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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세가 절대무신-23화 (24/225)

23화 자네는 자유일세

23화 자네는 자유일세

내총관의 모습은 전생의 내 모습과 비슷했다. 벽에 팔다리가 묶여 아무 것도 못하는 모양새. 그래도 내총관은 감사해야 했다. 아예 같게 하려고 했으면 팔다리를 잘랐어야 했으니.

그러나 내총관은 내게서 어떤 감사함을 느끼기는커녕, 두려운 눈빛만 하고 있었다. 난 먼저 그가 주지해야 할 사항을 전달했다.

“첫째, 질문하지 말고 대답만 하게나.”

내총관은 바로 입을 열 예정이었는지 움찔했다.

“둘째, 팔다리 흔들지 말게. 철렁거리는 소리 듣기가 안 좋거든.”

이건 지어낸 강령들이 아니다. 내가 전생에 받았던 강령 그대로였다. 어떤 의미로 보면 족쇄보다 무거운 제약이었다.

“마지막으로, 거짓말하면 죽이겠네. 다 알아들었으면 고개 끄덕이게.”

내총관은 입에 재갈이 묶인 것도 아닌데 입술을 안에 집어넣고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깐 생각했다. 물어볼 게 너무 많아서 어떤 것부터 질문해야할지 고민했다.

허나 생각해보니 그건 불합리했다. 전생에서 내가 질문을 난해하게 받았던 것처럼 내가 내총관을 배려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난 내 머릿속에 있는 걸 끄집어내기만 하면 됐다. 정리하는 건 내총관의 몫이다.

“이청명은 대략 언제쯤 세가에 장로로 위촉되었는지. 이청명이 자신의 사람을 세가에 들여 넣은 건 언제부터인지. 내총관은 언제부터 이청명과 붙어먹은 건지. 이청명과 성가장은 정확히 무슨 관계였는지. 성가장은 무엇을 하는 곳이었는지. 이청명의 행동을 증빙할만한 자료가 있는지. 지금부터 시작해.”

난 무책임하게 질문을 던지고 의자에서 다리를 꼬았다. 내총관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당연하지만 이청명 목에 박아 넣을 비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비수치고는 좀 크다.”

지금 내 앞에는 수많은 은원보들이 동전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욕심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숫자였다.

아마 저 정도면 마을 하나가 삼 년은 풍족하게 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일 터다.

벽에는 친절하게도 비밀장부로 사용되는 죽간까지 걸려있었다.

죽간에 쓰인 기록과 은원보의 숫자는 일치했다. 꽤 세밀하게 관리되었던 듯했다. 이청명의 은퇴 자금을 모아놓는 개인 창고라고 추측됐다.

심지어 이러면서 성가장이라는 흑도 조직을 만들고, 그 흑도 조직은 용호산(龍虎山), 응담(鷹潭), 임천(臨川) 지역을 위주로 활동하며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더랬다.

그러한 기록들이 남아있는 의뢰 일지도 그 방에서 곧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성가장과 이청명이 주고받은 서찰들도 쉽게 찾았다.

이렇게 쉽고 빨리 찾을 수 있는 이유는 모두 내총관이 말해준 덕분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었지.”

죽음의 공포에 있으면 사람은 이성을 잃기 마련이다. 쓸모가 없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에 있는 말, 없는 말을 해버리고 만다.

심지어 내총관은 이청명과 심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아니었으니 바로 뱉어내게 되는 거다.

내총관도 나와 같이 어느 순간이 되면 운명은 이미 결정됐으니 발버둥 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될 거다.

나는 방을 나와서 내총관에게로 갔다. 내총관은 내가 들어오자마자 경기라도 들린 듯 떨었다.

이제 내총관에게 나는 맘대로 주무를 수 있고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고, 공자님. 오셨군요. 제가 말씀 드린 건 다 확인하셨습니까?”

늙은 목소리는 더듬거리며 떨린다. 그렇게나 경황이 없는 듯했다. 아니면 준비하고 있는 말이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난 뻔히 장부 죽간과 의뢰 일지를 팔에 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뒤늦게 확인한 내총관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짓는 본인은 미소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게는 고통을 참는 표정처럼 보였다.

“하하. 하. 찾으셨군요. 공자님. 다행입니다. 제가 설명 드린 대로 잘 찾으셨군요.”

