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만선(滿船)
15화 만선(滿船)
난 남해십이검의 세 초식을 마쳤다. 초식의 형만큼은 곽진도가 인정할 정도로 깔끔했다.
연공부에 있는 사람 모양 목각 인형에는 물결무늬 검격의 흔적이 선명했다. 확실히 이건 치명적인 검법이었다. 저 물결은 치명적인 기맥을 모두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아마 저게 목각인형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살아남을 수 없을 터였다.
“그래도 자만하지는 마라. 검에 내공을 두르고 휘두르는 것과 그냥 휘두르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니까.”
“자만한 적은 없습니다.”
“그냥 해본 말이다. 귀염성 없는 녀석아.”
곽진도는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벽곡단을 하늘로 띄워 받아먹는 유치한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내 스승님은 태만한 게 아니었다. 그냥 곽진도가 딱히 알려줄 게 없었다. 그가 나에게 지적할 수 있는 건 남해십이검을 할 때의 자세 정도였다.
심법은 태을헌원신공을 익히고 있으며, 남해십이검의 구결 역시 알아서 해석을 하고 있다.
남해십이검 역시 절학이기는 했으나, 태을신공보다는 구결이 어렵지 않아서 쉽게 익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알아서 해석하는 나를 곽진도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았지만.
“오늘도 재미없는 훈련이구나. 이 정도면 나는 연공부에 올 필요도 없고, 옆에 붙어있을 필요도 없는 거 아니냐? 구결 해석하는 걸 도와줄 필요도 없어, 깨달음은 내가 임의로 줄 수 없지, 훈련도 알아서 다 해.”
내가 초식 세 개를 돌리고 잠깐 쉬는 동안 곽진도가 말했다. 말투가 마치 서운한 어린 아이 같아서 조금 웃겼다. 그는 아직 자신의 효용성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요. 스승님은 제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무슨 도움?”
곽진도는 코웃음을 쳤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지금 저를 지켜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누구한테서? 아, 이청명 장로?”
“네. 제가 지금 귀나 코가 베이지 않는 건 오롯이 외총관님의 덕입니다.”
“이청명 장로도 어느 순간이 되면 포기하겠지. 그도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지 않느냐.”
곽진도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면 이청명의 본 모습을 못 봤다거나.
전생에서 우리는 정말 왼쪽으로 가라면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가는 순한 양들이었다. 그러니 딱히 본 모습을 드러낼 필요도 없었다.
“전혀 아닙니다. 최소한 반병신으로 만들려고 하겠죠.”
나는 오늘 금월상에게 성가장에 대한 추가 정보를 받았다. 예상대로 쓰레기 같은 일만 도맡아서 하는 흑도 방파였다.
“네가 이청명 뒤에 있는 세력을 잘 몰라서 그래. 거기는 단독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
“천주성에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이청명 개인이 하는 거죠. 천주성이 하면 이렇게 뒤에서 추잡하게 수작을 걸어오지는 않습니다.”
“그래. 알고 있구나. 천주성은···”
물 흐르듯이 얘기하려던 곽진도의 입이 얼어붙고 피부가 새하얗게 질렸다.
“천주성을 아느냐?”
“어쩌다 주워들었죠.”
“헛소리하지 마라. 천주성이 너 같은 꼬마애 귀에 들어갈 정도로 정체를 허술하게 관리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들어왔으니 실수를 한 거겠죠.”
내 말에도 곽진도는 도저히 납득을 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확실히 지금 시기에 천주성은 완전히 그림자 속에 숨어 지내는 집단이었다.
“대체 너는 나를 어디까지 놀라게 할 생각이냐?”
“저도 나름 굴리는 정보통이 있습니다. 당연히 알려드릴 순 없지만요.”
난 일단 대충 그렇게 말해 놨다. 그것만큼 확인할 수 없는 거짓말은 없었다. 곽진도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이었지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정보통한테 네가 노려지는 걸 들은 거냐?”
“그건 아닙니다.”
“그럼?”
“그럴 거라는 거죠.”
내 말에 곽진도는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무슨 점쟁이라도 되는 거냐? 그럴 확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거다?”
“네.”
난 간단하게 대답했다. 사실 곽진도는 못 알아듣는 게 당연했다. 내가 도출한 결과는 여러 정보의 조합과 재가공을 거친 것이니까.
내가 아는 정보는 다음과 같다.
