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그런 쓸데없는 농담 하자고 부른 겁니까?”
“그럴 리가. 위트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넌 옛날부터 그랬지.”
“…….”
성 팀장은 슬쩍 인상을 찌푸려 박세훈을 바라봤다.
다른 빚쟁이가 저딴 말을 했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보복 조치를 가했겠지.
하지만 박세훈에게는 쉽지 않았다.
비단 그가 자신의 옛 직장 상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백현씨랑 용승씨 그냥 보내줘서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지.”
박세훈은 그러면서 스마트폰 하나를 휙 집어던졌다.
스마트폰을 받아든 성 팀장은 켜져 있는 액정 화면을 확인했다.
복잡한 차트와 숫자들이 보인다.
그 중이 눈에 띄는 건 단연코 하나.
-보유 자금 5,131,546,552.
-수익률 411%.
붉은 글씨로 써 있는 글자들이었다.
51억.
10억 조금 넘는 초기 투자금으로 4배 넘게 불렸다.
“이 정도면 보답이 됐으려나?”
씩 웃는 박세훈의 말에 성 팀장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행은 가벼워도 능력 하나만큼은 훌륭한 남자다.
비록 한 번의 판단 미스로 엄청난 빚을 져서 이렇게 됐지만 성 팀장은 그의 능력을 잘 알았다.
“수고했습니다.”
성 팀장은 스마트폰을 챙겨 넣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가 뒤돌아 다시 자신의 사무실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성 팀장. 백현이를 너무 쉽게 보내준 거 아냐?”
“…당신이 요청한 것 아닙니까. 그만한 대가를 치를 테니 두 사람 빚 다 갚으면 아무 수작도 부리지 말라고.”
“그건 그렇지.”
“그리고 저에 대해 잘 아실 텐데요. 전 계약대로 합니다. 계약서에 적혀있는 빚만 다 갚으면 그 후에는 건들지 않아요.”
“맞아. 그게 네 철칙이긴 했지.”
성 팀장의 칼 같은 성미는 박세훈도 잘 알았다.
독사 같은 성정에 비해 저런 면에서는 또 확고했다.
그렇기에 음지에서 신뢰를 받고 있는거지.
“그치만 말이야. 너무 순순히 풀어줬단 말이지. 백현씨 정도의 잠재력이면 빨대 팍팍 꼽을 수 있겠다 싶을 텐데.”
(주)머니앤캐시에서 만든 채무 계약서답게 잘 찾아보면 독소 조항도 여럿 있었다.
그런 걸 들먹이며 묶으려면 얼마든지 묶을 수 있을 터.
그러나 성 팀장은 깔끔하게 백현을 풀어줬다.
아무리 박세훈이 대가를 지불했다지만, 좀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백현씨가 친구 보증을 잘못 서줬다가 여기 들어왔다고 했지? 그 친구가 누구야?”
“…얘기 다 끝났으면 바쁘니 이만 가봅니다.”
성 팀장은 대답해주지 않고 복도로 향했다.
박세훈은 한동안 그의 등을 빤히 쳐다봤다.
‘저놈 저거. 백현씨가 아니라 그 친구란 사람이 핵심이었구만.’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고 돌아간 성 팀장이지만 박세훈은 그걸로 눈치챘다.
절대 저렇게 얌전히 돌아갈 리가 없는데 저런 식으로 나올 리가 없던 것이다.
백현을 순순히 내가 보내준 이유는 자신의 부탁 이외에도, 아예 그에게서 관심이 좀 떨어졌기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건 ‘그 친구’ 인 것 같으니 말이다.
‘나중에 백현씨 보면 친구에 대해 좀 자세히 물어봐야겠군.’
박세훈이 반짝였다.
잘만 하면 이쪽에서 한 방 먹여줄 수도 있겠다.
* * *
“사는지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백현은 어안이 벙벙했다.
간신히 빚을 다 갚고 그 지옥 같던 곳을 탈출했다.
무일푼에서 시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모텔에서 지내며 캡슐방을 전전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대룡 미디어로부터 사무실을 지원받다니.
심지어 그냥 사무실이 아니었다.
-원래 저희 길드에서 분점 개념으로 쓰려고 계약해둔 곳이 있는데, 일단 거기를 쓰세요. 누추하지만 지금 당장 새로운 매물이 나오지 않아서… 죄송하네요. 참.
