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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세가 절대무신-19화 (20/225)

19화 천주성

19화 천주성

마부의 눈이 나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나도 마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같이 그러고 있으니 마부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이렇게 재미있는 친구가 있는데 어찌 신경을 안 쓰겠나.”

“천주성인 건 인정하는 건가?”

“왜 우리의 자랑스러운 본 성을 숨기겠나. 천주성은 천주성인 것을.”

나는 경계했다. 천주성의 무인이 온 건 예상 밖이었다. 난 바로 한 치도 안 되게 발을 떼고 진각을 밟았다.

쿵, 소리와 함께 모래먼지가 원형으로 일어났다. 하얀 연무 역시 서서히 떠올랐다.

“그 재주는 아까 봤다네. 물론 두 번 볼 가치가 있는 재주긴 하지.”

마부는 주변을 둘러봤다. 하얀 안개에 손을 휘저어보는 등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대체 몇 명이 붙어서 작업했을지 감도 안 오는군. 정교한 진이야.”

그래도 마부는 나 혼자 이 천수유곡진을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대답도 안 하고 그의 호흡을 주시했다. 숨을 다 내쉬고, 다시 호흡하려하는 그 순간 나는 땅을 박찼다.

다시 쾌검이 날아간다. 아까와 똑같은 궤적, 똑같은 속도지만 느낌은 다를 터였다. 천수유곡진을 알고 있으면 내공을 발출하지 못할 테니까.

“정말 맹랑하구나.”

마부는 웃었다. 마부의 손이 내 검면을 후려쳤다. 곧바로 내 검로와 자세가 무너졌다. 내공도 없이 어찌 저런 게 가능한지. 이게 고수의 영역인가 싶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돌려지는 회전력을 이용해 몸을 띄웠다. 공중에 비스듬하게 엎드린 자세가 됐다. 회수한 검에서는 의련만장이 펼쳐졌다. 검은 무지개의 궤적을 그렸다. 언뜻 보면 단순한 베기였다. 그러나 그 안의 변초가 많았다.

“남해십이검은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사특하구나.”

마부는 본인 허리춤에 있는 검을 출수했다. 내공을 담지 않은 게 분명한데도 마주한 내가 보기에는 유성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난 바로 초식을 멈추고 왼편으로 몸을 굴렀다.

“하하. 나려타곤까지. 정말 재밌는 친구로군.”

나려타곤. 무인들의 명예를 가장 빠르게 떨어뜨릴 수 있는 초식. 사실 초식도 아니고 그냥 굴러서 피하는 게 나려타곤이었다.

그래도 여타 무인들과 달리 마부는 경멸하는 느낌은 아니었고, 그냥 순수한 웃음인 것 같았다.

“자네가 착각하는 게 있네.”

마부는 날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천수유곡진은 만능이 아니야. 어중간한 무인들을 잡는 진법이지. 여기에 넘실거리는 경기 역시, 강한 내공으로 제압할 수 있다네. 뜨거운 불이 웅덩이를 말리는 것처럼 말이야.”

난 대답을 안 하고 일어났다. 그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천주성의 사람이 올 줄은 몰랐을 뿐이다. 만약 천주성의 사람이 올 줄 알고 있더라도 그 이상은 준비하지 못했을 거다.

고수에게 유효한 진은 얼마 없기도 하거니와, 나도 혼자 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복잡하고 정교함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도 다 무용지물이라는 거지.”

마부는 내가 했던 것처럼 진각을 밟았다. 난 밟은 곳의 부분에서 원형 모래먼지가 일었지만, 그가 진각을 밟자 등령당 앞의 마당 전체에 있는 흙이 펑 튀어 올랐다.

그의 말대로 경기는 흙에 조금 반항해 엉기는 듯싶더니 곧 대기 중으로 흩어졌다.

“아무튼 재밌었군. 자네가 막내공자인가? 많이 바뀌었다는 보고는 들었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마부는 말하면서 나를 슬며시 바라봤다. 내가 대답을 안 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꽤 과묵한 친구군.”

“할 말이 없을 뿐이다.”

