의 대화는 잠깐 끊기고 차가 졸졸 흐르는 소리만 청아하게 방을 채웠다. 기철은 다시 능숙하게 뒷걸음질을 치며 나갔다.
“이제 본격적인 얘기를 할 차례군요.”
“어린 나이에 대화 예절이 있군.”
“상식입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원래 은밀한 얘기를 할 때는 시종이 차를 내오고 나서 하는 게 정석이었다.
그 전에는 안부를 묻거나, 작은 주제로 얘기한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면 대화가 매끄럽지도 않고, 중간에 차를 내오는 시종 때문에 흐름이 끊기기 때문이다.
흔한 대화 예절이었지만, 여상우는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그가 장로로 부임하고 나서 내가 옥묘각 밖으로 나오는 걸 거의 보지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막내공자가 이청명 장로를 벤 것. 그건 누구의 생각인가? 외총관의 생각인가? 아니면 공자의 생각인가?”
“제 생각이었습니다.”
여상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내가 제대로 찾아왔군.”
여상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간 사랑방 전체에 기가 들이찼다. 화분에 있는 꽃들이 기를 느끼고 떨렸다. 양철목이 대화를 차단할 수 있는 기막을 만든 것이었다.
“원래 우리가 누구인지 밝히고 말하는 게 예의지만, 자네한테 개인적인 궁금증이 생겼네. 우리를 불렀다는 도발을 했으니 응당 받아야 되는 징벌이지.”
나는 웃었다. 여상우가 어떤 질문을 할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물어보시지요.”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여상우는 퍽 자신만만한 눈빛이었다. 마치 내가 그들을 모르는 게 당연할 거라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무림맹 소속이신 걸로 압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림맹 비연각(飛燕閣)에서 나온 사람들이지만 거기까지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지금도 충분히 여상우와 양철목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으니까.
물론 여상우는 바로 표정을 관리하며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했지?”
“지금 금정원에 있는 수많은 장로들이 어떤 세력에 속하고 있고, 그들의 세력은 모두가 황금세가에서 한 몫을 챙기려고 하겠죠. 단 한 군데 빼고 말입니다.”
나는 잠깐 말을 끊었다. 여상우와 양철목의 눈이 내 입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바로 황금세가를 지금처럼 유지시키려는 무림맹. 황금세가가 한 세력에게 먹히면 정파의 균형이 흔들릴 걸 우려하고 있겠죠. 혹여나 마교나 다른 사파에게 먹히면 더 큰일이 나는 것이고요.”
“훌륭한 식견이군.”
여상우는 내 대답이 끝날 때쯤에야 차를 마셨다.
“맞아. 우리는 무림맹 비연각 소속이고, 황금세가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온 사람들이지. 난 자네가 좀 더 놀라주길 바랐건만.”
“기대에 부응을 못해드렸군요.”
“기대를 넘어선 거라네.”
여상우는 그리고 자신들이 여기에 온 이유의 배경을 설명했다. 난 들으면서 그 정보를 계속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무림맹은 내가 예상한 그 이전부터 황금세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또 적극적으로 개입할 마음도 있었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나 천주성을 비롯한 수많은 세력이 얽히면서 무림맹은 뒤에서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직접적인 대결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무림맹은 늘 우리 직계를 주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실권은 없어도 명분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무림맹에게는 매력적인 패였으리라.
다만 직계들이 너무 위축되어 있으니 무림맹이 주저한 것이다.
“대공자도 생각을 해봤는데, 그는 세가를 위해서 움직이는 게 아닌 개인을 위해 움직이는 것 같더군.”
여상우의 말에 나는 살짝 감탄했다. 정확히 맞는 건 아니었다. 금월상은 가족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금월상이 세가를 위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걸 통찰한 건 퍽 대단했다.
“그런데 막내공자는 달랐지. 이청명의 목을 자르고, 천주성이라는 조직의 특성을 이용해 천주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런 대담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지.”
여상우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작고 네모난 패를 꺼냈다. 은칠의 바탕이 되어있고, 태극이 그려져 있는 패였다.
“이건 무림맹의 귀빈임을 알려주는 패네. 무림맹은 이 패를 가진 사람을 사정을 막론하고 도와줄 거라네. 어느 지부든 당당하게 내밀고 다니시게.”
“감사합니다.”
“일단 자네와 내가 연락할 수 있게끔 사람 하나를 놔두고 가겠네.”
나는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양철목을 바라봤다.
“혹시 양철목 장로님이신가요?”
“그건 아니고. 알아서 옥묘각 시종으로 넣어주지.”
“감사합니다.”
난 고개를 숙였다. 내 예상보다 무림맹은 화끈했다. 이청명 장로의 목을 벤 효과가 생각보다 좋았다.
