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깜빡했다. 이용승이 미친 헬창이었다는 걸.
그는 빚더미에 앉아 이곳에 왔지만서도 원래부터 크게 불만은 없었다.
성 팀장이 닭가슴살 같은 걸 좀 챙겨주기도 했고, 헬스할 때와 달리 맨몸운동도 파고들다 보니 재밌다며 즐거워한 것이다.
원래부터 취미가 헬스와 스트리머 덕질밖에 없던 그였다.
그런 상황에서 스트리머 덕질의 대상은 동료인 언럭키에게로 옮겨졌으니 그냥저냥 지낼 만했다.
물론 편하다는 건 아니었다.
“제가 다시 헬스장에 가는 날이 오다니…. 꿈만 같군요….”
이용승은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는 듯 웃었다.
사실 어찌 보면 미래를 포기하고 체념했던 것인데, 막상 행복한 미래가 눈앞에 다가오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거대한 근육질의 덩치가 기뻐하는 건 꽤 희귀한 광경이다.
옆에 있는 백현과 박세훈마저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다.
“성 팀장에게는 내가 얘기할게.”
“세훈 씨가요?”
백현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나가기로 결정했다지만 그러려면 앞에 큰 산이 하나 남아있다.
성강호 팀장.
냉혹한 독사같은 그에게 허가를 받아야 한다.
물론 저번에 백현의 빚을 다 갚으면서 그가 나가도 된다고 하긴 했지만, 또다시 이 주제로 대화하는 건 어쩔 수 없이 껄끄럽다.
“내가 하는 게 낫지. 그놈이 또 무슨 개소리를 할지 모르니까.”
박세훈이 어깨를 으쓱였다.
한 때 성강호 팀장을 부하 직원으로 데리고 있기까지 했던 박세훈이다.
성격을 잘 알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 역시 가능할 터.
그를 상대하는데 있어서 누구보다 적임자였다.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그리고 어차피 나는 한동안 여기 남아있어야 하잖아. 얼굴 붉힐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하는 게 나아.”
박세훈의 빚은 7억이다.
백현과 이용승의 빚을 합친 것과 거의 비슷한 수치.
이번에 이용승의 빚을 갚게 되어 수중에 남은 돈이 거의 없어진 백현인지라, 박세훈까지 빼내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해주신다고 하시면 감사합니다. 괜히 껄끄러운 상황도 안 일어나고. 저로서는 잘됐네요.”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 그나저나 백현 씨는 나가면 뭐 하고 싶어? 설마 저 녀석처럼 헬스장 가고 싶은 건 아니겠지?”
박세훈은 아까의 충격을 지울 수 없었다.
세상에. 여기서 나가자마자 가고 싶은 곳이 헬스장이라니!
진짜 미친 거 아닌가?
백현도 체력을 기르겠답시고 매일 같이 운동을 했다.
여기 갇혀있는 매일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은 것이다.
아침 회의 때 절반 가까이 되는 시간을 이용승에게 운동에 대한 자세한 메커니즘을 들으며 보낼 때도 많았다.
‘내 옆에 미친 헬창은 한 명이면 족한데.’
둘은 너무 많다.
그런 박세훈의 바람이 통했을까.
백현은 정상적인 답변을 했다.
“누구를 좀 만나고 싶네요.”
“오. 누구? 부모… 님은 아니겠구나. 참, 미안. 순간적으로 까먹었어.”
“괜찮아요. 대룡 미디어 측 사람들을 만나서 일단 감사 인사를 좀 하려고요.”
그가 이렇게 빨리 빚을 갚고 나갈 수 있게 된 것에는 대룡 미디어의 힘이 컸다.
특히나 길드장인 로버트. 정신찬의 여러 호의가 아니었다면 아직까지 백현 자신의 빚도 다 못 갚았을지 모르지.
“나쁘지 않네. 이번에 주기로 한 계약금 3억 덕분에 용승씨 빚도 해결한거니까. 만나서 고맙다고 말은 한 번 해야겠지.”
“예. 맞아요. 그 후에는 우리가 쓸 사무실도 알아보고 하려고요.”
새 출발을 위한 새 발판.
아직 몸은 이 감옥 안에 있지만, 백현은 벌써부터 설레는 기분이었다.
