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회의 시작할까요?
9화 회의 시작할까요?
금목환이 중간 자리에 앉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말릴 새도 없었다. 금목환은 앉자마자 죽간을 펼쳤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먼저 침묵을 깬 건 이청명 장로였다. 금목환은 죽간을 보는 눈도 떼지 않고 답했다.
“이 회의는 무효입니다. 회의를 하고 싶으시면 장로들을 더 불러 오거나, 아니면 다음에 하시죠.”
“막내공자님에게는 장로 회의에 간섭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이청명은 주변의 장로들을 슬쩍 바라봤다. 다른 두 명의 장로들은 여전히 흥미로워보였다.
갓 열 살이 지난 꼬맹이랑 재롱잔치를 하고 놀림거리가 된다니 귀가 붉어졌다.
“당장 나가십시오.”
“왜 없습니까?”
금목환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직계는 세가에서 열리는 모든 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데요. 그건 권리입니다. 지금까지 행사를 안했을 뿐이죠.”
금목환은 그렇게 말하면서 본인이 펼쳤던 죽간을 뒤집어서 보여줬다. 엮여져 있는 끈도 삭아 없어질 것만 같은 오래된 죽간이었다.
그 죽간에는 황금세가 장로회의 규칙, 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거기에는 금목환의 말대로 장로 회의의 최소 출석자 수와 직계 가족의 회의 참가 권리도 설명하고 있었다.
“여기에 따르면 최소 장로, 장로 대우급의 사람이 아홉 명은 모여야 회의가 진행된다고 돼있습니다.”
금목환이 들이대는 증거에 이청명의 입이 닫혔다. 실제로 황금세가의 대다수 규칙은 세가가 처음 일어설 때, 이백 년 전쯤 만들어져 있던 것이었다.
현재 황금세가의 규칙은 예전의 규칙들을 원형으로 세가의 상황에 따라 바뀌어 온 관습에 가까웠다.
그러니 이청명이 저런 원조 법규를 알리가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근데 금목환이 그걸 써버린 거다.
“···맹랑하시군요.”
이청명은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 장로들 아홉 명을 채워서 진행하면 되겠습니까?”
“당연한 걸 선심 쓰듯이 말하시지 마시지요.”
“허허. 허허허.”
금목환의 단호한 대답에 이청명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여기서 강하게 붙어봤자 자신만 웃음거리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인원수를 채우는 순간 시작하는 걸로 하죠.”
이청명은 그렇게 말하고 바로 회의장을 나갔다. 금목환은 깍지를 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이청명이 나가는 문을 지켜봤다.
*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녀석이 몸부림을 치니 같잖았다. 애초에 아무 세력도 없는 금목환을 건드는 건 인력, 시간 낭비였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귀찮게 하면 얘기가 달라졌다. 금정원의 장로들도 세력을 떠나 이 정도로 막내 공자가 일을 벌리고 다닌다면, 심기가 불편해질 게 뻔했다. 결국 금목환은 자충수를 두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싸가지 없는 녀석.”
금정원의 장로들이 상시 있는 곳은 회의장과 한 층이 차이 났다. 이청명은 계단을 최대한 천천히 내려왔다.
금정원에 있는 장로들은 다들 고수기 때문에, 급히 계단을 내려오면 자신이 급하다는 걸 알리는 꼴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천천히 층계를 발뒤꿈치로 밟으며 호흡을 안정시켰다.
이청명은 장로들이 있는 곳의 문을 열었다.
“회의가 벌써 끝났소?”
문간 근처에서 바둑을 두고 있던 장로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차라리 그 정도로 신경 써준 거면 양반이었다. 문을 열고 사람이 온 걸 모를 수가 없는데 모든 장로들은 눈도 안 돌리고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자신과 같이 천주성(天柱城)의 명령을 듣는 사람들이나 힐끗 보는 정도였다.
“잠깐, 하는 일 멈추고 내 얘기 좀 들어주겠소?”
이청명이 손뼉을 쳤다. 그제야 사람들이 이청명을 바라보았다.
“현재 지금 정원수가 안 모여서 회의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몇 명만 좀 참여해줄 수 있겠소?”
“언제부터 그런 규칙을 다 지키고 다녔나?”
