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언제든지 오시지요
4화 언제든지 오시지요
금월상은 멈칫했다. 그의 입장은 이해가 됐다. 어디로든 빨리 숨으라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으라니.
“가만히 있으라고?”
금월상은 자기가 잘못 들었는지 다시 확인하고자 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구석으로 좀 더 가세요.”
“···이, 이렇게?”
“좋습니다.”
금월상은 내 단호함에 얼떨결에 구석으로 몸을 움직였다.
시간이 없었다. 이 정도 속도를 내면서 다가올 수 있는 건 무조건 장로뿐이었다. 장로급의 고수 앞에서 숨어봤자 기감으로 들통날 게 분명했다.
“사람 하나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진법을 설치할 겁니다.”
“진법?”
금월상이 황당해했다. 확실히 진법이 쉬운 건 아니었다. 오행, 괘(卦), 역(易), 방위(方位), 상극(相剋) 이외에도 다방면으로 깊은 공부가 되어있어야 펼치는 게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 공부가 되어있다고 설득할 수도 없고, 증명할 시간도 없었다. 난 바로 옆의 서랍에서 조약돌들을 꺼냈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모아둔 거였다. 원래 진법에 쓰는 목주나 철주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간략하게 쓸 거면 조약돌 몇 개로도 충분했다.
“지금부터 최대한 참으세요. 기침도, 가려움도.”
“···아, 아니. 잠깐···”
금월상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돌을 뿌린 다음, 발로 끌어서 진법을 만들었다. 곧 돌이 규칙적으로 금월상 주변에 흩어졌다.
무언가를 숨기는 은진(隱陣)은 가장 기본적인 진이었다. 기문둔갑(奇門遁甲)에서 둔갑(遁甲)이 바로 갑을 숨긴다는 의미이니.
모든 땅과 공간에 흐르는 기는 같지 않다. 화산 근처에는 화기가 강하고, 강에는 수기가 강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 기를 잠시 인위적으로 누르거나 증폭시켜서 차안(此岸)에 간섭하는 게 진법의 기전(機轉)이다.
내가 하는 일은 바로 금월상이 있는 곳을 갑의 위치, 즉 구궁(九宮)의 중심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돌을 옮겼을 때, 돌이 살짝 흔들리고 투명해지는 듯 하더니 금월상도 같이 배경에 녹아들고 기척마저 사라졌다.
“어?”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공간에서 금월상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렸다. 난 바로 입술을 일자로 만들고 이빨 사이로 숨을 들이쉬었다. 다행히 뜻은 통했다.
금월상을 숨기고 눈 두 번은 깜빡했을까, 바로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방에서 벗어나 복도를 걸었다.
유리창의 진동은 건물의 진동을 일궈냈다. 나는 그럼에도 최대한 급한 티를 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정문이 열렸다.
머리 한 올만 우스꽝스럽게 이마 앞으로 넘겨진 채로 온 남자는 내가 예상한 사람이었다.
“이청명 장로님. 어쩐 일이시죠?”
“막내 공자님. 이 시간에도 안 주무시고 계셨군요.”
“들었다 깬 겁니다. 건물에서 진동이 울려가지고요.”
“그렇군요.”
이청명은 날 호기심 있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내게 묻고 싶은 게 참 많은 듯했다.
난 픽 웃었다. 머리카락이 웃긴 걸 떠나서 이청명 장로가 날 올려다보는 게 퍽 마음에 들었다. 그 웃음은 이청명 장로를 살짝 건드린 듯했다.
“혹시 공자님, 외부인이 들어온 적 있습니까?”
“아뇨.”
이번에 반대로 이청명이 슬쩍 웃었다. 그는 나를 압박이라도 하려는 듯이 계단을 한 칸씩 천천히 올라왔다.
“확실히, 뭔가 변하시긴 하셨군요.”
“뭐가요?”
“원래 제 눈도 못 마주치셨지 않습니까. 목소리도 작고.”
그 정도는 지옥을 한 번 갔다 오면 쉽게 교정되는 것이었다. 대수롭지도 않은 걸 무겁게 말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죠.”