* * *
대룡 미디어는 업계 선두를 달리고 있는 만큼 매일 바쁘다.
그리고 오늘. 대룡 미디어 회의실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미팅 출발합시다.”
“네, 대표님.”
긴장의 이유는 간단했다.
언럭키에게 재계약 하자는 메일을 보냈는데, 그 답변으로 현실에서 미팅 한 번 하자는 말이 온 것이다.
지금껏 항상 비대면 계약만 선호해왔던 언럭키가 왜 갑자기 보자고 하는 걸까?
괜히 걱정부터 들었다.
‘이번 계약이 마음에 안들었나? 아닌데. 그랬으면 계약서에 싸인을 했을리가 없는데.’
계약금 3억도 이미 입금했다.
불만을 표시할 거였으면 일단 만나서 얘기부터 하자고 하고 계약은 미뤘을 텐데….
‘모르겠군. 만나면 알 수 있겠지.’
정신찬과 이혜미, 그리고 한 명이 더 따라서 사무실을 나섰다.
“아세린님.”
“대표님. 아세린이 아니고 이세린이에요. 여기는 월드 사가가 아니잖아요.”
“아, 실례. 세린씨는 왜 굳이 따라오시는겁니까?”
아세린.
빅드래곤 길드원 중 최고의 유망주로 꼽히는 그녀는,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월드 사가에 쏟고 있었다.
특히나 얼마 전 의뢰를 맡긴 언럭키에게 자극을 받은 모양인지, 더더욱 열정을 퍼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정신찬은 굉장히 흡족해했었다.
‘그 때 언럭키님에게 의뢰를 맡기길 참 잘했지.’
못 깨던 던전을 깰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 아세린까지 저렇게 각성하다니.
염화 오러 하나 판매한 것 가지고 아주 여러모로 이득을 봤다.
“오늘 언럭키 님을 실물로 뵌다면서요. 저도 정말 보고 싶어요.”
이세린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의 이름에서 철자 하나만 바꿔 아세린이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는 그녀는 현실과 게임 속 외모가 거의 흡사했다.
기껏해야 게임 속에서는 보라색 단발머리였지만 현실에서는 흑단발일 뿐이다.
“하아…. 제 입이 방정이죠. 왜 그런 말을 해서는….”
우연히 그녀와 이야기하다가 언럭키와 미팅을 하러 간다고 말했는데, 그걸 들은 이세린은 자기도 꼭 같이 가겠다며 떼를 썼다.
“그렇게 곤란하시면 지금이라도 그냥… 남아있을까요?”
“버려진 강아지같은 그런 표정으로 말해봤자 설득력이 하나도 없네요. 그냥 따라오세요.”
“히히. 역시 대표님이 짱이에요!”
이세린이 작게 만세 했다.
가만히 있으면 살짝 냉혹해 보였는데, 그런 그녀가 웃으니 주변이 확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 * *
(주)머니앤캐시의 감옥을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감옥은 아니고 그들이 작업장을 쓰는 건물이긴 하다.
백현에게는 감옥으로 느껴졌었던 곳이지만.
‘출소하면 이런 기분일까?’
시원 섭섭… 하지는 않고 다시는 이 근처로 오고 싶지도 않다.
-나중에 또 봅시다.
성 팀장은 그 말만 하고는 축객령을 내렸다.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악담만 하는군.’
나중에 보긴 뭘 본다는 말인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박세훈을 빼 올 때도 될 수 있다면 얼굴 마주치기 싫다.
‘이제 보증을 서준다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가족이건 친한 친구건 연인이건 얄짤없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너무 크게 배웠다.
그렇게 다짐한 백현은 새로 스마트폰을 개통하고 통장을 개설했다.
아예 새로 시작하자는 기분에서였다.
그 후에 이용승과 헤어졌다.
-전 일단 헬스장부터 가겠습니다. 솔직히 더 참기 힘들어요.
-어…네. 그러세요. 그다음엔요? 저녁이라도…
-편집일 밀린 게 있어서요. 아마 운동 끝나고 바로 작업에 매달려야 할 것 같아서, 이따 밤에 다시 보는 거 어떨까요?