“자네의 이름이 뭐였지? 들었는데 기억이···”

“금목환.”

“아,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마부는 기억이 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여기서 여유로운 건 마부밖에 없었다. 옆에 붙어있는 금월상, 중문 근처에 있는 금화청, 금수린 모두 얼어있었다.

“난 천주성의 목단화라고 하네.”

마부가 말했다. 난 최대한 덤덤한 척을 했지만 속으로는 꽤 놀랐다. 목단화라면 그 천주성의 십이당주 중 하나였다. 물론 그게 미래의 얘기인지, 지금도인지 모르겠지만 거물이라는 건 확실했다.

난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 여기 왜 왔지?”

“심심해서 잠깐 바람 쐬러 나온 거라네.”

“귀찮게 마부 분장까지 하면서 말인가?”

“원래 유흥은 번거로울수록 재밌는 법이지.”

“인피면구까지 쓸 정도면 유흥을 상당히 즐기는 편인가보군.”

내 말에 목단화는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얼굴에 손을 갖다 댔다. 목 끝에 손톱을 세워 긁더니, 곧 가죽 같은 게 들렸다. 벗겨진 가죽은 이마까지 올라가서 떨어졌다.

내가 말한 대로 인피면구였다. 마부의 얼굴이 팔랑거리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세가에서 지나치며 본 저 마부는 저렇게나 허무하게 죽은 거였다.

“어떻게 알았지? 인피면구인 거 티 안 나지 않았나. 본 성의 기술이 그렇게 간파하기 쉽지 않은데.”

인피면구를 벗은 남자는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를 가진 냉막한 상이었다. 이립(而立)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로 생각보다 나이는 그렇게 많이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천주성이라고 완벽한 건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한 질문은 그런 게 아니야.”

난 아까의 질문을 더 직설적으로 바꿨다.

“이청명은 버려지는 패였을 텐데 어찌 여기까지 나왔냐고 묻고 있는 거다.”

내 말에 목단화는 침묵하고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 담긴 호기심이 더욱 짙어진 것 같았다.

목단화는 일단 시치미를 뗐다.

“무슨 소리인가?”

“천주성 사람이 진실을 가리려 드나.”

“허허.”

“천주성은 이청명을 버렸지?”

내 말에 마부의 눈가의 주름이 깊게 패였다. 목단화는 반문했다.

“어찌 그리 생각했지?”

“이청명이 나한테 물을 먹었다는 소식에 실망한 사람들이 많을 거 아니야. 이청명은 천주성 사람도 아니고 천주성의 일을 받아서 하는 사람인데, 그가 천주성의 명예를 더럽힌다고 생각했겠지.”

“음.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는 있는 법일세.”

“더 중요한 건 이청명이 성가장에 대한 걸 보고하지 않았을 거야. 천주성은 사적으로 무리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지 않나.”

내가 이렇게 말하자 목단화는 잠깐 말을 멈췄다. 이제는 나를 바라보는 눈에 호기심보다는 신기함이 담겨 있었다.

“···본 성에 대해서 꽤 많이 알고 있구나. 개방의 팔결하고 연이라도 맺은 것일까.”

목단화는 방금 말로 천주성이 이청명을 버렸다는 걸 시인한 셈이었다.

금월상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천주성은 또 뭐고, 이청명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있었고 이런 것들이 궁금할 터였다. 하지만 이건 천주성이라는 조직의 특성을 알고 있지 않으면 이해가 힘들었다.

그때 목단화의 미소 짓는 표정이 사라졌다. 입꼬리가 쳐지자 그제야 냉막한 인상하고 어울렸다.

“근데 너무 많이 안다고 자랑하는 건 아닌가. 한 치 앞을 못 보는군.”

목단화는 내게 대답을 원하지는 않았다는 듯 천천히 걸어왔다. 나는 검을 사선으로 하여 가슴 앞으로 바투 끌어올렸다.

“내가 볼 때 넌 본 성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다. 어린싹을 뽑는 취미는 없지만 내가 처단을 해야겠구나.”

목단화가 내게로 느릿하게 걸어올 때였다. 뒤쪽에서 하늘을 향해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옆을 바라보니 금월상이었다.