정신찬은 마지막까지 미안해했다.
그래서 별 기대를 안과 왔었는데…
‘이런걸. 줄 거면서 왜 미안해한 거야?’
사무실은 굉장히 컸다.
캡슐이 놓여있는 메인룸 하나.
그 옆에는 휴게실이 따로 여러 개 있었는데, 하나하나 휴게실이 1.5룸에 가까웠다.
아예 여기서 눌러 지내도 될 정도였다.
“백현씨…. 능력 진짜 좋으시네요. 하루도 안 되어서 이런 곳을 구해오시다니….”
이용승이 감탄했다.
방을 구했다는 백현의 말을 들었을 때는 그런가 보다 했지만, 설마 이런 곳일 줄이야.
“이거 월세 꽤 셀 것 같은데…”
“제가 랭커 된 기념으로 대룡 미디어에서 지원해준대요. 이제부터 용승 씨 월급도 그쪽에서 대납해 줄 거예요.”
“정말 좋은 곳이군요. 역시 업계 최고라고 불리는 곳은 다르네요.”
이용승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이 이어서 말했다.
“아. 그리고 여기 건물 1층에는 입주민을 위한 피트니스 센터도 있대요. 24시간 오픈되어서 아무 때나 사용하면…”
“오…이런!!?”
이용승이 날아갈 듯 양손을 치켜들었다.
표정은 헤벌쭉해져 있었다.
“구경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더니 잽싸게 문으로 달려갔다.
백현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 * *
랭커가 됐고 머니앤캐시의 감옥을 벗어났다.
-띠링!
[NEW! ‘스트리머 언럭키’ 채널에서 라이브가 시작되었습니다.]
[제목 : 랭커 된 기념 소통 방송!]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라이브였다.
새로운 사무실. 새 출발 기념으로 라이브를 켠 것은…아니었다.
‘돈 벌어야지.’
다행히 사무실을 구했고 휴게실에서 숙식 해결하면 된다지만, 박세훈의 빚 7억을 갚아줘야 한다.
혼자 남겨두고 와서 미안한데 밖에서 우리만 놀면 되겠는가.
허리띠 졸라 메고 달려야지.
다만 이번 라이브 때는 조금 다른 게 있었다.
<ㅎㅇ 1빠! 내가 가장 먼저 왔…???!!> <헐 미친. 언럭키님…?>
<뭐야. 지금 캠 켠 거예요?>
라이브 방송 한 구석에 현실 그의 얼굴이 나온 것이다.
-백현님.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캠 켜시면 구독자 2배로 증가할 거예요.
-길드장님 무슨 소리세요. 2배라니요.
-세린씨는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2배가 아니라 10배겠죠. 지금 언럭키 채널 구독자 비율 남자가 90%죠? 캠 켜면 바로 여자 성비가 역전할걸요?
-그건… 그럴 것 같군요.
카페에서 그들이 했던 대화 중 일부이다.
백현은 설마 그럴까 싶었지만 정신찬과 이세린이 제발 캠 켜보라면서 신신당부했다.
-혹시 얼굴 공개하는 게 부담되셔서 그런 거예요?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면 무조건! 진짜 무조건 하세요!!
박력 넘치는 이세린의 말에 백현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박세훈씨도 몇 번 그런 얘기를 했었지.’
캠 켜고 방송하면 훨씬 더 잘될 거라나?
그때는 항상 꼬질꼬질한 상태여서 말만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탈출 후 꾸며서 얼굴이 좋아진 지금은 본인이 봐도 나쁘지 않아보였다.
게다가 대룡 미디어 사람들을 만난다고 헤어샵에서 꾸며줬던 게 아직 유지가 되고 있었다.
얼굴 좀 팔려봤자 딱히 불이익도 없을 것 같고.
머니앤캐시 감옥 안에 있을 때는 좀 곤란했겠지만, 자유의 몸이 된 지금은 아무 상관 없었다.
