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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세가 절대무신-21화 (22/225)

21화 화지장개(花之將開)

21화 화지장개(花之將開)

황금세가의 건물에는 대부분 사랑방이 있고, 그건 등령당도 예외가 아니다.

등령당은 우리의 혈족, 조상들만 있는 곳은 아니었으니까. 직계나 가족이 아니어도 세가의 공신이면 같이 합사(合祀)를 하게끔 해놓았다.

그리하여 등령당은 황금세가의 건물 중에서도 외부 출입자가 많은 편에 속했고, 사랑방이 제일 잘 갖춰진 건물 중 하나였다.

우리는 각자 잘 방을 정했고, 난 씻은 다음 내 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완전히 젖히기도 전에 문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오래도 씻는다.”

“피 냄새가 안 빠져서요.”

나는 대답하면서 문 안쪽으로 들어왔다. 내 방에 먼저 들어와 있던 선객은 곽진도였다.

“네 검술, 놀랍더구나.”

“보고 계셨습니까?”

“아니. 시체들 치우면서 검상 보면 실력이 보인다. 삼 초식까지는 정말 나무랄 데가 없더구나.”

난 납득했다. 내가 그걸 알아볼 경지는 안 되지만 분명히 곽진도 정도의 고수라면 시체의 절단면만 봐도 상대방의 경지를 알 터였다.

“그리고 보고 있었냐는 무슨 질문이냐. 너희들이 위험에 처해있는데 지켜만 볼 사람으로 보이느냐?”

“약조한 시간보다 늦어서 여쭤본 것뿐입니다.”

“늦었다고 뭐라 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

곽진도는 내 얼굴을 가만히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 표정이 매양 그러니 진담인지 아닌지 알 수가 있나.”

“진심입니다. 더 늦으셨어도 아무 일 없었습니다.”

어차피 천주성은 나를 시험한 것뿐이었으니까. 내가 천주성이라는 집단을 몰랐으면 나도 사력을 다했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곽진도는 영 찝찝한 표정으로 품에서 자색 옥합(玉盒)을 꺼냈다. 옥합은 아직 열지도 않았는데도 향기로운 냄새가 방 안에 가득 퍼졌다.

“뭐, 거짓이라고 해도 날 더 원망하지는 말려무나. 이것 때문에 늦은 거니까. 이걸 가져간다니까 어찌나 늙은이들이 지랄을 하던지···”

그럴 법도 하다. 영약은 그 조직이 가진 연단술(練丹術)의 총합이었으니까. 그야말로 비밀 중의 비밀이다.

나는 그러나 곽진도에게 부탁할 때 못 가져와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훌륭한 성능을 가진 영약이지만, 유일무이한 효능을 가진 건 또 아니었으니까. 나중에라도 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어도 이렇게 빨리 얻으니 기분은 좋았다.

곽진도는 옥합을 내게 넘겨줬고 난 그걸 두 손바닥으로 받들었다.

“감사합니다.”

난 주저하지 않고 옥합을 열었다. 옥합과 같은 색의 작은 단약이 중앙에 박혀있었고, 주변은 금실로 자수되어있어서 화려했다.

“이게 해모환(海母丸)이군요.”

“그래. 본파에서는 소림의 대환단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약이라고 자부심이 엄청나지. 중원에서는 이런 게 있는지조차 잘 모르지만 말이다. 고작해야 해자환 정도 알겠지. 그건 명문세가들이 벌모세수용으로도 많이 쓰니까.”

곽진도는 그렇게 말하고 잠깐 머뭇거리고 말을 이었다.

“근데 솔직히 나도 지금 너한테는 해자환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해모환이 대환단급의 효력을 낸다는 건 생사현관이 타통하여 상단전이 열린 무인들한테 해당되는 얘기거든.”

“네. 그래서 가져다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산중턱이라 그런지 열린 창문 사이로 추운 바람이 들어왔다. 곽진도는 외풍에 얼어붙은 사람 마냥 잠깐 멈췄다.

“지금, 네가 상단전이 열려있다고?”

“네.”

“···허.”

곽진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뭔가 말을 계속 하려고 했지만, 흠, 허, 음, 이런 탄성만 내고 말았다. 난 차분하게 아이가 첫 걸음을 떼는 걸 지켜보듯 기다렸다.

“어린 나이에 생사현관이 타통되는 경우가 정말 드물게 있다고는 들었지만 보는 건 처음이라.”

“그런가요.”

