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여전히 남색으로 빛나는 던전의 입구와 그 주변에 하얗게 서리 낀 땅.
아마 접근하면 무언가 함정이 발동하는 던전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불길한 붉은빛이 보였겠지.
그렇다면 왜 그 함정이 발동되었을까?
‘누군가 다녀간 모양이군.’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사냥터는 원래 많은 유저들이 돌아다니는 곳이다.
우연찮게 다른 사람이 왔다 갈 수도 있지.
다만 이런 식으로 함정을 발동시켜주다니.
‘음!?’
그때 언럭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의 눈에 다시금 주변 땅이 스멀스멀 붉게 물들고 있는 게 보인 것이다.
서서히 번지는 붉은 기운은 처음 보았던 범위만큼 뻗어나가려고 했다.
‘이건 지금 들어가야 한다.’
언럭키는 본능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벨라님!”
“……?”
“저기 뭔가 수상한 게 있는 것 같네요. 확인 좀 해볼까요?”
그가 벨라를 붙잡고는 성큼 던전에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갖다 대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던전 ‘빙혈의 실험실’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최초로 발견한 던전입니다.]
[입장 시 48시간 동안 경험치 획득량과 골드 드랍률이 150% 상승합니다.]
“아앗. 이런 곳에 던전이?”
“…….”
벨라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이건 못 알아챌래야 못 알아챌 수 없는 발연기였다.
전부터 언럭키와 몇 번이고 함께 다녔기에 그의 촉이 좋다는 걸 알고 있긴 했다.
단순히 촉인지 아니면 특별한 스킬인지는 모르겠지만…
‘숨기고 싶어 하시는 것 같네.’
그렇다면 굳이 캐물어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들어가 볼까요?”
“네. 하하. 우연히 발견한 던전이라니. 그것도 최초 발견이라니! 저희는 참 운이 좋군요. 얼음 수정은 조금 나중에 모으고 일단 던전부터 탐사하죠.”
지금도 실시간으로 붉은색 빛이 생겨나려 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게다가 여기 먼저 왔었을 것으로 추측했던 유저들.
24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부활해서 되돌아올 텐데, 그 전에 결판을 봐야 한다.
언럭키와 벨라가 던전에 들어갔다.
* * *
던전에 들어가서 보인 것은 온통 냉기로 뒤덮인 동굴이었다.
커다란 동굴의 벽은 투명하게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숨 쉴 때마다 입김이 흘러나온다.
빙혈의 실험실이라는 이름을 볼 때부터 이럴 거라고 짐작은 했다.
‘운이 좋군. 신탁 5개의 던전 중에 두 번째 것을 이렇게 발견하다니.’
빙혈의 실험실.
앞서 벨라에게 조잡한 연기를 한 것은 이 이름을 보고 놀랐기 때문도 있었다.
신탁에서 없애라는 리바 델 레이의 다섯 던전 중 하나가 여기였기 때문이다.
어느 세월에 발견하나 싶었는데.
설마 벨라를 도와주러 왔다가 우연찮게 발견할 줄은 몰랐다.
이래서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하는 모양이다.
얼음으로 뒤덮인 동굴이지만 몬스터는 나오지 않았다.
일반적인 던전과는 많이 달랐다.
그 대신 커다란 공동 중앙에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둥실 떠 있었다.
“저게 뭔지 혹시 아십니까?”
“…잘 모르겠어요.”
혹시나 해서 벨라에게 물어봤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설명도 뜨지 않는 물건.
언럭키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지형을 확인했다.
뻥 뚫린 통로가 있는 것 말고 다른 건 안보였다.
내버려 두고 갈 수도 있겠지만….
‘이건 그냥 두고 가기 찝찝한데.’
공동 중앙에서 빛을 뿜어내는 거대한 얼음 결정이라니.
게다가 기분 탓인지 희미하게 맥동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여러모로 신비로운 기물이다.
그리고 던전에 그런 기물이 있다면, 필시 침입자인 자신들에게는 그리 좋은 게 아닐 터.
“부숩시다.”
언럭키는 결정을 내렸다.
벨라는 두말하지 않고 따랐다.
