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12화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내가 연공부에 들락거린다는 소문은 단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퍼졌다. 연공부는 시종들이 청소하려고도 안 들어가는 곳이었다.
그 소문을 확대시킨 건 곽진도의 힘도 컸다. 곽진도와 내가 연공부를 항상 같이 가니, 으레 따라올 수밖에 없는 의혹들이 붙었다. 사제 관계가 아니냐 하는.
사실 의혹이 아니라 진짜 사제 관계지만 말이다.
“근데 이렇게 매일 대놓고 오려고 하는 거냐?”
“숨어봤자 더 의심을 살뿐입니다. 또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말은 청산유수로구나.”
그러면서 나는 기수식을 취했다. 곽진도가 했던 그 요상한 다리와 검을 흘릴 것처럼 들고 있는 그 기수식이었다.
여기는 여느 때와 같이 연공부 안 연무장이었다. 연무장은 정리가 안 되어있을 뿐 시설이나 무기들은 전부 최상급이었다. 당연하지만 내가 전력을 다해도 건물 벽에는 어떤 흠집도 나지 않았다.
"어제는 어떤 묘리를 사용해서 펼쳤었지?"
"유(柔)로 펼쳤습니다."
곽진도는 내 대답에 눈을 위쪽으로 굴렸다. 나는 그가 시키는대로 하고 있을뿐이지만, 곽진도만의 학습 방법이 따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이번에는 패(覇)로 펼쳐봐라."
"네."
남해십이검이 다른 문파의 무공보다 특징적인 건 자유로움이었다. 무당의 태극혜검(太極慧劍)은 부드러움, 즉 유의 묘리를 따르고 소림사의 나한권법(羅漢拳法)은 굳건함, 즉 강의 묘리를 따르는 것과 달리 남해십이검은 정해진 묘리가 없었다.
그것은 남해십이검의 원천인 바다의 움직임이 정해진 게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제는 부드럽고, 언제는 강건하고, 언제는 패도적이고, 언제는 예측할 수 없이 변화하고는 하니까. 확실히 좀 어려운 무공이었다.
“그럼 이제 해운무봉(海雲武峰)을 펼쳐보아라.”
곽진도가 말했다. 해운무봉. 남해십이검의 첫 번째 초식이었다.
초식의 수법은 간단했다. 뒷발에 힘을 주고, 앞발을 크게 뛴 다음 내지르는 쾌검이었다. 마치 예기치 않은 곳에서 물기둥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중요한 건 예기치 못함이었다. 아무리 빠르다고 하더라도 경로가 정해져있으면 멈춰있는 것보다 진배없는 속도다.
해운무봉을 쓰면서, 적합한 보법도 얼추 따라갈 수 있었으니 난 보법에 변화를 줘서 검의 경로를 바꿀 수 있었다.
내가 내지른 검극 아래에 있는 모래들이 검풍에 밀려서 뒤집어졌다. 닷새간 남해십이검을 계속 휘둘렀더니 나도 어느 정도 요령이 생긴 모양이었다.
“다음으로 이어가라.”
뒤에서 나지막한 말이 들렸다. 저 말은 곧 통과라는 뜻이었다. 첫날, 둘째 날에는 거의 해운무봉을 반복하는 선에서만 수련이 끝났다.
곽진도는 스승이 되니 내 무공을 굉장히 엄격하게 보고 있었다.
해운무봉의 묘리와 자세를 익히고 있는 건 맞으나, 응용은 또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근데 방금은 내가 생각해도 꽤 완벽한 초식이었다. 해운무봉은 무조건 기혈이 많이 모여 있는 요혈(要穴)을 노려야 했다.
체중을 실어 한 방을 내지른다는 건 그만큼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므로, 요혈을 노리지 않으면 육참골단(肉斬骨斷)의 묘리에 당할 수 있었다.
“계속, 계속해.”
나는 이제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남해십이검의 초반 초식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체화가 됐다.
닷새 동안 몇 가지 동작만 반복훈련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었다.
곽진도는 내게 초식을 반복시키면서 이르기를 이 방법은 무공의 성취를 올리는 게 아닌 감각을 올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멈춰라.”
