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앉아서 천리를 본다
5화 앉아서 천리를 본다
장로들의 거처, 금정원(金井院)은 유례없는 일에 당황하고 있었다. 갑자기 이상해진 막내 공자가 이청명 장로의 징계를 제청(提請)했기 때문이었다.
“막내 공자가 직접 제청한 거라고?”
“상무당(常務堂)에 직접 징계 권유서를 냈다는군. 사유는 경거망동이라고 하던데.”
“허. 웃긴 얘기네.”
“오랜만에 장로회의 안건이 장로 징계라.”
“그러게 말이야.”
많은 장로들은 이 상황에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어차피 장로들의 징계는 장로들이 정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의미 없는 제청이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치기거나 선전포고겠군.”
“이 장로, 옥묘각에 무슨 일을 한 건가?”
많은 장로들이 물어봤지만 이청명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그들을 훑어보며 경계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누가 황금세가를 노리는 장로인지 모르니 조심하는 것이었다.
“나는 모르겠군. 일단 성실한 자세로 참석해야지. 아, 그리고 절차는 내가 도맡도록 하지.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이청명은 결국 도피성 대답을 하고 뒤를 돌아 빠져나왔다. 이청명의 도포자락이 나가고, 금정원의 문이 닫힐 때서야 장로들은 모두 문 쪽을 쳐다봤다.
*
기철은 목을 좌우로 우두둑 꺾었다.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었다. 금목환은 자신보다 어린 꼬맹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여기는 다른 가문과 다르게 직계와 마찰이 있어도 시종 편을 들어주는 유일무이한 세가였다.
또한 금목환이 근골이 장대한 것도 아니었다. 특히 금목환은 자기가 시중을 들면서 무공은커녕 운동하는 꼬라지도 보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치고 박고 싸우는 건 그러니, 다시 한 번 그 못된 손찌검을 한다면 손목을 잡아 주리라. 기철은 그렇게 다짐했다.
연금의 끝. 외부로부터 걸린 빗장을 푸는 건 담당 시종인 본인의 몫이었다.
“후.”
기철은 진시 초에 딱 맞춰 빗장을 풀었다. 아마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금목환은 어떤 모습일까. 배고프다고 울고 있거나, 힘이 빠져서 침대에 쓰러져있거나, 멍한 상태로 창문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
기철은 피식거리며 빗장이 풀어진 옥묘각의 정문을 당겨서 완전히 젖혔다.
“우와악!”
그리고 바로 비명을 질렀다. 금목환은 본인이 예상한 것처럼 굶주려있지도 않고, 힘들어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정문 바로 앞에서 시퍼렇게 눈을 뜨고 귀신처럼 서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나.”
금목환은 무심한 눈빛을 던졌다. 이상했다. 분명 당당하게 맞서야 하는데, 눈빛이 계속 땅으로 끌려가듯 아래로 향했다.
고작 닷새였지만 금목환은 너무 낯설게 변했다. 그냥,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세가 바뀐듯했다.
“오늘 좀 안내할 곳이 많다.”
닷새를 굶었는데 저런 눈빛과 정신력이 나온다니. 대체 막내공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식사는 안 하십니까?”
“할 일 다 하고 먹을 거야.”
기철은 바로 금목환에게서 오 보를 떨어뜨렸다.
황금세가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빠른 움직임이었다.
*
주렴을 들춰 창문 바깥을 바라봤다. 건곤각에서 보는 창밖 풍경은 옥묘각과는 또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금월상은 나름 생각이 있었는지 제일 조용한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 방에는 그의 전속 시종인 노인과 금월상, 나밖에 없었다.
노인은 조용히 자사호를 기울여 우리 둘의 찻잔을 채웠다.
적당히 찬 찻잔을 흔들었다. 작게 붉은색 소용돌이가 쳤다. 안휘의 명물, 기문홍차(祁門紅茶)였다.