-네. 그러시죠.
오늘 하루는 자유를 즐기고, 본격적으로 사무실을 알아보는 등의 업무는 내일부터 하기로 했다.
이용승은 그 후 빠르게 떠나갔다.
백현은 이용승이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의 사내인지 처음 알았다.
‘그러면… 나도 이제 옷 사서 가면 되겠군.’
시간을 확인한 백현은 백화점으로 움직였다.
일부러 출소날(자꾸 이렇게 부르게 된다)을 대룡 미디어 사람들과 만나는 걸로 정했다.
조금 더 기념비적이게 말이다.
어색한 느낌의 정장을 맞추고, 내친김에 백화점 내에 입점해있는 헤어샵도 들러 머리까지 했다.
매일 같이 운동을 빠지지 않던 백현이라 옷 핏이 예술적으로 떨어졌다.
거기에 항상 더벅하던 머리카락도 정리하니, 원래도 괜찮았던 본판이 확 살아났다.
“어머. 고객님. 스타일 진짜 좋으시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더니…호호!”
헤어샵 스타일리스트는 이상한 웃음을 터트리더니 백현의 머리카락에 힘을 주었다.
장인이 혼신의 힘을 주면 특별한 결과가 일어난다.
‘이게… 나?’
거울을 본 백현은 낯선 사람을 쳐다보는 기분이었다.
감옥 안에서도 박세훈이 몇 번이고 본판이 좋다, 잘생겼다고 말은 했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껏 꾸미고 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다만 이런 모습으로 대룡 미디어 사람들을 만나러 갈 생각하니 약간 민망하긴 했다.
‘아니. 예전의 나랑은 작별할 생각 해야지.’
억지로 자신감을 불어넣은 채, 백현은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 * *
미팅 장소에서 기다리는 와중에 이세린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다리를 떨고 손을 까딱이며 눈동자는 계속 움직였다.
“세린 씨. 왜 그러세요?”
“아… 그게… 언럭키님을 현실에서 뵌다는 게 기대돼서요. 긴장이 막 되네요 하하.”
단 한 번.
언럭키와 던전을 탐사할 때 같이 한 것이었지만 그때 그의 모습은 온통 시선을 빼앗았다.
내심 하위권 랭커 중에서는 최고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던 본인의 자신감이 박살 나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언럭키의 라이브는 아무리 바빠도 챙겨봤고 미튜브 영상도 다시 돌려봤다.
한 번씩 돌려보려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려 3번씩이나 더 돌려봤다.
극성팬이 되어버린 것이다.
‘언럭키님 너무 좋아….’
설마 이렇게 빨리 팬미팅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
그런 이세린의 모습을 보며 정신찬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뭐…별로 기대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래요?”
“세린 씨는 길드원들 대부분을 게임 속에서만 만나보셔서 모르겠지만, 다들 현시에서는 생김새가 많이 달라요.”
월드 사가는 캐릭터를 생성할 때 커스터마이징을 꽤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얼마나 못생겼던, 뚱뚱하던, 탈모가 있거나 하건 상관없이 미남 미녀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길드장으로서 여러 유저를 영입하거나 광고 계약을 하러 많은 사람을 만나러 다녀본 정신찬은 잘 알았다.
현실과 게임 속 생김새는 완전히 다르다!
오히려 이세린같이 거의 비슷한 사람이 희귀했다.
“슬슬 시간 됐네요.”
정신찬이 시계를 흘끗 보더니 말했다.
그들은 20분 전부터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늦는다는 말은 없었으니 아마 언럭키도 맞춰서 나오겠지.
-딸랑!
그때 카페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돌아본 세 사람은 흠칫 놀랐다.
정장을 입은 남자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첫눈에 보기에도 잘생겼다는 게 느껴졌다.
물론 세상에 잘생긴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보통이라면 이렇게 계속 쳐다보고 있지는 않겠지.
그러나 남자는 그들에게 있어서 익숙했다.
“어, 언럭키님!?”
이세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리 색도 다르고 피부 느낌이나 점 등으로 인상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언럭키를 직접 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눈앞의 저 남자가 언럭키라는 것을.
“안녕하세요. 대룡 미디어 분들이신가요?”
백현이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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