내가 이 초식 홍곡유수를 마치고, 삼 초식 의련만장(漪漣萬丈)을 펼칠 때 곽진도가 말했다.
“후우.”
그 말이 들림과 동시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손에서는 담뿍 땀이 배어나와 검병을 놓칠 뻔도 했다.
“···참, 이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골치 아프군.”
곽진도는 머리를 긁으면서 내게 다가왔다. 그 다음 군말 없이 바로 무자비한 주먹질과 발길질이 시작됐다. 사제 간의 합의된 폭력 또는 부조리가 아니라 추궁과혈(推宮過穴)이었다. 다만 곽진도의 방식이 좀 거칠 뿐.
나는 시원함을 느끼면서 고민했다. 지금 곽진도와 나의 고민은 같았다.
곽진도가 말하기를 내 초식의 형(形)과 의(意)는 말도 안 되는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남해십이검이 상승무공인 탓에, 내공이 많이 들고 나는 내공이 빈약하다는 점이었다.
자연스럽게 검법과 보법을 쓰려면 내공을 의식 없이 발산하게 되는데, 만약 세 초식, 네 초식을 다 쓰면 또 저번처럼 내공이 부족해 기절을 하게 되는 것이다.
“휴. 네 초식들은 내공을 거의 안 쓰는 초식인데. 여기서 이러면···”
“다 부덕한 제자의 잘못입니다.”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곽진도는 내 눈을 피했다. 내가 아는 곽진도는 언제나 강단이 있는 참대같은 사람이었는데, 내 앞에서는 한 수 접어주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대충 알고 있다.
“내가 말했지 않느냐. 너는 말도 안 되는 오성을 가진 사람이다. 내공은 편법으로 얻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네가 무공의 묘리를 깨닫는 속도는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곽진도는 말을 이었다.
“한 번 더 물어보마. 너는 여기 세가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당장 무림맹주 앞에서 검술을 시현해도 제자로 받아줄 급이라니까.”
그런 말을 하면서 곽진도는 내 무공을 봐줄 때보다 핏대를 올리고 집중하고 있었다.
“안 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네 재능은 솔직히 내가 온전히 가르치기 부담스러울 정도다. 내공 얘기는 그저 아쉬운 마음에 나온 거지. 차라리 이딴 황금세가 말고, 적어도 중간은 되는 세가에서 태어났다면 넌 천고의 기재로 중원에 널리 알려졌을 거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곽진도는 모르지만 지금 내 성취가 상단전 때문임은 명확했다.
곽진도의 말처럼 만약에 중간은 되는 문파에 들어갔다고 하면 내 상단전은 열리지 않았을 거다.
솔직히 무림맹이나 다른 문파는 얼마나 깨끗하겠냐는 생각도 부분적으로는 있었다.
“지금 네가 내 제자기는 하지만, 그걸 장문인한테 알려주지 않은 이상 제대로 된 입적은 아니니, 해남파의 영약을 갖다 쓸 수도 없고 말이다.”
“괜찮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너 혹시 영약은 온전히 자신의 힘이 아니라서 편법을 쓴다고 생각하는 그런 멍청한 부류냐?”
나는 곽진도의 말을 무시하고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고 바지에 묻은 흙들을 털었다.
물론 나도 내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더 상승의 무공을 익히려면 기본적으로 갖춰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내가 지금 영약을 고사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곽진도가 말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결벽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곽진도가 내 옆에서 있어야 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기니까 말이다.
“재능이 있는 만큼 성격도 고상한 건 알겠지만, 그래도 영약의 도움이 아예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물론 재능도 없이 영약을 때려 박아 만든 명가의 자제들에겐 욕들이 따라붙기는 하지만 말이다.”
곽진도가 내게서 무슨 오해를 하던 간에 나는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가 꽂혀진 검을 뽑았다. 추궁과혈로 몸이 빠르게 풀려서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몇 번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벌써 시작하느냐? 몸이 아직 뻐근할 텐데. 무리하면 다친다.”
“할 만합니다.”
나는 바로 이번엔 빠르게 쏘아지는 물살을 생각했다. 바다에서도 흐름이 빠르게 돌아가는 곳들이 있었으니까.