“보통 어린 나이에 생사현관이 열리면 죽기 마련이거든. 천령개가 열려서 태어나는 태아들이 그런 경우지. 그건 많이 들어보지 않았느냐?”

“그렇죠.”

어미의 자궁에서부터 선천적으로 상단전이 열려있고, 양분을 안전한 기해가 아닌 상단전으로 받다보니 연약한 천령개가 열려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근데 후천적으로 열리는 경우는 사람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광증이 들이찼을 때거나, 그 다음은 무곡성(武曲星)을 타고난 사람이거나···”

곽진도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눈치를 봤다. 왜 저렇게 눈을 홉뜨는지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무곡성을 타고난 사람들은 백이면 백 천재라고 역사에 남은 영웅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군. 그러면 네가 보여준 오성도 설명이 되는구나.”

곽진도는 알아서 납득한 것 같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전생의 광증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야 무곡성이라고 믿게끔 하는 게 차라리 나아보였다.

“제가 무곡성인가보죠.”

“저번부터 느꼈지만, 너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담담하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내가 무곡성인지, 광증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현재 내가 기이하리만큼 상단전에 치우쳐져 있다는 것과 해모환의 효능이었다.

해자환은 곽진도의 말대로 벌모세수, 즉 체질을 바꾸는 영약이었다. 해모환은 몸이 아닌 기질을 바꾼다. 다른 영약들과는 다르게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의 균형을 맞춰주며 불필요하게 낭비되고 있는 내공을 정상으로 돌린다.

상단전이 초감각의 개념이면, 하단전은 묵직한 강건함을 맡는다. 이번에 싸우면서도 느낀 거지만, 이렇게 내가 진법의 함정을 파놓지 않는 이상 이기기는 힘들었다.

“아무튼 호법 좀 부탁드립니다.”

난 그 말과 함께 바로 보라색 환단을 입 속에 털어 넣었다. 상단전과 중단전, 하단전이 동시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면서 뿜어져 나왔다.

해모환이 좋은 영약인 건 맞지만, 얼마나 얻어갈 지는 이 기를 얼마만큼 길들이냐에 따라 달려있었다.

인생을 다시 살면서부터, 내가 헛되이 살지 않은 만큼 얻어갈 테다.

나는 곧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

“미치겠군.”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약을 먹고 운기조식을 하는 금목환을 바라보며 곽진도는 한숨을 쉬었다.

이 제자는 영리한 건지, 아니면 순수한 건지 모르겠다. 처음에 자신에게 진법을 보여줬을 때도 그랬다. 대체 뭘 믿고 그런 힘을 보이는 건지. 그리고 또 대체 뭘 믿고 영약을 저렇게 한 입에 삼키는지.

자신을 믿고 말고를 떠나서, 영약이라는 건 결국 외부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거다. 약과 독은 그저 용량의 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약을 먹고 주화입마에 걸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아무리 심지가 강건한 사람도 영약을 먹기 전에는 주춤하는 법인데, 이 꼬마는 그런 것도 없다.

“무슨 신기라도 들린 건 아니겠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는 금목환의 얼굴을 찬찬이 바라보았다. 흰 피부에 갸름한 얼굴, 커다란 눈과 얄쌍한 코. 머리만 기른다면 영락없이 여자 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곱게 생겼다.

근데 나오는 말만 보면 다 무뚝뚝하고, 소름 돋을 정도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니 역시 관상은 믿을 게 못 됐다.

“···정말 무곡성이라도 된다는 건가.”

웬만한 무인들은 영약을 먹을 때 바깥으로 기를 좀 내뿜고는 한다. 본능적으로 과유불급이라고 느낄 때 위기를 관리하는 거다. 근데 지금 금목환은 기를 한 움큼도 흘리지 않고 운기조식을 돌리고 있었다.

이 제자를 볼 때마다 의문스러운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뭐든 열심히 해서 미워할 수는 없는 녀석이라고.

한 시진, 두 시진이 지나고 옥화산 나뭇가지의 주인이 꾀꼬리에서 올빼미로 바뀔 때까지도 금목환은 눈을 뜰 생각을 안했다.

그리고 인시. 금목환의 머리 위에 무언가 형상이 떠올라 잡히기 시작했다. 곽진도는 그걸 보고 큰 소리를 내며 기함을 할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건 아직 꽃망울이 터지지 않은 꽃봉오리였다.

‘···진짜 말도 안 되는 녀석이군.’

화지장개(花之將開). 저건 삼화취정이나 오기조원처럼 무인들의 경지가 아니었다.