황금세가가 있는 강서와 안휘는 붙어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기문홍차는 풍족한 편이었다. 금월상과 나는 차를 동시에 홀짝였다. 시원함과 달콤함, 훈연향이 어우러졌다.
“오늘 이청명 장로의 징계를 상무당에 내고 왔습니다.”
“프으으읍.”
바로 금월상이 뜨거운 차를 뱉었다. 다행히 뱉기 전 머리를 아래로 향해서 내가 차를 맞을 일은 없었다.
금월상은 턱에 묻은 차를 닦을 생각도 안 하고 나를 쳐다봤다.
“왜?”
“연통 없이 들어온 것에 대해서 책임을 물었죠.”
난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오히려 진지해진 건 금월상이었다.
“지금 네가 한 행동의 의미를 아느냐?”
“상무당이 깜짝 놀랐겠죠.”
난 당연히 내가 이청명을 징계에 올릴 때의 파장을 알고 있었다.
외부의 업무는 담당처가 따로 있고, 가내의 대소사(大小事)는 상무당이라는 곳에서 담당한다. 세가의 전체적인 예산, 회계, 지원 등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나는 걱정이 된다. 네가 어디까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세가에 얽힌 세력들이 너무나 많다. 아직 발톱을 드러낼 때는 아닌 것 같아.”
“형님은 발톱이 있으십니까?”
나는 금월상을 바라봤다. 금월상은 나 몰래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게 궁금했다. 내가 건곤각을 굳이 찾아온 이유는 그것이었다.
물론 중원에 알려지지도 않았을 반란 시도일 것이기 때문에 크게 기대는 되지 않았다.
심드렁한 나와 달리 금월상은 그제야 때가 됐다는 듯 비장한 눈빛을 보이며 일어났다.
“보여주마. 내 발톱을.”
나는 차를 한 번에 들이키고 천천히 그를 따라갔다. 그는 중앙 현관 쪽으로 나가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는 복도를 몇 번이나 돌아 구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창고처럼 꾸며놓은 그 방에는 잡동사니들이 일부러 정돈되지 않은 채 흩어져 있는 것 같았다.
곧 금월상은 잡동사니를 밟고 올라가더니 천장의 대들보 부분에 손을 댔다. 곧 나무 모양의 벽지가 그의 손에서 딸려 나오고 그 안에는 말굽 모양의 문고리가 보였다.
금월상이 문을 열고 올라가고, 나 역시 따라서 올라갔다. 솔직히 나는 뻔한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창고 문을 열 때의 쾨쾨한 냄새와 먼지가 일지 않았고, 잡동사니는 너무 새것이고, 벽지는 자세히 보면 떠있었으니까. 이미 장로들은 알고 있는데 묵인하는 걸까, 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난 문을 통과하면서 그 생각을 고쳤다.
“이 문을 기점으로 기감을 지우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군요.”
“···진법의 고수면 설치된 진법도 느낄 수 있는 거냐?”
“아뇨. 그거랑은 다릅니다.”
이건 내가 진법을 알아서가 아니라, 주변 기감에 예민한 상단전이 열려있기 때문이었다.
진법의 정교함을 봤을 때는, 누군가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한 수준이었다.
방은 은근히 넓었다. 건물 꼭대기인데 공간이 꽤 나왔다. 황금세가답지 않게 목재가루가 보이는 벽에는 검 몇 자루, 책 몇 권이 있었다.
“그 우리에게 차를 내준 박 노야있지 않느냐. 그 사람이 힘을 좀 썼다. 청소라는 명목으로 진법가를 불렀지.”
“외부의 시선을 속일 수 있습니까?”
“나름 선은 만들어놨지.”
난 무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퍽 놀랐다. 아무리 제한되었다지만 바깥으로 직접 연결할 수 있는 통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금월상은 전생에서도 이런 걸 계획했었던 것 같다. 내가 모르는 세가 정상화 시도가 전생에서도 많이 있던 것이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말했다.
