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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세가 절대무신-14화 (15/225)

14화 그물

14화 그물

금월상은 생각보다 좋은 비선을 쓰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바로 자료를 갖다 줬으니 말이다.

하긴 황금세가의 눈을 피해 진법가 다섯 명을 섭외해서 데려올 정도면 꽤 실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료는 깔끔했다. 몇 년 동안 문파들의 세력 변화, 장원들의 변화까지 일목요연했다. 근처 다섯 개 고을의 정보를 부탁했으니 아무래도 양이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워낙 정보가 잘 정리되어 있어 보는 데 얼마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걸 그새 다 본 거냐?”

“네?”

“내가 보기에는 그냥 종이를 뒤집는 것처럼 보였다만.”

금월상은 나와 종이를 번갈아봤다. 그가 보기에는 종이를 보는 게 좀 빨랐던 모양이다.

물론 나도 전생에서는 이렇게 빨리 읽을 수는 없었다. 이것 역시 상단전의 효용 중 하나였다. 적어도 상단전은 머리와 관련된 능력이면 뭐든 향상시키고 있었다.

“제가 책을 많이 읽으면서 속독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더군요.”

“그런 거였구나. 얼마나 읽으면 그렇게 빨라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 다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읽어도 이 정도의 속도는 못 낼 터였다. 한 갑자의 내공이 있는 사람이 검을 휘두르는 걸, 십 년의 내공이 있는 사람이 절대 못 막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아무튼 여기가 제일 수상하군요.”

난 그 사이에서 종이 하나를 빼서 모로 놓았다. 금월상과 같이 보기 위해서였다.

“여강 성가장? 처음 들어봤구나.”

“저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수상한 거냐?”

“그건 아닙니다.”

나는 내가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정보에 쓰여 있기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가장은 하루에 다섯 사람이나 드나들면 많은 인원이 왔다갔다고 할 정도로 작은 장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성세를 늘리기 시작하더니 장원이 깔끔하게 보수되는 건 물론이고 무인들과 인원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거다.

그 정도로 장원이 하루아침에 바뀔 정도면 기하급수적인 돈이 일거에 투입됐어야 했다.

“그렇다고 여기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 않느냐.”

“의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죠. 장원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는 게 제일 걸립니다. 폐장원의 지부를 사들인 다음, 간판을 바꾸지 않고 비밀 거점으로 쓰는 경우가 많거든요. 대개 뒤가 구린 살수 집단 같은 애들이 쓰는 수법이죠.”

“···그런 것도 아는 구나.”

열두 살이 말하기는 좀 안 맞는 얘기였을까. 그러나 금월상은 이런 걸 좀 알아야 했다.

내가 볼 때 금월상은 너무 무던했다. 무공에 대한 재능은 있어 보이나 다른 쪽으로는 영 꽝이었다. 하긴 금월상도 아직 약관이 안 된 어린아이니,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 수도 있었다.

“아무튼 갑자기 성세가 커졌다. 이 사실은 확인할 필요가 있겠군요.”

나는 금월상이 준 종이들을 정리한 다음 구석의 침상 밑에 넣었다.

어차피 시종들은 봐봤자 모르겠지만 만전을 기한 것이었다.

*

눈을 감고 기감을 펼쳤다. 이제 옥묘각에서 내 방 근처로 오는 사람은 기철이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모두가 날 기피하고 있었다.

이청명 장로까지 징계를 먹은 마당에 당연한 일이었다. 미쳤다고 소문난 나와 시비가 걸리면 피곤한 일이니까.

천천히 일어났지만 눈은 감은 채였다. 가라앉아있던 소매가 붕 뜨고 펄럭였다. 태을헌원심공을 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슬슬 세맥에 뿌려놓았던 내공들을 제 자리로 갖다놓는다. 곧 붕 떠 있던 소매가 내 살갗을 감쌌다.

“시간이 된 거 같은데.”

나는 눈을 떴다. 태을헌원신공의 대주천을 한 번 돌리면 한 시진은 금방 가있었으니까.

아무리 속도를 빠르게 수정했다고 한들, 태을신공 자체가 느린 심법이라 이것도 빠르게 끝낸 거였다.

창문을 넘어 하늘을 봤다. 달이 떠있는 위치로 보았을 때 자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난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검은 무복을 미리 준비해 놨다. 운기를 하느라 젖어 무거워진 포의를 침대 구석에 가지런히 접어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후.”

