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정중동(靜中動)
13화 정중동(靜中動)
황금세가의 건물에는 대부분 사랑방이 있다. 그러나 직계들은 사랑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을 거다. 외부에서 오는 손님이 없으니까 말이다.
나 역시 옥묘각에 사랑방이 있는 건 알았지만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가운데에는 흑칠(黑漆)이 되어있었고 다리를 포함한 전체적인 부분에는 주칠(朱漆)이 되어 있었다.
“앉으시죠.”
나는 맞은편으로 돌아가 의자를 빼 앉았다. 금월상의 표정은 역시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어찌 기별도 없이 오셨습니까.”
“동생을 보러 오는데 목적이 필요하더냐?”
금월상은 갑작스레 서운한 표정을 해보였다. 물론 금월상은 내 편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개인적으로 가깝다는 사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건 아니죠. 그래도 목적이 없이 오신 건 아닌 듯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그렇긴 하지. 역시 눈치가 좋구나.”
금월상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큼큼, 소리를 냈다. 그는 아무도 없는 사랑방에서 상하좌우를 보며 경계하는 표정을 짓고 내게 바짝 다가왔다.
“이청명 장로 말이다.”
“네.”
나는 그제야 귀를 기울였다. 역시 이렇게 연통 없이 올 정도면 중한 일이 분명했다. 아니면 황금세가 사람들이 안 그래도 직계들을 주시하고 있는데 대놓고 올 리가 없었다.
그러나 금월상의 이어진 말은 내 기대를 산산조각으로 부쉈다.
“연금동으로 들어갈 때 표정 봤느냐? 하하하.”
금월상은 내 기분도 모른 채 신나서 말을 계속했다.
“그 고상한 척하는 얼굴이 악귀 나찰처럼 일그러지는 모습이라니. 하하하! 난 굉장히 놀랐다. 어떻게 외총관을 움직여 본 세가의 장로 대우를 이용할 생각을 했는지.”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릴 시간을 가지고 대답했다.
“그렇게 특출 난 전략은 아니었습니다.”
난 생각한다. 그들도, 나도 너무나도 위축되어 있었다고. 그건 어릴 적부터 각인된 패배감이었다. 그러니 싫어는 해도 반항을 할 생각조차를 못하는 거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을.
곧 기철이 맑은 분홍색을 띄는 기문홍차 두 잔을 들고 왔다. 난 잔을 받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려 했지만, 기철이는 나가지 않고 쭈뼛거렸다.
“왜?”
내가 물었다. 기철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공자님, 오늘 그 진시에 안 깨운 건···”
“외총관님이 시켰겠지. 알아. 나가봐.”
“아, 네. 감사합니다.”
기철은 바로 뒤로 총총 걸으면서 사랑방을 빠져나갔다. 난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제 발을 저리고 있었다.
금월상은 기철이 나가자마자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하인도 완전히 기강을 잡았구나. 저 고개 뻣뻣한 장로들도 저렇게 나오면 좋으련만.”
“그런데.”
나는 차를 홀짝 마시면서 금월상을 추켜올려봤다.
“그 말씀 하시려고 여기 온 겁니까?”
금월상의 얼굴에 그려진 호선이 점점 펴지기 시작한다. 난 질책하려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단지 궁금해서 그런 것이었다.
“아니지. 그냥 그건 내 개인적인 사담이었다.”
왠지 금월상이 시무룩해보였지만 난 차를 마셨다. 여전히 혀뿌리를 감싸는 감각은 일품이었다.
“큼, 내 아우가 이렇게나 유능한 책사라는 것이 좀 흥이 났나보구나. 잠깐의 추태를 용서해주려무나.”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이청명 장로의 연금이 내일 풀리는 건 알고 있느냐?”
“네.”
“역시 알고 있었구나.”
금월상은 잠시 숨을 고르면서 차를 마셨다. 아무리 몸이 곰 같아도 예절 교육을 어릴 적부터 많이 받았기 때문일까, 차를 마시는 자세는 완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분명 그 자는 너에게 보복할 거다.”
“대놓고는 힘들 겁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지. 그런데 이청명 장로는 그렇게까지 이성적인 사람은 아니야. 너 설마 이청명 장로가 한창 강호를 횡보하고 다닐 때의 별호를 모르느냐?”
“네.”