곧 이청명은 내가 있는 층계로 올라왔다. 내 몸 전체에 그림자가 서늘하게 드리워졌다. 이청명과 나는 키가 한 척이나 차이가 나서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질문에 대답해주시죠. 제가 드리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외부침입이 있으셨습니까? 아니면 밖으로 나가신 적이 있습니까?”
어떤 협박을 하든, 여기서 가장 현명한 대답을 나는 알고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밖으로 나갔었는지, 외부침입을 봤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나는 웃었다. 이청명도 따라서 웃었다. 곧 그는 품속에서 자주색 옷감을 꺼냈다. 어디서 걸려서 뜯어진 것만 같은 천이었다.
“정문에 들어오기 전에 주변의 창문을 전부 둘러봤습니다. 남서쪽에 있는 창틀에 이런 천이 있더군요.”
“그렇군요. 제 시종을 문책해야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청소가 제대로 안 되어있으니 말이죠.”
“아닙니다. 이 천은 방금 뜯어진 것입니다. 그 근처에 진법에 걸린 흔적이 남아있거든요.”
득의양양하게 자주색 천이 내 눈 앞에서 흔들렸다.
하긴 금월상이 제자리에서 그렇게 뛰었으니 흔적이 안 남으면 이상했다. 이청명은 마치 날 구석에 몬 듯이 행동했다.
하지만 내 행동은 그가 어떻게 나오든 정해져있었다.
“난 모르는 일입니다.”
“발뺌을 하시겠단 말씀입니까?”
“제대로 된 증거가 없으니 발뺌할 거리도 없습니다.”
이청명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마치 우는 아이 달래듯 내게 다리를 굽히며 눈을 마주쳤다.
“공자님. 어찌 이렇게 급하게 변화하신지 모르겠지만, 강호는 떼를 쓴다고 돌아가지 않습니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이청명은 그리고 말을 다리를 펴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한 번 집을 확인해도 괜찮겠습니까? 어떻든 침입자는 색출해야 하니까요.”
“싫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강제로 해야죠.”
“그럼 그러세요.”
나는 그렇게 계단을 내려갔다. 일층 현관쪽 의자에서 기다릴 참이었다. 이청명은 반박할 줄 알았는지 김이 좀 샌 표정이었다. 그가 안심할 때 쯤, 난 뒤로 돌았다.
“대신 찾아내지 못하면 연통 없이 무례하게 찾아온 것에 대한 책임을 묻겠습니다.”
“···허허.”
그렇게 나는 일층으로 내려가고, 이청명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
이청명은 당황스러웠다. 지금 옥묘각을 뒤진 지 반 시진이 지났다. 그러나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기감을 펼쳐 봐도 느껴지는 건 일 층에 발칙한 꼬맹이밖에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분명히 안에 누군가가 들어온 건 확실했다. 적어도 황금세가의 직계에 대해서는 모르거나 불확실한 정보가 있어서는 안 됐다.
“이 정도면 진법이 아니고서야···.”
그러나 옥묘각에 진법을 설치한 것도 진법가 다섯 명이 붙어서 했는데, 갑자기 침입자를 숨길 진법이 생겼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잠깐 이청명은 부르르 떨었다. 막내 공자의 거처에 침입자가 있었는데 못 찾았다고 보고하면, 어떤 문책을 받을지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저 정도면 인간이 바뀐 정도가 아니군.”
보통 바뀌었다고 하면 신경질을 좀 더 부린다거나, 조금 더 우울해진다거나 하는 정도가 상식이다. 저 정도면 막내 공자가 바꿔치기 당한 걸 진심으로 의심해야할 판이었다.
그건 그거고, 당장 이청명에게 중요한 건 침입자를 찾는 일이었다. 옷장은 물론이고 침대 밑, 의자 밑까지 샅샅이 살펴도 없는 건 없는 거였다.
“아직도 못 찾으셨습니까.”
그때 바로 뒤에서 막내공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청명은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막내공자는 기감이 없어서 오는지도 눈치를 못 챘기 때문이었다.