여상우와 양철목은 그 이후 차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서 그들을 배웅하려고 하자, 가만히 있던 양철목이 주머니에서 옥합 하나를 꺼냈다.
내가 심미안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딱 봐도 귀한 옥합이었다. 회화(繪畫), 전지(剪紙), 지찰(紙紮), 자봉(刺縫), 죽편(竹編) 등 옥합에도 들어가는 기술 중 도무지 빠지는 게 없었다.
“요즘 무공 공부를 열심히 한다니 선물을 가져왔네.”
“사양하지는 않겠습니다.”
“독각화망(毒角火蟒)의 내단이라네. 이 갑자 정도 되지.”
“훌륭하군요.”
나는 옥합을 쓰다듬고 주머니에 넣었다. 독각화망의 내단이라. 난 그들이 보이지 않게 입맛을 다셨다.
독각화망의 내단은 강건하고 패도적인 기운을 품은 영약이었다. 유한 태을헌원신공을 주로 익히는 나에게는 맞지 않는 영약이었다.
물론 내가 태을신공을 익히고 있는 걸 이들이 알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무림맹은 기대하고 있네.”
“저도 무림맹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난 저 멀리까지 나가는 여상우와 양철목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말이라도 더 훔쳐들을까 했는데 역시 쉽지 않았다.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야 나는 옥합을 꺼내어 열었다. 옥합 안에 검은색 비늘로 감싸진 작은 환단이 있었다. 단약에서는 쿰쿰하고 알싸한 향이 지독했다.
아무리 영단이어도 사체의 썩은 내는 사라지지 않는 까닭이었다. 또한 독각화망이면 피가 독으로 되어있는 흉악한 영물. 이 정도도 고급 품질이라 냄새가 안 나는 편이었다.
이 처치 곤란 물건을 어찌하면 좋을지. 주변에 강건하고 패도적인 무공을 쓰는 사람을 생각해보았다. 곧 나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기철아.”
“네. 공자님.”
나는 기철이를 불렀다. 바로 뒤에서 기철이가 나타났다.
“큰형님을 옥묘각에 초대해야겠구나. 선물이 있다고도 전해줘라.”
*
“원래 내단만 주고 나오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 멀리 금목환의 신형이 없어지자마자 양철목이 말했다. 양철목이 말한대로, 원래 그들의 목적은 정말 내단만 주고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게 전부였다. 아직 금목환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들의 정체를 밝히고, 우군까지 되는 건 전혀 상정한 바가 아니었다.
“지금 안 맺어두면 후회할 것 같아서.”
“우리가 아쉬울 게 있습니까? 막내공자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이렇게 가면 황금세가는 꼼짝없이 무너지게 되어있어. 아무리 우리가 뒤에서 균형을 잡아준다고 해도 간접적이면 한계가 있는 법이지. 또한 천주성이 갑자기 빠져서 가속화 된 균형 붕괴를 막을 수는 없었을 걸.”
여상우는 그렇게 말한 다음, 잠깐 고민하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뻔히 보이는 눈치싸움을 할 상대도 아닌 것 같고.”
양철목은 놀랐다. 여상우는 비연각의 각주로서 사람의 평가를 후하게 하는 편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부각주의 위치에서 모시면서, 여상우의 칭찬을 들은 사람은 무림맹주를 포함해서 네 명밖에 되지 않았다.
“부각주.”
“네.”
“금목환에게 주는 애, 정무대(正霧隊) 말고 은영조(隱影組)에서 차출하지.”
여상우는 진심으로 금목환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듯했다. 같은 비연각 소속이기는 했지만, 정무대와 은영조는 차원이 달랐다.
정무대는 무림맹 무사에서 차출된 일반 대원이면, 은영각은 처음부터 비연각이 키운 정예들이기 때문이었다.
“맹주님께는 내가 보고하지.”
“그렇게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난 그렇다고 보네.”
여상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비연각주를 맡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분석했는가.
이청명의 목을 떨어뜨릴 때의 무공 실력, 정세를 보는 통찰력도 대단했지만, 이런 능력을 지금까지 숨긴 인내력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아마 이청명이 천주성의 눈 밖에 날 정도로 비리를 저질렀을 때 드러내려고 한 게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양철목은 그렇게 말하고도 찜찜한 표정이었다.
“근데 은영조 애들은 누구 밑에서 일할만한 애들은 아닌데요.”
양철목이 걱정을 표했다. 은영조 사람들은 지독한 훈련을 받는데다가, 생사가 걸린 임무를 많이 해서 하나같이 성깔이 있었다.
“그거야 뭐, 막내공자가 알아서 할 일이지. 버겁다 싶으면 나한테 담당을 바꿔달라고 얘기한다거나 말이야.”
여상우가 웃었다. 양철목이 듣기에는 어쩐지 그런 갈등을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