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세가 절대무신-17화 (18/225)

17화 이제는 안 웃는구나

17화 이제는 안 웃는구나

금월상은 금화청과 금수린의 뒷덜미를 양손으로 든 다음 내가 있는 쪽으로 데려다 놨다.

“···호오. 무공을 배우고 있었구나. 이건 처음 알았는데.”

사내가 쓴 복면 안 눈빛이 살짝 빛났다.

목소리는 일부러 기를 섞어 비틀어서 낸 게 명백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금화청이 성난 얼굴로 물었다. 금화청 역시 진기를 내뿜고 있었다. 금월상이 익힌 이궁천뢰심법이었다.

곽진도가 오자마자 금화청을 내리 꽂은 이유를 이제 알게 됐다. 정말 어지간히 연습을 안 했는지 진기가 흩어지는 건 물론이요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진기가 바람 스치는 잔디처럼 떨리는 게 그의 분노만은 확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둘째 공자는 우리가 아는 거랑 똑같고.”

무공을 배운지 얼마 안 된 나도 미약하다 여기는데, 복면의 무인들은 당연히 하찮게 생각하고 있었다.

금화청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 역시 본인의 수준은 아는지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게. 우리의 주 목적은 요즘 오만하다고 소문난 막내공자니까. 그래도 스쳐가다 한 대씩은 맞을 수 있으니 조심들 하고.”

선두에 선 복면인의 말에 사람들이 낄낄거렸다. 전부 목소리가 비틀려 있어 귀신 들린 숲이라도 들어온 것 같았다.

그와 함께 복면인들과 형제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로 몰렸다.

나는 복면을 쓴 사람들의 뚫려있는 눈을 하나씩 바라봤다. 하나 같이 눈동자가 서늘한 게 여간 감정이 둔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저 눈에도 두 부류가 있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경우, 두 번째는 많은 사람을 죽여서 생명이 하찮게 보이는 경우.

저들은 두 번째인 게 분명했다.

섬돌과 계단이 워낙 높아 그들은 모두 내 발 아래에 있었다. 난 좌중을 오시했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 거구나.”

“꽤 침착한 흉내를 내는군. 확실히 애가 지나치게 어른을 따라하면 보기 안 좋지. 장로들이 안 좋게 볼만도 하겠어.”

“이청명 장로 얘기하는 걸 굳이 돌릴 필요가 있나.”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군.”

복면이 괴이하게 이지러졌다. 아마도 웃고 있는 것이리라.

성가장 사람들이 분명한 그 복면인들은 일말의 긴장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갈수록 긴장하고 위축되는 건 금월상을 비롯한 내 형제들이었다.

“형님들, 누님.”

난 복면인에게서 눈을 돌리고 형제들과 눈을 한 번씩 맞췄다. 형제들의 눈동자는 굳어있었다. 그들이 늘 상상해오던 최악의 결말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으니, 어찌 안 얼 수 있겠는가.

“신주(神主) 앞에서 소란을 떠는 점. 용서 바랍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냐?”

금월상이 물었다. 그나마 형제들 중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건 금월상이었다. 금화청과 금수린을 반 발자국 뒤에 놓고 검을 꺼내놓고 있지 않은가. 검극은 흔들리고 있었지만 가상했다.

“편히 쉬시지요. 제가 부른 이들이니 제가 맞이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너 혼자 말이냐? 그건 말도 안···”

금월상이 놀란 눈으로 내 어깨를 잡았지만 난 말을 이었다.

“칼을 주시지요. 형님. 그거 하나면 됩니다.”

“···이 무슨, 그럼 내가 막내 뒤꽁무니에 숨어야 된다는 것이냐?”

금월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금화청과 금수린은 입도 떼지 못했다.

전생이라면 나도 이 상황에서 그랬을 거다.

언제든 내리쳐질 수 있다. 눈 밖에 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어릴 적부터 뼛속 깊이 자리 잡은 공포를 그들은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극복할 기회조차 없었다.

“전 형님을 믿습니다. 형님이 저를 믿는 만큼, 저를 믿어주시죠. 제가 요 근래 형님께 실망 드린 적은 없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난 금월상의 손에서 검을 뺏듯이 가져왔다. 검병에는 땀이 어찌나 축축하게 묻어있던지, 옷으로 한 번 닦아야 할 정도였다.

이제 형제들에게 볼 일은 끝났다. 난 몸을 돌려 성가장 무인들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사당의 마루에서 계단으로, 계단에서 주춧돌로.

“뭐하자는 건가?”