“이게 발톱이군요. 여기서 무공을 따로 익히시나보네요.”
“그렇지. 내 초식 한 번 보여주마. 무공을 모르는 네가 어떻게 볼지는 모르겠지만, 눈요기는 될 거다.”
금월상은 바로 벽에 있는 푸른 검병을 가진 칼을 들었다.
나는 알아서 구석에 앉았다. 무공을 보는 건 내 기억에서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전생에서 죽기 직전, 무림맹 사람들을 본 것.
허나 그때는 제대로 볼 생각도 안 했다. 그렇게 따지면 난 무공이라는 걸 처음 접하고 있는 거였다.
“이궁천뢰검법(離宮天雷劍法)이라는 것이다.”
검을 잡은 금월상의 몸이 푸른 진기로 감싸졌다. 난 무인들의 경지 같은 것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저게 얼마나 강한 건지도 몰랐다.
곧 금월상은 발을 움직였다. 저게 흔히 말하는 보법이라는 것이었다.
난 한 번 상단전을 열어봤다. 상단전을 열어놓으면 기의 흐름이 다 보이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보법을 밟자 발밑에서 진기가 형성됐으며, 땅의 기운이 바뀌었다.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을 자신의 기운과 동화시킨 것이다. 저게 보법의 정수인가 싶었다.
금월상은 네 방위를 점하는 식으로 분주하게 발을 움직였다. 발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땅에 있는 진기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럽게 발과 땅의 흐름이 맞춰지고 속도가 빨라졌다.
곧 보법에 따라서 검법이 이어졌다. 이궁천뢰검법. 검에서 번개가 거꾸로 치는 것처럼 내기가 성난 모습을 해보였다.
검은 번개처럼 강력하고 빨랐다. 빠르게 휘둘러지는 검은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기의 움직임은 세밀하게 느껴졌다.
검병을 앞으로 하는 듯 하더니 손목을 비틀어 내지르고, 창처럼 연속적으로 내질러졌다. 그 이후로도 금월상의 초식은 이어졌다.
금월상은 네 초식을 내 앞에서 보여주고 검을 허리춤에 넣었다. 일 다경도 안 걸리는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그의 얼굴은 땀에 움푹 젖어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어땠느냐?”
“멋있네요.”
난 아직 무공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기의 흐름 같은 것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특히 삼 초식이 괜찮았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했더니, 금월상은 기묘한 표정을 해보였다. 이내 곧 뭔가 생각의 정리를 마쳤는지 다시 자애로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떤 것 말이냐?”
“인(儿)자로 베신 그 초식 말입니다.”
내 손짓을 동반한 말에 금월상은 다시 기묘한 표정으로 돌아갔다가, 이번에는 경악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게 보였단 말이냐?”
“기가 느껴졌습니다.”
“허.”
금월상은 탄식했다.
“박 노야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검술의 초식을 본다니··· 믿을 수 없군.”
“박 노야요?”
“그 사람이 엄청나거나 그랬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한 현에서는 고수로 인정받을 정도의 사람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박 노야의 얼굴을 떠올렸다. 피부의 탄력도 다 잃은 채 차나 타는 게 고작일 것 같은 사람도 무인이라니.
어떻게 보면 내가 좀 소홀했던 거였다. 나는 평상시에는 상단전을 열어놓지 않으니까. 상단전의 운용은 뇌를 가속시키는 것과 유사하다. 계속 열어놓으면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기는 내가 처음 오는 곳. 어느 정도는 정보를 얻고 가야했다.
“그랬군요.”
나는 살짝 반성을 했다. 금월상은 여전히 나를 묘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나름 갈고 있던 발톱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생한테 보여주니 우스운 꼴이 됐구나.”
“아뇨. 잘 봤습니다.”
솔직한 평을 하자면, 일신의 힘으로만 세가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니 쓸모없는 짓이기는 했다.
중요한 건 일신 무공의 경지가 아닌 외연의 확장이었지만 금월상 입장에서는 그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그는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열심히 하고 계셨군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왜요?”
