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문제 있나?
1화 문제 있나?
난 멍하니 옥묘각(屋猫閣)에 앉아있었다. 팔과 다리를 봤다. 손가락 다섯 개씩, 발가락 다섯 개씩으로 숫자가 맞았다.
황금세가는 중원에서도 가장 넓은 크기를 자랑하는 장원이었다. 자식 한 명한테 건물 한 채를 넘기는 건 우스웠다.
그때는 몰랐었다. 들락거리는 시종들, 먼 친척들이 날 얼마나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는지.
여전히 똑같았다. 붉은 비단을 덧댄 안감의 의자와 삼백년 산 적송(赤松)으로 짜인 책상과 책장. 천장에는 하얀색 호랑이와 녹색 용이 분투를 하는 그림이 있었다.
“세상이 야속하지만은 않구나.”
난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에게는 과거로 떨어졌다는 게 황당한 일이고,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피가 섞인 가족들이 손과 발을 자르고 이십년 가둔 걸 묵인한 것도 말이 안 됐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두 번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오히려 그동안 겪었던 과거에 비하면 미진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똑똑하고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내가 말하자 시종이 들어왔다. 시종 역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쭉 내 밑에 있던 기철이라는 이름이었다.
동자승처럼 푸르뎅뎅하게 깎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이때는 참 귀엽게 생겼었다. 하긴 기철은 나랑 네 살 차이밖에 안 났으니까.
내 나이는 열 둘 정도 된 것 같다. 그럼 기철은 열 다섯 정도 됐겠다.
“오랜만이네.”
“네?”
“아니야.”
기철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난 창문의 발을 살짝 올려서 바깥을 바라봤다. 이미 해가 쨍쨍히 빛나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공자님.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보다 지금 몇 시쯤 됐지?”
“사시(巳時)입니다.”
“그래? 왜 안 깨웠어?”
원래 황금세가의 자제들은 진시(辰時) 초에 기상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것은 우리 아버지, 가주가 만든 규칙이었다.
“···네?”
기철이 살짝 고개를 들어 날 봤다. 그 치켜뜬 눈은 도발적이었다.
기억이 난다. 난 이때 마음이 너무 약했다. 두려움을 인내로 착각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했더랬다.
그 중에서 내 옆에 가장 오래있던 기철에게는 다른 형제들보다 시종에게 잘해준다고 스스로 자부하기도 했다.
근데 나중에 기철이가 내 개인적인 사생활, 규칙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줬다고 들었다. 오히려 다른 형제들의 시종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이 황금세가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곳이었다.
돌아왔지만, 여전히 이 가문에 대해 모든 걸 안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았다.
“왜 안 깨웠냐고 묻고 있잖아.”
나는 조용히 물었다. 난 먼저 화를 내고 그러지는 않았다. 살면서 난 화를 내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과거에는 거의 멍청하다시피 있었다. 그때는 사람의 중요성도 몰랐고, 책만 보고 공상만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기관진식이나 온갖 공부에는 통달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런 시절 때문에 난 고통을 겪은 거였다. 다시 그런 실수를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몇 번 깨웠는데 공자님이 안 일어나셔서 안 깨웠습니다.”
기철은 머리를 꼿꼿하게 펴면서 말했다. 나를 아니꼽게 보는 표정은 덤이었다.
그래. 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시종들한테 뭐라 하지 않기에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
“그렇다고 안 깨워?”
“어차피 다시 주무시니까 안 깨운 건데요.”
입이 삐쭉 나왔다. 이해는 한다. 기철도 표정관리하기에는 어린 나이지.
“그건 좀 다른 얘기지. 네가 날 깨우는 건 일이야. 내가 일어나는 건 선택이고.”
“···죄송합니다.”
기철은 말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진심 어린 사과는 아니었다. 그냥 면피용 사과였지.
물론 억울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안 이랬던 사람이 까다롭게 굴고, 또 자기가 안 일어나면서 깨우는 걸로 뭐라 하는 것도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걸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걸 전부 이해했을 때의 결말을 막 보고 온 참이니까.