복면인이 막상 내가 가까이 오니 경계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에 있을 수도 있는 곽진도를 의식하는 것 같았다.

“안심해라. 외총관은 없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왼쪽 발에 내공을 담아 진각(震脚)을 찍었다. 백색 모래먼지가 응당 올라올 만큼만 올라오는 듯하더니 그치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얼굴이 거의 가려진 복면인에게서 당황이 보였다. 모래바람의 사이에서, 난 복면인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천수유곡진(千殊幽谷陣). 강호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진법이 옥화산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

명목상 성가장주를 맡고 있는 문호현은 금목환의 예상보다 더 당황하고 있었다.

금월상이 무공을 익힌 것도 살짝 놀라기는 했다. 동작을 보았을 때 하루이틀 훈련한 게 아닌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판세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다. 저 정도면 두 명만 붙으면 충분히 제압 가능할 정도였다. 또 실전 경험은 전무한 듯 겁에 질린 표정을 벌써 드러내니 승패는 이미 갈린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금목환이라는 놈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여리여리한 몸뚱이와 얼굴, 겨울 나뭇가지마냥 앙상한 팔뚝과 다리.

하나도 경계할 게 없어보였던 그는 오히려 침착했고 진법까지 준비한 듯싶었다. 금목환이 진각을 구르자 진법이 발동됐으니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너, 대체 뭐하는 녀석이냐?”

희뿌옇게 안개가 내려앉았지만 시야가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금목환은 여전히 자신의 시야 안에 있었다.

문호현은 은밀하게 뒷발에 힘을 실었다. 기습적으로 박차고 나가면 반응도 못할 거리였다.

“그러다 죽어.”

금목환은 자신이 든 검으로 문호현의 뒷발을 가리켰다.

“정말 방자함이 도를 넘는구나.”

격분한 문호현이 땅을 박차고 나가려고 할 때, 철퍽 소리와 함께 저 옆에서 누군가가 땅으로 엎어졌다.

쓰러진 사람은 당연히 성가장의 일원으로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엎어진 방향으로 보면 금목환을 향해 달려든 것 같았다. 성가장의 무사는 복면 틈 사이로 선홍색 피가 흘러나오고 팔과 다리를 떨었다.

쿠구구궁!

넘어진 사람은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전염이라도 되듯이 하나씩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모두 똑같이 피를 흘리고 사지를 떨었다.

저 상태는 문호현뿐만 아니라, 모든 무인이라면 아는 증상이었다. 주화입마. 몸 안에 있는 내공을 잘못 운용하면 벌어지는 일이었다.

심지어 얕은 주화입마면 죽은 피, 즉 검은 피를 뱉는데 진원지기가 담긴 선홍색 피를 뿜고 있으니 무인으로서의 삶은 끝장났다고 봐야 했다.

“···네놈이 한 일이냐?”

문호현은 금목환을 바라봤다. 금목환은 주저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법이 한 일이지.”

오만함에 가까운 여유로움에 문호현은 바로 출수를 할 뻔했으나, 지금 이 진법이 어떤 진법인지 모른다면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쿵!

그때 또 한 명이 땅으로 떨어졌다. 아까와 다른 점은 높이 도약했다가 갑자기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그 역시 똑같이 피를 내뿜고 사지를 비틀고 있었다.

“내공, 내공입니다!”

누군가가 급하게 소리쳤다. 문호현도 방금 쓰러진 사람의 발에서 푸른 진기가 도는 걸 봤다.

“내공을 쓰면 쓰러지는 것 같습니다!”

성가장의 사람들은 재빨리 서로 정보를 공유했다.

허나 문호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본인이 알고, 경험해봤던 진법은 고작해야 환각을 보여주거나, 환청을 들려주거나 하는 선에서 끝났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몸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진법은 아예 다른 차원의 진법이었다.

“이게 대체, 뭔 진법이지?”

“내공을 싫어하는 진법이지.”

금목환은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설명해준다고 해도 알아듣지도 못했을 거였다.

지금 부옇게 주변을 둘러싼 하얀 뭉치들이 단순한 안개가 아니고, 내공과 반대되는 성질의 경기(勁氣)라는 걸 어찌 이해할 수 있으리라.

경기는 내공이 열린 기맥으로 순식간에 비집고 들어간 다음, 잠깐 동안 비워진 세맥을 채운다. 단전은 본능적으로 이질적인 기운이 들어오니 내공을 뿜어내고, 경기는 그에 반발하여 맞서니 주화입마가 터지는 것이었다.