깨달음의 성취가 깊지만 육체적인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때 나오는 현상 중 하나였다.

당연히 어린 기재들에게서 나오긴 하지만, 그건 약관(弱冠), 아무리 이르다고 해도 지학(志學) 때 나오는 것이었다.

근데 지금 금목환의 나이는 열둘이고, 무공을 배운지는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대체 자신은 어떤 괴물을 제자로 받아들인 걸까. 곽진도는 점점 선명해지는 꽃봉오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아침이었다. 운기조식을 끝내고 바로 잠에 든 것 같았다. 그만큼 영약을 소화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운기조식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어둠인지 호수인지 모를 곳에 띄워져 있는 꽃봉오리를 봤던 기억이 났다.

몸의 소주천을 해보니 확실히 상단전에 비해 말라있던 하단전이 충만해졌고, 중단전 역시 단단하게 균형의 역할을 하는 통로로 변해 있었다. 내가 예상한 약효보다 훨씬 뛰어났다.

난 바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에는 이미 형제들과 곽진도가 다 나와 있었다.

“피곤했나보구나. 네가 제일 일찍 일어나있을 줄 알았다.”

먼저 말을 건 건 금월상이었다.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다가 잠깐 흠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너한테서 위화감이 들었다.”

난 살짝 눈을 찡그렸다. 영약의 기운이 퍼지고 있는 것일까. 허나 그저 금월상은 의아한 눈빛을 하고 말았다.

곧 금수린과도 인사를 나눴다. 어제 약간 친근하게 느껴졌어도, 오늘 어색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금수린 역시 가까이서 날 보더니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너 원래 이렇게 예쁘게 생겼었나?”

“네?”

“아니, 예쁘게 생긴 건 알고 있었는데 오늘 좀 더한 느낌이네.”

남자가 가장 반응하기 힘든 칭찬이 외모가 예쁘게 생겼다는 것 아닐까.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곽진도가 중간에 꼈다.

“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자. 집에 가야지.”

“네.”

곽진도의 개입으로 이야기는 마쳐졌다. 곽진도는 날 슬쩍 보더니 눈을 돌렸다. 뭔가 찜찜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근데 곽진도는 가끔 날 그런 식으로 봐서 딱히 신경 쓰일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렇게 등령당을 벗어났다. 떠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어제의 기억을 굳이 곱씹을 필요가 없다고 암묵적으로 합의를 한 듯 했다.

원래 올라온 곳으로 바로 내려가려고 했지만, 내 제안으로 좀 완만한 경사로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제의 후유증으로 금수린과 금화청의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금수린은 내게 눈짓으로 고맙다고 인사했고, 금화청은 쳐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길을 돌아서 하산하는 와중, 우리는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됐다.

바로 죽어있는 등령당주였다. 늙고 빈약한 등에는 치명적인 검상이 있었다.

역시 우리는 아무 말도 안 한 채로 땅을 파서 등령당주를 묻어주고 장사를 지냈다. 사람을 묻는 건 익숙했다.

이 이름 모를 노인은 분명 세가의 충신이었을 터였다.

등령당주는 다른 건물의 장과 다르게 한 가지의 능력만 증명하면 됐다. 바로 세가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이 노인은 아무 잘못도 없었을 터인데.”

다 묻고 나서 처음으로 입을 연 건 금월상이었다.

당연한 말이었다. 그저 노인은 운이 안 좋게 등령당주였고, 성가장이 등령당으로 왔을 뿐이었다.

“···뭔가 화나는구나. 진정한 세가의 사람들이 이렇게나 보답 받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는 걸 보니까 말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난 불룩 솟은 무덤을 보며 말했다. 늘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바르지 않았다. 잘못된 거였다. 난 잘못된 걸 바로잡고 싶었다.

“그래서 세가를 바꾸고자 하는 겁니다.”

금화청과 금수린은 날 홱 돌아보았다. 금월상과 곽진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 둘은 처음 듣는 얘기였을 터다.

그 이후로 우리는 다시 아무 말 없이 또 하산했다. 그러나 난 그들과 방향이 달랐다. 산중턱에서 나는 멈춰서 말했다.

“전 여기서 여강을 들렀다가 돌아가겠습니다. 스승님과 형님들은 먼저 본가로 가시지요.”

금월상과 금수린은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이었지만, 난 곽진도의 표정만을 살폈다. 곽진도는 가만히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물에는 짐승이 가둬졌다. 짐승의 목숨을 빼앗을 비수를 챙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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