순식간에 해운무봉, 홍곡유수, 의련만장이 전개된다. 움직임은 변화무쌍한 바다를 닮아있다.
해운무봉은 물줄기가 쏘아져 나오고, 홍곡유수는 커다란 기러기가 수면(水面)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날아 퍼진 옅은 파동이 이는 듯하고, 의련만장은 잔잔하게 흐르는 물이 넓게 퍼지는 만검(滿劍)이라 할 수 있었다.
“후우.”
이렇게 내가 빨리 전개를 할 수도 있었다. 다만 곽진도가 알려줄 때 빠르게 전개하는 것보다는 검로를 명확하게 잡는 게 먼저라고 했기에 그것을 중점적으로 연습했을 뿐이다.
왠지 빠르게 하니까 사 초식도 할 만해보여서 살짝 휘둘러봤지만, 바로 내공이 고갈되어 현기증이 났다.
나는 검을 중앙에 강하게 꽂고 앉아서 검면 뒤에 등을 기댔다.
“넌 뭐가 그리 급한 게냐.”
그런 내게 곽진도가 내 앞에 섰다. 올려다 보는 곽진도는 위아래로도, 좌우로도 꽉차있는 풍채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재능이면 지금 누구보다 빨리 달리고 있는데도, 그렇게 무리를 하는 이유가 뭐냐는 말이다.”
나는 잠깐 생각을 했다.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일단 내 재능이 온전히 내 것임을 아는 것도 그 영향이 있을 거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향이 있는 건 아무래도 전생의 영향이겠다.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게 된다고? 넌 이미 뛰고 있다니까.”
곽진도는 내 말을 중간에 끊고 말해서 잠깐 말을 멈췄다. 그의 말이 끝나자 내 말이 이어졌다.
“내일은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때는 걷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겁니다.”
언제나 절망은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을 많지만, 반대로 그 사실을 대비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난 이제 눈을 감았다. 곽진도가 내게 추궁과혈을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내가 아무리 눈을 감고 시간이 지나도 내 몸에 느껴지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제야 눈을 떴다. 곽진도는 저 멀리 앉아서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십니까? 추궁과혈 해주셔야죠.”
난 바로 물었다. 곽진도는 말했다.
“안 해.”
“왜요?”
“나도 좀 쉬려고.”
곽진도는 눈을 감았다. 그 이후로는 내가 어떤 말을 걸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변심인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재촉하지는 않았다.
눈을 감았다. 그때 내 감각으로도 못 느꼈던 수마(睡魔)가 온몸을 덮쳤다.
*
감은 눈도 따가울 정도로 햇볕이 내리꽂혔다. 난 벌떡 허리를 일으켰다.
내가 있는 곳은 옥묘각의 침대였다. 몸을 비틀어 창밖을 바라보니 해가 떠있는 위치가 사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난 일어나서 창틀에 팔을 기댄 채로 밖을 바라봤다. 바람에 따라 잔잔하게 흔들리는 수양버들이 보였다. 마치 등을 돌린 여인의 머리칼을 보는 것 같았다.
창문을 열었다. 버들에서 향을 빌려온 바람들이 내 몸을 스쳐지나갔다.
바람을 맞으니 이제야 자기 직전 내가 무엇을 했는지 서서히 기억나기 시작했다.
“힘들긴 했나보네.”
하긴 내가 전생에서 담금질한 건 육체가 아닌 정신이었다.
정신의 통각이 너무 무뎌지다보니 육체가 보내는 신호를 전부 무시해버렸던 거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손과 어깨, 다리를 풀어본다. 사낭(砂囊)이라도 차고 있었던 것만 같은 몸뚱아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지금 하면 더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내가 잤던 시간 동안 검을 휘둘렀으면 도달하지 못했을 터였다.
창문을 닫고, 새로운 포의(布衣)을 챙겨 입은 다음 방문을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내 방문이 젖혔다.
거기 서있는 사람은 첫째 형님, 금월상이었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내 어깨를 잡았다.
“내 아우. 잘 있었구나.”
오랜만에 본 금월상은 활짝 웃고 있었다. 나 역시 맞서서 살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