“막내 공자가 옛날 규칙을 가지고 와서 어깃장을 놓더군.”
이청명은 이를 갈며 말했다. 장로들의 반응은 웃거나,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막내 공자가 그리 움직일 정도면 믿는 바가 있는가본데.”
장로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바둑돌이 바둑판에 붙는 소리가 방을 청량하게 울렸다.
이청명이 바라보니 그는 혼자 바둑을 두고 있는 장로였다. 지금 위층에 있는 여상우 장로와 매일 내기 바둑을 두는 명명해검(冥冥海劍) 양철목이었다.
“그럼 이 상황이 재밌어지는구먼.”
양철목은 혼자 껄껄 웃으면서 다시 바둑을 뒀다. 여상우와 두고 있었던 바둑을 다시 복기하는 듯했다.
“···허허. 다들 능구렁이군.”
이청명은 실실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도 장로들은 묵묵부답으로 자신의 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아마 여기 있는 모든 장로들이 느끼고 있을 터였다.
이들은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아군은 아니었다. 가장 대장 격으로 활동하고 있는 몇몇 장로들의 소속만 알고 있지, 다른 사람들의 소속은 어렴풋하게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이런 복마전에서 은밀한 정체는 곧 무기였다. 모난 정이 괜히 돌을 맞는 게 아니니까.
특히 막내 공자가 이렇게 날뛰고 뒤에 뭐가 있는지 모를 때에는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황금세가가 식물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부자가 망해도 삼 대는 간다고 했다. 자신들 모르게 숨긴 저력이 있을지도 몰랐다.
이청명은 굳이 이 상황을 주지시킨 양철목을 노려보았다.
“좋은 고견 감사드리오. 양 장로.”
“아무 것도 아니오. 그나저나 누가 이 장로를 도와줄지 궁금해지는구려.”
“양 장로가 도와주는 건 어떤가?”
이청명이 말하자 양철목이 씩 웃었다.
“천주성(天柱城)하고는 악연이 있어서 말이야.”
그 말에 모든 장로들이 움찔거렸다. 이청명 장로는 바로 고함을 질렀다.
“양철목 장로!”
이청명 장로가 천주성(天柱城)의 사주를 받고 있다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알았다. 너무 적극적으로 움직였으니까. 그만큼 중요한 직무를 맡는 등 이점도 많이 가져갔지만,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반대급부로 많이 따라온 거다.
그건 그거고. 그래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밝히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말실수를 했군.”
“너무 큰 실수를 하셨소.”
양철목은 이청명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의도한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양철목이 천주성을 언급함으로써, 이제는 더 나가기 힘들어졌다.
여기서 나가면 천주성에 소속되어있다고 자인하는 셈이니까. 그런 오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도울 정도로 금정원 장로들끼리의 친밀도는 높지 않았다.
“양철목 장로는 어디 사주를 받고 일하시는 건지 모르겠군. 무림맹? 아니면 해남파요?”
이청명은 분위기를 망쳐 놓은 양철목을 잡고 늘어졌다. 혼자만 이렇게 당할 수는 없었다.
“글쎄. 알아서 생각하시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두 군데 중 하나일 텐데. 양 장로는 뿌리가 해남이고, 무림맹에서 일했으니 그 두 개 중 하나 아니겠소.”
“모두가 노리는 건 아니오. 난 그냥 강호에서 잠깐 벗어나고 싶었을 뿐.”
양철목은 그러면서 벌떡 일어났다.
“뭐, 그럼 이청명 장로에게 내가 실수를 했으니 나는 도와줘야겠군.”
이청명은 비웃음을 쳤다. 그는 확신했다. 지금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도발할 필요도 전혀 없었다.
세력들끼리 싸우면 둘을 함께 잡을 어부들이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르는 곳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양철목도 어느 세력에 속해있다는 얘기가 됐다.
“아주 고맙소.”
“별 거 아니오.”
이청명이 포권을 하고, 양철목도 같이 포권했다.
그 다음부터 이청명은 계속 장로들을 섭외했다. 같이 일하는 게 사실상 들통나있을 장로들 두 명을 더하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 몇 명도 안 되는 사람을 구하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장로들은 이청명 장로가 아예 안 보이는 듯 외면했으니까.