나는 너무나 비굴해진 내총관을 바라보았다. 시종을 때렸다고 오만한 얼굴로 징계를 논하던 노인은 사라져버렸다.

저 노인의 심정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렇게 묶은 것이기도 했다.

난 마지막으로 물었다.

“더 말할 건 없나?”

“네! 전 정말 다 말씀드렸습니다!”

내총관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어차피 이청명 입장에서 내총관은 수족이었을 뿐이다. 나름 성가장에 대한 정보를 쉽게 찾은 것만 해도 내총관은 할 일을 다 한 거라고 볼 수 있었다.

“내총관. 나를 많이 섭섭하게 했었지. 우리가 다른 세력들에게 핍박받는 걸 이용하여 우리에게 주인 같은 대우를 해준 적이 없지.”

내총관은 갑자기 내가 이런 말을 꺼낼 줄 몰랐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것만은 그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아버님 때에는 충성심 있고 강직한 총관이었다고 들었는데. 참 아쉬운 일이야.”

나는 내총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반응은 바로 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이 노인네가 늙어서 망령이 들었나봅니다! 종 된 자가 주인을 모시지 아니하니, 어찌 미치지 않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내총관은 팔과 다리를 흔들어 철컹거렸다. 구속구가 없으면 분명히 머리라도 박았을 격함이었다.

난 내총관이 묶인 이후로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의 사죄도 분명 진심이었다. 목소리에 섞인 쇳소리까지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숙련된 살수나 정보원밖에 없다.

나는 조용히 내총관의 구속구를 풀어주었다. 내총관은 내가 이렇게나 쉽게 풀어줄 지는 몰랐었던 것 같다.

쿵!

바로 땅바닥에 내총관이 무릎을 꿇고 이마를 머리에 박았다. 어찌나 강하게 박았던지 이마가 찢어져 피가 났다. 나는 그걸 보며 말했다.

“그런데 사람 좀 업신여긴 게 죽을 죄는 아니지 않겠나.”

“아닙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죽기 싫어서 머리를 박는 주제에 죽음을 쉽게 논한다니. 참 모순적이었다.

“내가 자네를 용서한다고 한들, 그렇다고 어찌 세가 내로 다시 들일 수 있겠나. 자네는 자유일세.”

나는 내총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아무리 왜소한 노인이어도 나보다 키는 커서 팔을 쭉 뻗어야 했다.

내총관은 내 마음이 바뀔 새라 바로 방을 나섰다. 그는 정문에서 다시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이 은혜는 정말 잊지 않겠습니다!”

“잘 가게. 세가 안에 있는 자네의 옷가지나 금품 같은 건 챙겨갈 수 있으면 챙겨가게나.”

내총관은 이미 내 말을 들을 마음이 없다는 듯 연거푸 뒷걸음질을 치며 허리를 숙였다. 곧 내총관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내총관은 모르겠지만, 난 살려 보낸 게 아니었다. 이미 죽은 사람을 두 번 죽일 필요는 없으니까 보낸 거였다. 굳이 내 손을 더럽히지 않더라도 내총관은 이미 죽을 운명이었다.

혹여 내가 진심으로 용서를 해주고 세가 안으로 들였어도, 내총관은 죽었을 거였다.

어둠에서 눈을 돌려 남창 쪽을 쳐다봤다. 여기서 할 건 다 했다. 옥화산에서 여강까지 여섯 시진이 걸린 것처럼, 여강에서 남창도 여섯 시진이 걸렸다.

말을 타고 가면 한 시진도 안 걸려서 도착하겠지만, 걸어가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말을 타고 빨리 가봐야 밤이라 할 것도 없었다.

“밤길은 또 어떠려나.”

낮길도 그렇게 도적들이 많았는데, 밤길은 얼마나 험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

내총관은 달렸다. 분명히 아까까지는 사죄의 마음이 진심이었는데, 금목환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자 욕지기가 차올랐다.

언제 검술을 익혔는지는 모르지만, 그 녀석은 여전히 꼬맹이였다. 그런 놈이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놀았다니. 금목환 앞에서 울부짖고, 머리를 박고 안 해도 될 말을 구구절절 쏟아낸 게 수치스러웠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멍청한 녀석!”

수치심을 지워보려고 금목환을 향해 괜히 욕을 뱉어봤다.

그러니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심지어 자신이 모아놓은 돈이나 옷가지도 가져가라고 했다.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다른 성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죽음의 위기를 극복했으니 진정한 의미에서 새 삶이었다.