나는 궁금했다. 충분히 포기할만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전생에서는 난 포기했다.
이미 묶인 채로 태어났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를 해소하기에는 너무 거력이 필요했다.
나야 미래를 알고 있으니 짐이 좀 덜하다지만, 금월상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데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맏이의 몫이지. 내가 후계자를 노리는 건 그 때문이다. 너희들이라도 이 세가에서 벗어나게끔 하려고.”
“···예?”
난 진심으로 반문했다.
“애초에 우리 가족은 사실 남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실 이유가 전혀 없으셨을 텐데요.”
전생에서도 금월상은 같은 생각을 갖고 움직였을 거였다. 그건 나도 눈치를 못챘고, 금화청, 금수린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가족이 가족을 지키는 데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난 그런 숙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한단다.”
“제 생각이 짧았군요.”
나는 형제들에게 너무 무관심했다. 아니, 사람 자체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그러나 알면 된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내가 한 건 작은 행동이었다. 지금 나와 전생의 나의 차이는 고작 엿새였다. 연금을 제외하면 하루였다. 하루 만에 이렇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난 이 변화를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아직 발톱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고 하셨죠. 그에 대한 답을 지금 해드리겠습니다.”
“어?”
갑자기 바뀐 대화 주제에 금월상이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말은 이어졌다.
“형님 말대로 지금 세가는 많은 세력에 의해 얽혀있습니다. 그것도 너무 많은 세력이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죠.”
“그래. 그걸 알고 있으면서 왜···”
“그건 상대방 세력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내 말에 금월상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세력들은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하지만, 그들의 경쟁 상대는 우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가를 노리는 다른 세력들이죠. 이 불안한 균형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빨리 최대한 알려야합니다. 위협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이 의식할 정도까지는 말이죠. 그러면 그 세력들은 더 경쟁하고, 더 합의점을 늦추게 될 겁니다.”
금월상은 내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눈이 침중해져갔다.
“상무당에 징계 건의를 직접 한 건 앞서 말한 것과 더불어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징계 같은 장로 회의가 열려야 할 때면 외부에 있는 장로들에게도 참, 불참 여부를 묻습니다. 외부에 나가있던 장로들 중 우리와 적대하는 자면 이제 황금세가를 접수하는 데에 변수가 하나 더 생겼음을 알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를 비호하려는 사람도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를 비호하려는 사람이 누구란 말이냐?”
나는 말을 하려다 잠깐 멈췄다. 지금 말하면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마 보름 정도 지나면 알지 않을까요?”
“어?”
금월상의 황당한 얼굴을 무시하고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비밀 연무장은 사방이 막혀있어 답답하고 더웠다.
난 바깥의 기척을 확인한 다음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금월상은 나를 보며 계속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열흘째 서찰을 받으시고 웃으신 다음, 닷새 안으로 오실 거니까요.”
그 말과 함께 연무장 바닥을 잡고 있는 손가락의 힘을 풀고, 창고로 내려왔다.
*
붉은 주단과 금붙이들이 붙어있는 화려한 의자는 바닥에서 세 계단은 위에 있었다. 그 의자의 좌우 너비는 두 자로 결코 좁지 않았지만, 앉은 남자의 거대한 체격 때문에 좁아보였다.
남자는 웃음기를 띄고 주먹을 볼에 걸치고 있었다.
편지를 전달한 사람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세가에서 온 서찰을 받고 재밌어하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어서.”
남자는 계속 편지를 곱씹으면서 보고는, 볼 때마다 웃었다. 계속 낄낄거리던 그는 편지를 반으로 접어 품에다 넣고, 아래를 보며 물었다.
“여기서 남창(南昌)까지 얼마나 걸릴까?”
“제가 열흘이 걸리니···”
“닷새면 충분하겠군.”
남자가 큰 몸집을 일으키며 일어났다. 오랜만에 세가로 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