그래도 결국 얼굴을 들이밀고 부탁을 하는데 거절할 수 없는 성향의 몇몇 사람도 있었다.
이청명은 사람들을 모두 구하고 마지막으로 문을 나갈 때, 쉬고 있는 장로들을 바라봤다. 옛날에는 별 생각 없이 흘러가는 풍경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잠깐 까먹고 있었지만 여기도 결국 강호의 일부였다.
세력들이 서로 견제를 할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될 줄은 몰랐다. 세가를 다 먹을 때즈음 해야 서로 편할 거였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이청명은 한숨을 쉬고 문을 닫고 나갔다.
쿵.
그제야 앉아있던 모든 장로들은 닫고 나간 문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
이청명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윗층으로 올라갔다. 뒤따르는 장로들도 쉽사리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장로들끼리의 얄팍한 관계한 적나라하게 드러난 셈이니까. 깨질 관계일 줄 예상했기에 충격적이진 않았지만, 전략을 재구성할 필요는 있었다.
‘금목환···’
문득 위에서 오만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을 금목환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그놈의 변화가 원인이었다.
처음에는 광증이 든 것이라고 치부하고 흥미를 두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 어린 아이가 실제로 금정원의 표면적인 갈등을 이끌어냈으니까. 물론 그걸 의도했을 수는 없었다. 그걸 의도할 정도면 정보는 물론이요 강호에서 오래 누비지 않았으면 얻을 수 없는 통찰력이 필요했다.
이청명과 장로들은 회의장의 문 앞에 섰다. 이제 그들은 머릿수를 맞추고 바로 부결(否決)을 확정지은 다음 다시 돌아갈 터였다.
끼익. 경첩이 젖혀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오셨습니까.”
이청명과 장로들을 반긴 건 문간에서 있었던 내총관이었다.
그러나 이청명은 내총관의 인사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문 안에서는 본인이 전혀 예상 못했던 그림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총관.”
“네.”
“이건 무슨 일인가?”
“···그러게요.”
이청명의 눈에 들어온 건 금목환의 오만한 자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숙이면서 인사하는 겸손한 장면이었다.
그들은 바로 황금세가 본가 내에 있는 황금상단의 지부장, 황금전장의 장주, 표국의 표두, 행정 조직 원(院)급의 우두머리 원주들이었다.
모두가 각자 업무가 있어 장로 업무를 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장로 대우일 정도로 황금세가에서 오래 근속한 사람들이었다.
장로 회의에서 편지는 가지만 한 번도 참석한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본 업무가 바쁠뿐 아니라, 어차피 금정원 장로들이 해먹는 걸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신들은 왜 온 거요?”
이청명 장로는 굳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금목환에게 인사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내가 불렀소.”
대답한 건 그들 중 한 명이 아닌 외총관 곽진도였다.
“···왜 불렀소.”
“사람이 부족하니 부른 것뿐이라오.”
“내가 부른다고 안 했소?”
“너무 오래 걸려서 말이지.”
곽진도는 으쓱 거렸다. 확실히 외총관은 황금세가에 오랫동안 근속한 본가 사람들의 구심점이었다.
그러나 곽진도도 바깥을 나다니고, 본가는 이미 식물이 되었으니 그들이 딱히 모이고 항쟁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근데 이제는 모일 명분이 생긴 거였다. 곽진도라는 든든한 칼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 중 곽진도가 부르면 안 올 사람이 없었고, 사람들은 흔쾌히 모였다. 사실 이미 어느 정도 얘기가 되어있는 상태였기에 이청명이 나가자마자 바로 들어온 것에 가까웠다.
곽진도의 부름, 아니, 금목환의 부탁에서부터 이미 징계안의 가부는 결정되어 있던 셈이었다.
금목환은 장로들에게 아까와는 다른 성의 없는 목례와 함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여덟, 아홉. 딱 아홉분만 맞춰오셨군요.”
여상우, 이청명, 양철목을 포함한 장로들의 숫자는 금목환이 말한 대로 아홉 명이었다.
곽진도가 불러 모은 장로 대우 사람들은 자그마치 스무 명이 가까웠으니, 회의의 가부는 이미 결정 난 셈이었다.
“회의 시작할까요?”
금목환이 웃으며 말했다.
이청명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