나가기 전 서랍에 늘 있는 조약돌을 꺼내 문 주변에 흩어놓는다. 금월상의 옥상에 있는 진법과 똑같은 환상진이었다. 물론 나는 간이로 만들어서 내구도도 약하고 수명도 짧지만, 하룻밤을 버텨주기에는 충분했다.

이제 내 방에 누군가 들어온다고 해도 자고 있는 나의 환상을 볼 것이다. 물론 들어오지도 않겠지만 혹시나 해서 해놓는 것이었다.

진을 치고 남은 조약돌은 주머니에 넣었다. 추후에 쓸 일이 있었으니까.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기감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 말해주고 있었지만, 괜히 끼익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차가운 밤바람이 뺨에 스쳤지만 내공을 돌리니 금세 따뜻해졌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바로 창문을 벽을 타듯이 넘고, 떨어지기 직전 창문을 손으로 밀어 닫으며 떨어졌다.

“무인들은 천장단애(千丈斷崖)에서 떨어져도 산다더니.”

나는 불평을 토했다. 고작 이 층에서 떨어진 건데 발목이 찌릿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무공을 배운지는 얼마 안 되서 그런 것이겠다. 만약 무공도 안 배우고 뛰어내렸으면 다리가 부러졌을 수도 있었다.

일단은 움직여야 했다. 나는 옥묘각의 주변을 슬며시 빠져나왔다.

“지금 퇴근해도 되나? 잔업 있는데.”

“그냥 내일 해. 누가 여기에서 일 신경 쓰냐.”

내 예민해진 기감은 시종들이 멀리서 말하는 것도 귓가에 들릴 정도였다.

이렇게 나올 수 있는 건 내게 감시를 안 붙였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내가 외총관과 거의 매일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가에서 외총관의 기감을 속이며 날 추적할만한 사람은 없었다.

난 황금세가를 활보하고 있었다. 기감을 펼쳐 주변의 사람들을 확인하고, 가장 사람이 먼 쪽의 방위로 걸어간다. 아무리 돌아가도 안전하게 목적에만 다가가면 그만이었다.

경공을 써서 가로지르면 일 다경이면 도착하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경공을 쓰면 발 앞꿈치의 자국이 땅에 너무 선명하게 남기 때문이었다.

또한 기는 흔적을 남기곤 했다. 태을헌원신공이 아무리 자연에 가까워 식별하기 어렵다고 해도 굳이 증거를 남기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난 바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느긋하게 가도 반 시진이면 충분히 내가 목적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정원의 관목들 사이에 숨어서 건물을 바라봤다. 황금세가의 건물 치고는 평범한 형태로 건축된 상무당이었다.

“야, 우리 근무 언제 끝나냐?”

“반 시진은 남았지.”

“하.”

상무당은 작은 부처이기는 했지만 세가의 내부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늘 호위무사가 붙어있었다.

물론 난 준비해온 게 있었다. 바로 금월상을 숨겼던 은진이었다. 은진은 기감마저도 감출 수 있었다.

나는 조약돌을 대충 내 앞에 뿌린 다음, 벽으로 바싹 붙었다. 그들의 기감에 확실히 걸릴 법한 거리였지만 역시 호위무사들은 미동도 없었다.

위를 바라보니 이 층 즈음에 창문이 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벽 틈에 발가락과 손가락들을 넣으며 올라갔다.

이 층은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여서 난 바로 창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건물 안으로 착지하지마자 건물 안으로 기감을 확장했다.

상무당 안에는 역시 사람이 있었지만 이들은 무인들이 아니라 따돌릴 수 있었다. 주변에는 사람도 없었고.

나는 조용히 복도를 나와서 걸었다. 오랜만에 어둠 속에 쌓여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그때와 다른 점은 지금의 어둠은 날 도와주고 있다는 거였다.

다행히 난 아무에게도 걸리지 않고 수입 지출을 관리하는 부서로 가까이 갔다.

“···흠.”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이 시간에도 야근을 하는 사람이 있었던 거다.

다행히도 안에 있는 사람은 무인은 아니어서 나를 알아채지는 못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도약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고, 높은 구조물이 없어 뒤를 돈다면 바로 내가 보일 터였다.

난 바로 경로를 결정했다. 생각은 짧게, 행동은 간단하게. 난 내공으로 몸을 가볍게 한 다음 빠르게 도약했다.

바로 빛이 안 드는 어두운 쪽에 벽을 사뿐 밟고 달려 나갔다. 일직선으로 달린다기보다는 천장을 향해서 나아갔다. 벽을 타고 방을 반 바퀴 도는 셈이었다.