천주성은 정파 특유의 결벽이 심한 곳이라 흑도를 손발로 쓸 일이 없다.
성가장은 흑도 방파다.
이청명이 여강 성가장에 돈을 댄 의혹이 있다.
곽진도는 내가 이런 정보들을 다 안다는 걸 모르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였다.
“그러면 이 장로는 내가 옆에 있기 때문에 손을 안 쓰는 거다?”
“네.”
“그럼 계속 붙어있으면 이청명은 꼬리를 말고 포기하는 거냐?”
“그렇겠죠.”
곽진도는 내 대답에 눈매가 내려갔다. 좀 허무해하는 것 같았다. 내가 다음 말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움직이게끔 해야죠. 복수심을 접으면 곤란하니까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곽진도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 말은 자해를 한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말이다.
“이청명 장로가 나를 해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상황으로 몰고 갈 겁니다.”
“왜?”
“그래야지 이청명 장로의 죄를 물어서 쫓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곽진도는 미간을 좁혔다. 내가 말한 게 여전히 납득이 안 되는 것이었다.
“굳이 지금 그걸 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
“지금 이청명 장로처럼 정치적으로 대놓고 움직이는 장로는 없으니까요. 다른 장로들에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것 정도는 알려줘야죠.”
“네가 지금 정은 되더냐?”
아직 곽진도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전부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애초에 난 책사로 살았고 책사가 가장 많이 따지는 건 성공 가능성이었다. 전략의 실패는 곧 책사의 실패였으니까.
그러나 그걸 곽진도에게 납득시킬 수는 없었다. 동경(銅鏡) 안에 나는 내가 봐도 어린 아이였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외형이었다.
“저 혼자는 힘들지만, 스승님이 도와주시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허, 스승까지 부려먹으려고? 참 독한 아이구나.”
나는 곽진도가 그렇게 말해도 흥미 있게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세가에 좀 먹은 괴질 같은 장로들을 떼어내고 싶어 했을 테니까.
“그럼, 내가 뭘 하면 되느냐?”
“간단합니다. 바깥에 나가 공기 한 번 쐬고 오시죠.”
“아니, 지금 내가 옆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더냐?”
“어제까지는 그랬는데 오늘부터는 아닙니다. 준비가 다 됐기 때문에.”
곽진도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입을 오물거리기는 했지만 더 나오는 말은 없었다.
천주성을 알고 있다는 걸 곽진도에게 언질을 준 건 잘한 일이었다. 내가 적어도 내 무덤을 파는 멍청이는 아니라는 건 알았을 터이다.
“그럼 해남 한 번 갔다오마.”
“해남이요?”
“너 영약 좀 챙겨오려고.”
곽진도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요즘 내공이 부족한 걸 절감하고 있기는 했으니까. 그러나 곽진도는 내 심심한 반응이 섭섭한 모양이었다.
“영약을 챙겨주겠다는데도 무덤덤한 녀석이라니. 정말 귀염성이 없구나.”
“저한테 그런 걸 기대하지는 마세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잠깐 머리를 굴렸다. 영약에는 각자 사람에게 맞는 약이 있다.
음공(陰功)을 익히면 만년빙정(萬年氷晶)이 최고의 영약이고, 양공(陽功)을 익히면 만년지극혈보(萬年地極血寶)가 최고의 영약인 것처럼 말이다.
지금 해남에 내 무공에 더 잘 맞는 영약도 있을 터였다. 난 계산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이왕이면 푸른색보다 보라색으로 갖다 주시죠.”
“···본파의 영약들도 알고 있느냐?”
나는 대답 대신 싱긋 웃어줬다. 나를 바라보는 곽진도의 눈빛이 한층 더 괴이해졌다.
*
“그제 외총관이 외출했다고?”
여전히 진하게 남아있는 모욕감에 손톱을 씹고 있던 이청명은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이청명이 벌떡 일어나 내총관 앞에 서자, 내총관은 움찔 떨었다.
“네, 해남을 잠깐 다녀온다고 하셨습니다.”
“왜 진작 보고를 안 했지?”
“상무당에서 저에게 언질한다는 게 누락된 모양···”
내총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솥뚜껑 같은 이청명의 손이 내총관의 관자놀이 부분을 찍어 내리듯이 쳤다.
사선으로 쓰러진 내총관은 머리가 찢어져 피가 났지만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던 내총관은 허겁지겁 품에서 출입 명부를 꺼냈다. 그곳에는 날린 듯이 쓴 필체로 이렇게 써져 있었다.