천수유곡진은 이렇게 간단하면서 흉악한 묘리로 강호 최대의 사상자를 낸 거다.

“그게 너의 한수였구나.”

“그래.”

“놀랍긴, 놀랍구나.”

순식간에 단련된 무인 스무 명이 일곱 명으로 줄어들었다. 말도 안 되는 진법이었다.

“결국 내공만 안 쓰면 된다 이거지?”

“씹어죽일 꼬맹이 녀석!”

문호현이 나가기도 전에, 금목환을 이미 둘러싼 사람들이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내공을 두르지는 않았다.

“잠깐!”

문호현은 사람들의 검로를 보고 아연했다. 동료를 주화입마로 눕혀서 그런 건지, 본인들에게 공포심을 줘서 그런 건지는 모르나 완벽히 급소를 향하고 있던 거다.

분명 이청명 장로는 죽이지는 말라고 당부했었다. 이청명 장로는 본인의 지시를 어기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물론 아직까지 그래본 적은 없지만, 가끔 나오는 이청명의 서늘함은 문호현의 등줄기를 차갑게 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행동은 삽시간이었다. 그들의 검로는 이미 멈출 수 없는 거리를 뛰어넘었고, 각자의 급소를 향해 가고 있었다. 곧 금목환의 몸이 여러 부분으로 관통될 게 분명했다.

급박한 상황이라 그런 걸까. 멍청한 놈들이 지르는 검이 느리게 보였다. 그들은 자신이 뱉은 말도 아직 듣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때, 문호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렇게 느리게 움직이는 와중, 한 발 늦게 출수한 금목환의 검이 더 느리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 무슨···”

자신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나올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원래 금목환이 있던 자리에는 검으로 솔잎 모양으로 엮여있었고, 금목환은 저 멀리 뒤로 물러나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정작 검을 가까이서 휘두른 사람들은 하나도 금목환의 움직임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허나 멀리서 본 문호현은 금목환의 움직임을 봤다. 그는 수많은 칼날이 날아오는 상황에서 검으로 머리 위를 막고 오히려 저점으로 돌파하려고 했다.

다만 위에서 내려오는 압박이 너무 심해서 몸을 빼 나온 거다. 간단해보였지만 열둘의 아이가 보이기에는 낯선 동작임이 분명했다.

“방금은 실수했네.”

금목환은 목을 까딱였다.

“차라리 해운무봉으로 일점돌파를 하면 나았겠다.”

“이 자식, 혼자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성가장의 무인 중 한 사람이 혼자 달려들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꼬마가 무시하는 모습이 화를 돋운 모양이었다.

채찍으로 휘두르는 것만 같은 횡 베기였다. 금목환의 목을 베겠다는 노골적인 욕망이 담긴 위치였다.

금목환은 칼을 땅바닥에 가까이 늘어뜨리다가 목에 닿기 직전에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은 마치 밑에서 화포를 쏘는 것 같았다.

내공을 쓰지 않은 게 분명한데도 폭발음 비슷한 소리가 나며 무인의 검이 위로 크게 차올려졌다.

“어?”

무인은 갑자기 경로가 바뀐 검극을 보며 멍청한 소리를 냈다. 다시 아래로 파고든 금목환이 무인의 검면을 끊어 타격하여 쳐올린 거다.

금목환은 그 때를 놓치지 않았다. 검을 출수한 이후의 동작 역시 물 흐르듯이 매끄러웠다. 손바닥을 쫙 편 상태였지만 검병이 그 안에서 돌아갔다. 쳐내려고 역수로 잡은 검병이 다시 돌아왔다. 검극이 엄지손톱과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무인의 목에 원형의 구멍이 뚫린 건 그 바로 직후였다. 정확히 검극으로 찌르고 몸이 무너지기도 전에 빼버린 것이다.

몸에 피 하나 묻지 않은 금목환은 시체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했다.

“역시 초식은 쓸 만한 모양이야.”

그제야 문호현은 저 움직임이 일체 내공도 동반되지 않았다는 걸 다시 인지했다. 저 정도의 초식 수행 능력과 움직임은 어릴 적부터 훈련을 받은 명가의 제자라고 보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런 진법을 쓴 이유가 다 있는 것이었다. 내공을 안 쓰고 초식과 움직임으로만 대결하면 압도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던 것이다.

“이제는 안 웃는구나.”

천천히 다가오던 금목환이 말했다.

금목환은 뿌연 안개가 무색하게도 형형한 안광을 뿌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