“기철아.”
“네.”
“표정 풀어라.”
“···네?”
“네가 들은 게 맞으니까 되묻지 마. 대전(大殿)에는 다 모여 있어?”
“네.”
나는 팔걸이를 잡고 일어났다. 소위 명가(名家)라는 것들은 쓸데없는 규칙이 많았다.
그 규칙 중 하나는, 적어도 가족이 혼자 밥 먹게 두지는 마라는 것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매일 혼자 먹지만, 아버지는 규칙을 창시할 수 있는 신이니까 우리와는 다르다.
“그래. 안내해.”
“안내요?”
나는 기철이를 바라봤다.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길도 알고 있으면서 뭘···”
심지어 이런 혼잣말까지 한다. 속으로 살짝 웃었다. 이건 나름 어린 아이끼리의 기싸움이다.
사실 어릴 때는 돈이나 지위 같은 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한테 이렇게 존댓말하는 것도 이해를 못할 터였다.
과거의 나는 어땠나. 그저 싸우는 게 싫어서 그냥 못 들은 척했던 것 같다.
기철이는 이미 자신의 말이 내게 들린 건 아는 듯 뒤를 돌은 상태였다.
“기철아.”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걸어갔다. 기철이는 뒤를 돌아봤고, 나는 곧장 그에게 뺨을 후려갈겼다.
기철이는 쩍소리와 함께 바로 장판으로 나동그라졌고, 난 곧장 그의 머리 위에 올라타 뺨을 계속 후려갈겼다.
쩍! 쩍! 쩍! 쩍!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채찍질하는 소리가 천장 높은 옥묘각을 울렸다.
기철이의 볼이 붓고 눈이 찌그러졌을 때야 난 손찌검을 멈추고 일어났다.
“일어나.”
기철이는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에는 억울함, 분함이 섞인 눈물이 아른아른 맺혀있었다. 이해는 한다.
난 실제로 집의 길을 까먹어서 안내를 부탁한 것이었다. 난 어릴 때도 반쯤 자발적인 연금(軟禁) 상태였고, 나이가 좀 찼을 때는 습한 지하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에게 억하심정을 담아서 친 건 아니었다. 기철이가 나한테 실수를 했고, 처벌권이 나한테 있으니까 시행한 것뿐이다.
그래도 나는 기철이가 어린 걸 참작도 해주었다. 만약 남궁세가, 진주 언가, 하북 팽가 같은 무가(武家)에서 시종이 대들었다면 귀 한 쪽이 날아갔을 터였다. 강호란 그런 세계였다.
“다시 안내해.”
난 말했다. 기철이는 곧장 뻣뻣하게 일어나 움직였다.
다행히 시종이 주인을 안내할 때 오 보(步)의 격차를 두는 건 잊지 않은 듯했다.
대전에 가까워질 때마다 나는 냉정해졌다. 첫째 형, 둘째 형, 셋째 누나. 이들을 다시 봐야 했다. 가주 자리를 다투고 죽자고 싸웠던 사람들을 다시 봐야 하는 거다.
긴장은 되지 않는다. 감정은 어제 내가 메여있던 구속구 안으로 다 빨려 들어갔으니.
안내를 마친 기철이는 문 옆쪽으로 서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넷째 공자님 입관(入館)하십니다!”
곧 바로 커다란 문이 안쪽으로 느리게 열렸다. 유선형을 반으로 잘라서 접은 것 같이 보이는 문에는 장식이 지나치게 화려했다. 과거에는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이 장식이 무엇을 뜻하는 것을 안다.
고오오오-
문이 두껍기도 하고 워낙 무겁기도 해서 대전의 문을 열 때면 언제나 이상한 소리가 났다.
“오셨습니까. 공자님.”
세가의 커다란 문에는 웬만하면 호위무사 두 명이 붙어있었다. 난 그들을 슥 일별하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붉은색 구슬로 꿰매어진 발을 헤치고 나아가니, 내 형제들의 앳된 모습이 보였다.