“···너한테 물어볼 게 많지만, 지금은 저 자를 해치우는 게 먼저겠지?”

아니. 우리 둘로는 절대 해치울 수 없는 사람이었다. 허나 금월상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두 손목을 엮어 이상한 자세를 했다. 따로 배운 권장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목단화는 이제 지척까지 다가왔다. 난 수비를 목적으로 홍곡유수의 초식을 펼쳤다. 틈이 안 보인다고 공격을 하는 건 내 생각에 의미가 없었다. 그냥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는 것과 다름이 없다.

실제로 곽진도 역시 강자 앞에서는 함부로 공격하지 말라고 했다. 이길 가능성은 거의 생각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수비를 하면서 틈이 나오기를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핫!”

그 긴장되는 상황 속에 제일 먼저 움직인 건 금월상이었다.

기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것과 별개로, 내 내공은 일천하기 그지없어서 뛰쳐나가는 금월상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파바바박!

팔과 팔, 손과 손, 다리와 다리가 얽히며 박투가 벌어졌다. 살결끼리 부딪치는 소리보다 나무 둥치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내가 너무 무신경했나보군. 첫째 공자.”

목단화는 금월상의 한 수를 받아주며 웃었다. 박투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누가 봐도 목단화가 받아주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검을 쓸 때와 달리 목단화의 인내심이 많이 낮아진 것 같았다.

내가 홍곡유수를 해운무봉으로 바꿔 출수하기도 전에 금월상은 땅바닥에 메쳐졌다.

금월상의 덩치는 성인과 비교해도 큰 편이었기에 곰이 떨어지는 것 같은 묵직함이 있었다.

“컥!”

등부터 떨어진 금월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말 말 그대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월상은 몸을 돌려 바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목단화는 발끝으로 금월상의 어깻죽지를 눌렀다. 강하게 밟은 것도 아니었지만 금월상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잘못 건드리면 팔 자체를 못 쓸 수도 있을 만큼 치명적인 혈이었기 때문이다.

“으···”

금월상의 분함을 담은 신음이 울려 퍼질 때 나는 해운무봉을 출수했다.

천수유곡진에서도 안 먹혔기에 다시 먹힐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다만 금월상의 몸에서 발을 떼게끔 하는 게 목적이었고, 다행히 목단화는 한 걸음 물러섰다.

당연히 이겨먹을 생각도 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시간을 끌어야 했다.

천주성을 상정한 건 아니지만 나도 최후의 안배를 생각해놓은 게 있었으니까.

난 곧바로 남해십이검의 삼 초식을 하나로 관통하여 목단화에게 펼쳤다. 그리고 내공이 흘러가는 대로, 난 계속 목단화에게 검을 날렸다.

목단화는 그저 웃으면서 내 검을 막기만 하고 있었다. 내 검술이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그는 막으면서 발도 바꾸지 않고 여유롭기만 했다.

난 그때 목단화의 어깨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느꼈다.

“유흥은 끝났어.”

내가 바로 말했다. 목단화는 의아한 표정을 해보였다가 바로 굳었다. 그 역시 느낀 것이다.

남해의 냄새를 풍기며 파도처럼 오는 거대한 존재감을 말이다.

목단화는 순식간에 내게서 몸을 멀리 떼고 몸을 반대로 돌렸다.

돌리는 순간 폭음이 옥화산을 진동시켰다.

쾅!

난 그 틈을 타서 금월상을 부축해서 뒤로 넘어갔다. 끌어서 같이 가려는 순간 풍압이 내 등을 밀어서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금월상도 큰 부상을 입은 건 아니어서 균형을 잡아줬다.

순식간에 몇 합이 오갔다. 내게는 이제 익숙한 남해십이검이었다. 다만 나와 같은 무공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차원에 있을 뿐이었다.

날아온 사람은 목단화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스승 앞에서 제자를 해하려고 하다니. 네놈이 간장(肝臟)은 두 개라도 되는 모양이구나.”

목단화와 검을 마주친 사람은 다름 아닌 외총관, 그리고 내 스승님 곽진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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