그래서 캡슐 안에 있는 내부캠으로 얼굴을 공개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게임 속 언럭키 모습이 커스터마이징 한 게 아니었네???> <머리카락 색깔 눈동자 색깔, 점 위치. 뭐 이런 거 말고는 똑같은듯?> <죽어라 진짜. 남자가 봐도 ㅈㄴ잘생겼네.> <??? 그냥 기생오라비같이 생겼는데? 하나도 안 잘생겼는데? 내가 낫지.>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위에놈 좀 웃겼다.> <질투심 추하다 진짴ㅋㅋㅋㅋㅋㅋㅋ>
제목부터가 랭커가 된 기념으로 하는 소통 방송이다.
그런데 랭커 얘기는 쏙 들어가고 온통 얼굴 얘기밖에 없었다.
‘좀…부담스럽네.’
자신이야 20년 넘게 보면서 자란 얼굴이니 별 감흥이 없었다.
워낙 힘들게 자랐기에 얼굴 보면서 한가롭게 감평이나 할 시간도 없었고.
그런데 이런 칭찬들을 마구 듣다보니 좀 부끄러웠다.
“크흠. 큼.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소통 방송 시작하겠습니다.”
* * *
요즘 시대에 정보는 거의 눈 깜짝할 새에 퍼져나간다.
특히 중요한 정보는 더더욱 그랬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으로 한국 증시에 상장된 회사 주가가 출렁이고 뉴스에 속보로 실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언럭키가 그런 체급은 아니지만, 이슈가 된다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스트리머 언럭키 얼공했는데 진심 대ㅐㅐㅐㅐㅐ존잘임.
-게임 속 캐릭터랑 똑같이 생김. 얼굴에서 막 빛이 나옴.
시작은 월벤이었고, 그 소식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특히 여성들이 많이 이용하는 커뮤니티에서 불꽃같이 확산되었다.
-좌표 불러주세요. 바로 갑니다.
-월드 사가 스트리머라고요? 지금까지 저런 분을 내가 몰랐다니;; -와. 방금 확인하고 왔는데 대박…목소리도 좋아요.
가상 현실 스트리머라고 해도 현실의 외모가 있다면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냥 유리한게 아니라 엄청나게 유리하다.
반대로 가상에서는 미남 미녀인데 현실에서 별로라면 구독자가 쑥 사라지기도 한다.
버츄얼 미튜버와 비슷했다.
<너무 잘생겼어요!!!>
<오자마자 구독이랑 알림설정 해놨어요. 앞으로 알림 울리면 뭘 하고 있던 바로 달려올게요!> <와 대박 대박. 지금 계속 스크린샷 하는 중….> <얼굴에서 빛이 나네….>
언럭키는 쏟아지는 채팅에 정신을 못차렸다.
‘반응이… 너무 격한데?’
정신찬과 이세린이 보증했으니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런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날 줄이야.
<아 뭐야. 채팅창 흐려지네. 새로 유입된 분들 좀 다른 데 가세요.> <게임 않나요? 이건 뭐…. 우리가 얼굴 보러 왔나.> <얼굴 보러 왔는데요?>
<게임은 무슨 얼굴만 더 보여주셈!!>
[은정 님이 10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사막여우 님이 999,999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켈빈스 님이 25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살코s 님이 10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
.
.
‘헉!?’
쏟아지는 후원 세례에 언럭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번처럼 거대 큰손들은 없었지만 일반 유저들의 꽤 큰 후원들이 이어지니 그 금액이 결코 적지 않았다.
<놀라서 눈 동그랗게 떠진 것도 귀여워~!~!~!> <후원을 하면 눈이 커지네? 더 간다! 더 커져라 얍!!> <내가 통장에 돈을 모았던 이유는 바로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였다.>
캠이 달려있어 실시간으로 백현의 표정이 보였는데, 그게 또 좋다며 후원이 이어졌다.
한참을 받다보니 이래도 되나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아, 아니 잠시만요. 좀 진정하세요. 오늘은 랭커 된 소감이나 좀 얘기하려고 한 거였는데…”
<ㅇㅇ 하세요. 말리지 않음.>
<우리는 알아서 후원할 테니 말씀하시면 되겠네요. 되도록 오래오래 말해주세요!>
“…….”
결국 그날의 소통 방송은 3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만 해도 후원이 계속 들어왔다.
다만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던전 돌고 개고생해서 벌던 금액보다 얼굴 까고 아무 말이나 하는데 더 돈이 되다니….’
참 묘한 느낌이었다.
행운빨로 레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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