중앙에 앉은 금월상(金月霜)과 그 왼쪽의 둘째 형 금화청(金火淸) 오른 쪽의 셋째 누나 금수린(金水璘).
“막내 공자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 있는 개인 전담 시종들. 내게 기철이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모두 붙어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기 전에 형제들의 면면을 살펴봤다. 첫째 형은 열아홉에 몸이 다 큰 듯 벌써 근골이 장대했고, 둘째 형은 귀찮고 피곤하다는 표정을 짓고, 셋째 누나는 겁먹은 듯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왔으면 앉지. 뭘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냐.”
금화청은 내가 쳐다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네.”
난 고개를 꾸벅이고 자리에 앉았다. 잠깐 그들의 성격을 떠올리느라 멈칫했다.
확실히 가장 먼저 기억났던 건, 둘째, 금화청의 미친 개 같은 성격이었다. 특히 나만 물어뜯는 미친 개였지.
“매일 형님, 누님들보다 늦게 오는 막내가 있다니.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구나. 또 책을 보다가 시간을 놓쳤다고 할 셈이겠지?”
금화청은 날을 세우며 말했다. 물론 우리는 후계자를 놓고 다투기 때문에 친해질 수 없는 관계는 맞았지만, 금화청은 그것을 제외하고서도 날 싫어했다.
내가 조용하고 소심했던 건, 시종들만을 가리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 형, 누나, 장로들에게도 모두 쥐 죽은 듯이 대했다.
난 이 황금세가에 처음부터 드리워져있는 압박감을 견디기에는 기가 약했던 거다.
물론 지금은 독기(毒氣)를 채워놔서 상관없었다.
“시종 관리 좀 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러자 여섯 명의 눈동자가 내 뒤에 조용히 턱을 당기고 있던 기철에게로 향했다.
“···때린 거냐?”
금월상이 눈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묵직한 목소리가 식당 전체를 메웠다.
나는 금월상의 얼굴을 바라봤다. 금월상은 나를 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눈빛을 받는 것도 어이없었다. 어차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경쟁자였으니.
“예의범절이 안 되어서 교정 좀 했습니다.”
“사람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특히 목환이 네가 그러니까 어색하구나.”
“원래 선비는 삼 일 안 보면 달라져있어야 한다고 책에서 가르치더군요.”
“···내 말이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 텐데.”
금월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 식당과 부엌을 가르는 발이 들춰졌다. 그 사이로 드르륵, 소리를 내며 요리들이 담긴 작은 수레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뒤에서 수레를 끄는 사람은 내총관이었다. 식당에는 언제나 내총관이 직접 음식을 내오고는 했으니.
내총관이 들어오자마자 식당은 수레 끄는 소리만 시끄럽게 울렸다.
눈썹이 하얗게 새고, 주름이 깊게 패인 노인이 황금세가의 내총관이었다.
내총관은 우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식탁에 음식들을 옮겼다. 음식을 다 옮길때즈음, 금화청이 웃음을 피식 흘렸다.
“큭.”
바로 내총관의 눈빛이 금화청을 향했다. 금화청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내총관이 식사 중에 말하는 것 예의가 없다고 하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아서. 저 막내 뒤의 시종을 봐주겠나?”
“네?”
내총관은 내 뒤의 기철을 보고, 바로 기함했다. 내총관은 바로 기철의 얼굴을 붙잡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기철아.”
기철은 나와 내총관을 살짝 번갈아봤다. 잠깐 갈등을 하는 듯했지만, 기철은 바로 내총관에게 붙어서 말했다.
“막내 공자님이 손찌검을 하셨습니다.”
내총관은 나를 바라봤다. 눈빛이 흔들리는 게 못 믿는 눈치였다. 난 그가 확신하기 편하도록 손에 턱을 괴고 눈을 마주쳐줬다.
그제야 내총관은 내가 때린 걸 믿는 듯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변했다. 하인이 주인에게 짓기는 상당히 무례한 표정이었다.
“주인이 하인의 교정을 시킨 건데, 문제 있나?”
이게, 내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삶의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