“···당당해서 보기는 좋구나.”
아무래도 금정원에 있는 장로들은 대다수가 무공이 고강한자들이었으니,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같은 기사(奇事)들이 하나씩은 있을 법한 사람들이다.
지금 내가 가장 취약한 부분은 상식적인 정보였다. 강호에 산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정보들 말이다.
전생을 워낙 칩거하며 살았던 탓이다. 미래에 굵직하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지만 지금쯤 강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실세는 누구인지 알 리가 없었다.
“물론 자신은 비요검(飛曜劍)이라 말하고 다니지만, 강호인들이 불렀던 별호는 서형사수(鼠形似獸)라고 한다.”
나는 듣고 잠시 해석을 해봤다.
“쥐를 닮은 짐승이요?”
“하는 짓이 쥐새끼 같은데 쥐새끼는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이 할 짓을 안 하니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쥐를 닮은 짐승이라고 불리지.”
서형사수라. 대체 강호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으면 그런 모욕적인 별호로 불렸을까. 그래도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미래에 보여준 모습이라면 충분히 쥐새끼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역시 쉽게 변하지 않는다.
금월상은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박수를 치며 내게 물었다.
“그럼, 너 설마 외총관이 어떤 무인인지도 모르는 게냐?”
“네.”
“그건 좀 아니지 않느냐?”
금월상은 내게 처음으로 실망한 표정을 했다. 나는 찻잔을 흔들어 회오리를 만들었다. 아래에 찻잎이 너무 가라앉아있었다.
“그래도 네 스승님 아니냐. 지금 가문에서는 네가 해남파의 적전제자(嫡傳弟子)로 들어간다는 소문도 퍼지고 있는 마당인데 말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리랍니까.”
오다가다 시종들이 낭설을 퍼뜨리는 건 들었지만, 저 내용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확실히 내가 모르는 소문도 많이 퍼져있다는 뜻이겠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 아니더냐. 해남파에서 외총관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대단하겠죠. 천류명운검이라는 멋진 별호를 가지고 계신데요.”
내가 무심하게 대답하고 차를 마시는 걸 보자 금월상은 어이없어 했다.
“그런 별호보다 중요한 건 남해삼객(南海三客) 중 하나라는 거 아니겠느냐.”
금월상은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계속 봤다. 아무래도 내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았다. 금월상은 나를 계속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설마, 남해삼객도 모르는 거냐?”
“네. 모릅니다.”
“하아.”
금월상이 엄지와 새끼손가락으로 두 관자놀이를 짚었다.
“남해삼객은 남해로 돌아서 기습해온 마교도들을 격퇴할 때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셋을 얘기하는 거 아니더냐. 천류명운검 곽진도, 파수해옹(波守海翁) 구양하, 수류곡도(水流曲刀) 장귀해. 이 셋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금월상은 명가의 자제답지 않게 침까지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혈해가 되어버릴 뻔한 남해를 목숨을 걸고 수호한 협사들이며, 그들이 얼마나 강하고 정의로웠는지.
내가 외총관을 스승으로 삼은 건, 그의 무공이 고강하거나 강호에서의 격이 높아서가 아니었다. 그저 황금세가에 대한 충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런 사람이 강호에서 인정받고, 무공 또한 고강하면 나에게는 전혀 나쁠 일이 없었다.
“생각보다 대단하신분이셨네요.”
“어째 나보다도 시큰둥한 모습이구나. 그런 분의 인정을 받았으니 네가 대단한 게지.”
금월상은 나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는 이궁천뢰검법이 남해십이검에서 유래된 걸 모르니까 하는 말이었다.
괜히 그런 눈빛을 계속 받자니 민망해서 난 주제를 돌렸다.
“이청명 장로는 분명 비이성적인 사람입니다. 이성적인 척하는 만큼이나요. 형님 말대로 복수를 생각하고 있겠죠.”
“그런데 왜 그리 여유를 부리는 게냐. 설사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유비무환인 것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움직이고 있습니다.”
금월상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금월상 역시 장남이라지만 약관도 안 된 아이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물밑싸움의 역학에 대해서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금월상의 말대로 이청명은 비이성적인 사람이고, 나에 대한 복수를 생각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귀가 있을 터고 내가 곽진도와 관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움직이면 오히려 이청명에게 단서를 주는 셈이었다. 지금은 차라리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혼자 골머리를 썩게 둬야했다.