내총관은 그래도 최대한 성가장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여강도 몇 십 개의 촌으로 구성된 곳이다. 지금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면 산적들이나 흑도들에게 죽을 게 뻔하니, 여강 내에서 옆마을로 옮기는 게 나았다.

다음 날 낮이 되면 바로 남창을 들러서 자신의 금품만 빼오고 다른 성으로 이주를 갈 계획이었다.

내총관은 곧 마을과 마을을 연결 짓는 어귀에 들어섰다.

세가에서 가지고 나온 여비는 객잔 하루를 묵기에는 차고 넘치는 양이었다. 저 멀리 객잔임을 알리는 하얀 등롱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걸음이 빨라지려고 할 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저 혹시 말 좀 여쭙겠소.”

“깜짝이야. 기척 좀 하고 다니시오. 내가 무인이었으면 칼부터 나갔을 거요.”

“하하. 미안합니다.”

죽립을 쓴 남자는 눈과 코가 가려져 있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뭘 물어본다는 거요. 난 지금 바쁘니까 빨리 말하시오.”

내총관은 신경질을 내며 물었다. 가뜩이나 오늘 인생 최악의 경험을 했는데 말이 따뜻하게 나올 수 없었다.

죽립의 남자는 내총관이 원하는 대로 입을 움직였다. 그러나 질문의 내용은 내총관의 귀에 참 낯설었다.

“혹시 황금세가의 내총관 되시오?”

내총관은 그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등줄기에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진 것 같았다. 대체 이 여강에서 자신을 어떻게 알아봤다는 말인가.

죽립의 사내는 곧 품에서 누런 종이를 꺼냈다. 펼치기 전 펄럭일 때, 내총관은 종이 안에 그려진 용모파기가 자신의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음, 맞는 것 같군.”

“···누, 누구시오?”

내총관이 말을 더듬었다. 죽립의 사내는 갑자기 목소리가 작아지는 꼴에 웃음을 터뜨렸다.

“천주성에서 나온 사람이오.”

“···천주성?”

내총관은 금시초문인 조직 이름이었다. 자신은 그런 조직에 관여한 적이 없었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말이다.

“본 성은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되어서 말이오. 실패의 잔재들은 다 정리해야 된다오. 그래야 성주님이 중원을 들여다보실 때 편안하시니.”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내총관의 물음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눈 깜빡할 사이, 붕 뜬 내총관의 머리가 달빛에 비춰졌다.

철퍽.

풀과 흙으로 되어 있던 땅바닥이 곧바로 피칠갑이 되어버렸다. 엎어진 내총관의 몸은 벌레처럼 팔다리를 위아래로 잠깐 버둥거리다가 멈췄다.

죽립의 남자는 굳이 치울 필요성을 못 느꼈다. 길거리에서 사람이 죽어있는 건 중원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

상무당은 황금세가의 모든 건물을 통틀어 퇴근이 가장 늦고 출근이 가장 이르다.

상무당주는 적어도 상무당이 각이나 대급으로 올라야 한다고 항상 주장하지만, 실권 없는 자의 목소리니 공허하기만 했다.

“그래도 돈은 주니까.”

상무당주는 세가 내에 감도는 풍운은 알고 있었지만 굳이 관여하지는 않았다. 괜히 강호의 일에 엮이면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무당주는 어처구니없는 장로들의 지시가 있어도 그러려니 따르고는 했다. 황금세가의 돈은 그렇게 계획 없이 써도 썩어날 정도로 많았다.

상무당주는 상무당으로 가까이 가면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문 앞에 아이의 인영이 있는 것이다.

시동(侍童) 중 하나인 것일까. 가끔 급한 일이 있으면 저렇게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

벌써부터 상무당주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출근 전에서부터 일거리를 달고 오는 사람이 반가울리 없었다.

“거, 뭐하러 왔어!”

멀리서부터 짜증을 확 담은 상무당주가 문 앞의 아이에게 외쳤다.

아이는 등을 돌려서 자신 쪽을 바라보았다. 상무당주는 가까이 가면 갈수록 미간을 좁혔다. 본인이 지금 환각을 보는 것일까.

“상무당주. 건의안 낼 거 있는데.”

어째서 저 여독이 잔뜩 쌓인 것 같은 막내공자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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