그렇게 딱 내가 천장 중앙에 닿을 때쯤 내 바로 밑에 야근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난 지금까지 달려온 힘의 방향으로 몸을 회전시키고 그의 뒷목을 후려쳤다. 그는 찍 소리도 못하고 고꾸라졌다.

곽진도가 그랬다. 일반인에게 마혈을 빨리 짚으면, 고통도 못 느끼고 기절한다고. 그가 일어나면 습격 당했다는 생각보다, 그만 까무룩 잠이 들었다고 생각할 터였다.

“후.”

엎어진 그를 옆으로 살짝 치우고 서가를 둘러봤다. 옥묘각의 지출 예산, 건곤각의 지출 예산, 연공부의 지출 예산 등 많은 종이 묶음이 있었다.

허나 내가 볼 건 다른 것이었다. 바로 금정원의 지출 예산.

서가의 맨 아래 칸에서 난 그것을 찾고 바로 열어봤다. 그곳에는 금정원 전체에 쓰인 예산도 있었지만, 장로가 직접 수령한 예산 역시 있었다.

“활동비로 원보(元寶)를 두 개 빼갔다라.”

어지간하면 성격이 무딘 나도 이청명의 내역에는 고개를 저었다. 현재 평민 일 년 생활비가 은자 두 냥이다.

원보는 은자 오십 냥의 가치가 있는 최고급 물건이었다. 이걸 마음대로 내준 상무당도 상무당이지만 이청명도 어지간했다.

난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가져온 건 성가장에 대한 정보였다. 내가 주목한 건 성가장이 언제부터 성세를 구가했냐는 거였다.

자료에는 삼 년 전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청명이 수령한 예산을 삼 년 전까지 넘겼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군.”

삼 년 전에 이청명은 활동비로 원보 열 개를 불출한 내역이 있었으니까. 바로 옆에 붙어있는 불출 근거 자료를 확인했다.

- 여강 출장 활동비.

우연치고는 아주 기가 막힌 지명이었다.

그물을 어떻게 짜야할지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

일단의 무리들이 원형의 책상에 둘러앉아 있었다. 대다수의 옷에 피가 묻어있어서 혈향이 가득한 방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일은 피를 보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흠, 막내공자가 이청명 장로에게 무슨 짓을 했나본데.”

“왜?”

“막내공자의 습격을 주문하더군. 죽이는 것보다 반병신으로 만들라던데.”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 귀를 자르고 아혈을 부수면 되지 않나?”

“그것보다는 그냥 깔끔하게 팔 하나 자르자고.”

그들의 입에서는 살벌한 내용이 오갔다. 아무도 사람을 해치는 것에 거리껴하지 않았다.

중앙에 앉은 남자는 얼굴에 지저분한 검상을 달고 있었다.

“다들 지금 각자 하는 일 있던가?”

“있긴 있는데, 이걸 최우선으로 하라니까.”

그들은 각자 합법적이지 않은 일을 의뢰로 받고 해결하며 돈을 받는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이청명 장로의 주문을 최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했다.

원래 사분오열하던 흑도 무뢰배들에게 장원이라는 구심점을 제공하고 돈까지 주는 게 바로 이청명이었다. 물론 이청명이 그만큼 많이 부려먹었기는 했다.

그래서 어쩌다보니 성가장은 아는 사람은 아는 강서 최고의 흑도 방파가 되어 있었다.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이라고는 상권을 정리하거나 장원을 습격하는 일이었다. 그들 중에 이름이 알려진 고수는 없었지만 특유의 잔혹함 때문에 뒷세계에서는 나름 유명했다.

“그래도 황금세가 막내공자면 나름 큰일이군. 뒤탈은 없겠지.”

“황금세가 자식들은 다 박제된 채로 사는 걸. 이청명 장로가 알아서 막아주겠지.”

그들은 아직 황금세가의 막내공자가 바뀐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실 이청명 장로가 징계를 먹은 건 황금세가의 내부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나 충격적인 소식이지, 외부에는 화제성 없는 소식이었다.

“굳이 이 일 때문에 다른 일을 쉬어야 되는지는 모르겠군.”

“그러게. 황금세가 직계면 어떻게 보면 민간 상인보다 해치기 쉬운 존재 아니던가.”

그들은 그런 얘기를 나누며, 금목환을 어떻게 요리할지 계속 논의했다. 갈수록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잔인함 수위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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