실제로 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증거로, 금월상이 내게로 오지 않았는가. 이청명은 내 행동에 시선이 쏠려있을 것이다.
내가 금월상에게 볼 일이 있다고 해도 찾아가는 것보다는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았다. 지금처럼 말이다.
“형님. 바깥에 비선은 잘 있습니까?”
“···있지?”
느닷없이 나온 것 같은 내 말에 금월상은 조금 긴장한 듯했다.
“이 아우가 궁금한 게 있는데, 부탁 하나 들어주시렵니까?”
“무엇을 말이냐?”
“당분간 강서의 동향을 좀 주시해주시죠.”
금월상은 내 말에 어물거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말을 지나치게 짧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
“남창 근처에 안의(安義), 봉신(奉新), 고안(高安), 장수(樟樹), 여강(余江) 근처에 갑자기 들어온 세력, 무인 집단, 수상한 장원 등이 생겼는지를 확인해주시면 됩니다.”
“···그래. 한 번 노력해보마.”
“감사합니다.”
나는 그 말과 동시에 차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금월상은 뭔가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
문이 열렸다. 오랜만에 날 것의 햇빛을 봐서 그런 걸까. 이청명이 눈을 찡그렸다.
여기는 이청명이 연금을 당했던 금정원 별채였다. 물론 연금이라고 하기는 건물이 너무 화려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장로님.”
문을 열어준 건 내총관이었다. 내총관은 바로 이청명을 보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이청명은 양쪽 손목을 다른 손으로 잡아 돌리며 물었다.
“나 대신 보고는 하고 있었나?”
“네. 장로님이 보내시던 주기로 보체(步遞)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청명은 그 말을 듣자마자 내총관의 뺨을 강하게 쳐버렸다. 내총관이 얼굴이 돌려져 땅바닥에 박힐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아무리 내공을 싣지 않았대도, 이청명은 무인인데다가 내총관은 늙은 일반인이었다.
자신보다 최소 열 다섯은 어린 이청명이 내총관을 때려도, 내총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땅바닥에 여전히 엎어져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내총관을 벌레처럼 바라보는 이청명이 입을 열었다.
“내총관.”
“네!”
내총관은 그 말에 벌떡 일어나서 허리를 꼿꼿이 폈다. 뺨 맞은 쪽의 흰자는 핏물이 들어차 붉었다.
“지금이 평범한 상황인가. 급각체(急脚遞)나 마체(馬遞)를 써도 모자를 상황이잖나.”
이청명은 나지막이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내총관은 속으로 본인에게 지시를 안 한 이청명을 욕하고 있었지만, 나오는 말은 완전 딴판이었다.
보체, 급각체, 마체는 파발의 종류였다. 보체는 걸어서 보내는 파발, 급각체는 뛰어서 보내는 파발, 마체는 말로 보내는 파발이었다.
당연히 마체가 제일 빨랐지만 그만큼 비쌌다.
만약 말도 없이 마체를 썼다면 비용 때문에 때렸을 것이었다. 내총관은 이제 이청명이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금목환은 여전히 연공부만 들락거리고 있나.”
“네. 가끔 첫째 공자가 옥묘각으로 갈 때는 있지만, 막내 공자는 외총관과 함께 연공부만 들락거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경 쓸 거 없어. 우둔하고 심약한 놈이야.”
당장 중요한 건 금목환의 행동이었다. 이청명은 어이없기도 했고 자존심도 상했다.
꼭두각시에 불과한 상계의 꼬맹이가 무인을 건드리다니. 금목환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그놈의 외총관이 문제군.”
그러나 문제는 역시 외총관이었다. 외총관 정도의 무인이 붙어있다면 무언가를 하기 힘들었다.
허나 그렇다고 일평생 붙어있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청명도 준비를 해야 했다.
“내총관.”
“네.”
“성가장에 연락 넣어놔. 유사시에 움직일 수 있도록.”
내총관은 살짝 멈칫했다. 성가장. 이청명이 주로 은밀한 일을 할 때 쓰는 집단이었다.
저 성가장을 쓸 때는 언제나 피를 동반한 결과가 잇따랐다.
“알겠습니다.”
내총관은 고개를 숙였다. 한 대라도 덜 맞으려면 여강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보체를 섭외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