금목환은 역광에 서서 마치 어린 저승사자를 보는 듯 했다. 그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놀라셨습니까?”
“···아뇨.”
이청명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귀까지 빨개진 건 덤이었다.
“이제 나가시지요. 밤이 늦었습니다. 저도 좀 자야죠.”
“무슨 술수를 부리셨습니까?”
이청명은 인정할 수 없었다. 모든 심증이 옥묘각에 사람이 들어왔다는 걸 가리키고 있었다. 반드시 알아야 했다. 막내 공자를 오밤중에 찾아올 정도로 은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무슨 죽기 직전 녹림도 같은 말씀이십니까.”
금목환은 입을 비틀어 이죽거렸다. 이청명은 강호에 들어와서 이런 모욕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이청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했다. 무슨 사술을 썼는지, 아니면 비밀통로가 있는 걸 수도 있다. 다만 자기가 못 찾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신, 이 정도로 술수를 부릴 줄 알게 되었다는 것도 큰 정보였다.
“···제가 어른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군요.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금목환은 이제 흥미까지 떨어졌다는 듯 눈까지 마주치지 않았다. 이청명의 헛웃음이 다시 한 번 나왔다. 고작 열두 살한테 신경전이 밀린다는 생각이 치욕스러웠기 때문이다.
이청명은 정문으로 나가기 직전, 무언가 생각나서 뒤로 돌았다.
“공자님. 제가 흔적을 못 찾으면 책임을 묻는다고 하셨죠. 어떻게 물으실 생각입니까?”
“제 연금이 끝나는 날 아시게 될 겁니다.”
금목환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휑하니 돌려 이청명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계단을 올라갔다. 모욕적인 축객령이었다.
*
“푸아. 흐으, 하아.”
오래 잠수라도 한듯 금월상이 내가 있는 쪽으로 뛰쳐나와 엎드렸다. 반 시진을 넘게 같은 자세로 서있는 게 힘들긴 했을 거다.
또 진법 안에서 진법 바깥쪽은 보이니, 이청명이 방에 들어왔을 때는 엄청나게 긴장했을 터였다.
금월상은 몸을 몇 번 굴러서 굳은 근육을 풀었는데, 그 모습이 재밌었다.
“잘 참으셨군요.”
“···그래.”
금월상은 내가 보고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민망해하면서 일어섰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목환아. 넌 뭐냐?”
“뭐가요.”
“이 나이에 진법을 사용하다니. 제갈세가에서도 탐낼 훌륭한 재능 아니냐!”
그렇게 말하는 금월상은 본인이 기쁜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금월상을 바라봤다. 꽤 순수한 것이 조금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형님. 제가 진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주시죠.”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냐. 네가 지금까지 감춰온 이유가 있을 텐데. 지금까지 말도 없고 소심하고 우중충했던 것도 다 뜻이 있었던 거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평가를 받았었던 건 알고 있었다. 어차피 뻔뻔하게 나가는 게 좋았다. 지금부터는 모든 게 바뀐다.
“네게 묻고 싶은 게 많구나. 어째서 그동안 숨기고 있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금월상은 눈을 초롱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말씀하시죠. 벌써 인시입니다.”
“···어?”
“제가 광증인지 아닌지 확인하러 오셨다고 안했습니까. 광증이 아니니까 가시면 되죠.”
“아니, 그렇다고 이건···”
“곧 찾아가겠습니다.”
뭔가 금월상은 내게 형제의 우애를 느낀 것 같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바깥의 진법은 이청명이 들어올 때 풀고 와서 여기 있을 변명거리도 없었다. 금월상이 쓸쓸한 표정을 하고 나가려고 할 때 나는 말을 덧붙였다.
“북쪽 창문으로 나가세요. 거기가 무곤진의 생문(生門)입니다.”
금월상은 그제야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그래. 고맙다.”
나는 금월상이 옥묘각을 나가는 걸 확인하고,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금월상에게 말한 것처럼 잠을 잘 시간은 없었다. 눈을 감고 태을헌원신공을 일으켰다. 시간이 없었다.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내 편이 올 때까지 나는 최대한 성장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