출 : 곽진도
사유 : 해남파. 영약.
“제자나 스승이나 오만한 건 똑같군.”
이청명은 내총관에게서 낚아채듯 명부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원래 사유라면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를 기반으로 반문의 여지없이 작성해야 하거늘.
“영약이라. 금목환이 먹이는 건가?”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요즘 거의 연공부에 있으니까요. 무재를 봤을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하, 무재?”
이청명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총관을 바라봤다. 내총관은 또 떨어야 했다.
“이봐, 나도 무인이야. 딱 보면 견적 나온다고. 얘가 칼로 밥벌이를 하고 살지, 아니면 약관도 안 되고 죽을지. 금목환의 몸은 왜소하기도 하고, 평소 몸을 너무 안 움직여서 잘못된 자세가 이미 굳어있다고. 그 녀석은 죽었다 깨어나도 무인이 못 돼.”
이청명이 금목환에게 억하심정을 담고 있는 건 맞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금목환은 무인으로서 준비된 게 하나도 없었다. 내공도, 몸도 말이다. 외총관도 보는 눈도 자기와 다르지 않을 텐데 뭘 연공부로 꼬박꼬박 가서 뭘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외총관이 해남에 가지러 갈 영약은 명확했다.
“해자환(海子丸)을 들고 오겠군.”
“해자환이요?”
“타원형으로 된 푸른색 환단. 해남검파는 어느 검파보다 역동적이고 몸을 유연하게 써야하지. 그래서 환골탈태 까지는 아니더라도, 몸과 뼈의 구조를 해남의 검에 맞게 바꿔주는 약이 있다고 들었어. 그게 해자환이고.”
그런데 그것도 어릴 때 뼈가 덜 잡혔을 때 먹는 거지, 다 자라서는 먹는 게 아니라고 들었는데.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청명 본인에게 기회가 왔다는 게 중요한 일이었다.
서로 눈치를 보느라고 죽이는 것까지는 위험하지만, 팔을 부러뜨리거나 귀를 자르는 것 정도는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할 터였다.
금목환이 매일 외총관과 같이 붙어 다니니 기회가 없었는데 그 기회가 생긴 거였다.
“바로 성가장에 연통을 보내. 옥화산에 사람 보내라고. 그야말로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닐 수 없군!”
금목환을 해치기 쉬운 외부로 나갈 날이 공교롭게 바로 내일이었다.
강서에서 해남이 가깝다지만 외총관이 정말 영약만 받고 오겠는가. 오랜만에 자신의 문파에 가서 회포도 풀고 하는 것일 테다.
와보면 아끼는 제자가 엉망진창이 된 걸 볼 수 있겠지.
만족스러운 미래를 상상한 이청명은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킬킬댔다. 수족인 내총관이 봐도 퍽 비열한 모습이었다.
*
아무리 황금세가의 직계들이 묶여서 산다고 해도 집 안에서만 부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유 시간에는 밖으로 나다닐 수도 있고, 밖으로 나가는 행사도 있었다.
허나 자유 시간에는 괜한 해코지를 당할까 무서워서 안 나갈 뿐이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는 행사는 일 년에 두 번. 중추절(仲秋節)과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중추절에는 근처 법당으로 가서 공덕을 쌓는다는 느낌으로 시주를 하고 오고, 어머니의 기일은 옥화산(玉化山)에 있는 등령당(登靈堂)으로 간다.
등령당은 세가의 혈족이 죽으면 가는 공동묘지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기 옥화산에 있었다.
남창에서 두 시진은 걸려야 올 곳이었다. 내일 형제들과 같이 있을 곳이기도 했다.
“그 전에 준비할 게 참 많구나.”
당연하지만 몰래 나온 거였다. 저번처럼 옥묘각에는 환상진을 걸어놓고 말이다. 기철이한테 아프다는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시 전에는 돌아가야 했다.
여기 등령당에서 준비할 진법은 옥묘각의 간이 진법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세밀하게 해야 했다. 무엇보다 내 안위가 달린 것이기 때문에.
나는 산 위에서 세가가 있는 남창 쪽을 바라봤다. 저 멀리 황금세가가 뿜어내는 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 지옥 같은 진법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걸릴 것인가.
쿵, 쿵, 쿵.
난 만선(滿船)을 생각하며 말뚝을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