여기까지 언럭키를 믿고 왔으니 그의 판단을 믿는데 당연했다.
“혹시 모르니…제가 앞장설게요.”
벨라가 앞으로 나오자 언럭키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뒤로 갔다.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하고 거대한 방패를 꺼내든 벨라.
저 장비들이 전부 레전더리 등급이다.
아이템 내장 스킬은 몰라도, 일단 방어력 만큼은 지금의 언럭키와 비교도 안 되게 뛰어나다.
벨라가 방패를 들고 앞에 선 다음, 언럭키가 그녀의 뒤에 숨은 채 검만 치켜들었다.
-우웅!
검 끝에서 붉은색의 염화 오러가 솟구친다.
일반 오러보다 공격력이 월등하고, 화염의 특성이 들어있는 스킬.
4억이라는 피 같은 돈을 들였지만, 그 이상으로 값지다고 생각하는 스킬.
-푹!
검이 두부 가르듯 얼음 결정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미친 듯한 냉기가 토해져 나왔다.
벨라가 앞에서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막아주느라 큰 피해는 없었다.
언럭키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내가 잘하고 있구나!’
그대로 다시금 검을 계속 찔렀다 뺐다 반복했다.
-푹! 푹! 푹!
얼음 결정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틈새로 화염이 피어올랐다.
* * *
빙혈의 실험실은 몬시뇰 그리토스가 관리하는 곳이다.
그리토스는 나이 지긋한 몬시뇰로서, 주교 승급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실험만 완료하면 주교는 물론이고 대주교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흘흘. 암. 그렇고말고. 아이스 드래곤. 그 전설적인 생물만 부활시킨다면 대주교 자리도 충분히 노릴 수 있지.”
이곳 깊은 지하는 자연적으로 음(陰)의 기운이 모이는 지역이다.
그리토스는 오랫동안 이런 지역을 찾아 헤맸고, 고대의 비술을 이용해 빙혈 심장을 제조했다.
극한의 냉기가 압축된 심장은 인공적인 아이스 드래곤을 만드는 게 가능.
그리된다면 한낱 늙은이인 자신이 세계를 아우르는 강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걸 위해 젊은 시절을 다 받쳐왔고, 고지가 멀지 않았다.
그리토스는 오늘도 동굴 곳곳을 돌아다니며 음의 결정들을 수집했다.
이곳에 있는 건 자신 혼자뿐이지만 침입자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일부러 동굴 입구 쪽에 빙혈 심장을 위치시켜 놓았다.
아직 생물체의 심장급은 아니지만, 강렬한 냉기가 응축된 보물이다.
누군가 바위 근처에 접근만 해도 강력한 냉기를 뿜어낸다.
실제로 바깥을 돌아다니는 야생 동물이나 몬스터들이 우연찮게 다가왔다가 얼어붙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기사급이 오더라도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버리는 냉기. 흘흘. 이것이야말로 천혜의 요새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실험실이 바로 이것이다.
비록 한 번 냉기를 방출하면 충전까지 시간이 걸린다지만, 그것도 금방이다.
“!”
그때 그리토스는 경악해서 입을 쩍 벌렸다.
빙혈 심장과 연결되어 있는 감각으로부터 이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심장이 파괴되고 있었다!
침입자가 감히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어찌…?
너무나 당황한 그리토스였지만 당황의 시간은 짧았다.
그 와중에도 느껴지는 감각으로 심장은 계속 부서지고 있었던 것이다.
“안돼에에에-!!”
그가 노구를 이끌고 빙혈 심장이 있는 곳으로 허둥지둥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공동 중앙에 떠 있던 얼음덩어리를 부수는 건 꽤 오래 걸렸다.
오러로 수십 번을 찔렀음에도 완벽히 부서지지 않는 데다가, 계속해서 강력한 냉기를 뿜어냈다.
‘벨라님이 없었으면 나 혼자서는 부수는 데 꽤 오래 걸렸겠는데.’
퍼부어지는 냉기는 성왕 시절 같은 방어력이 아니라면 막기 어려워 보였다.
거리도 너무 가깝고. 아무리 검술 실력이 고강해도 저런 건 막을 수 없는 종류였다.
다행히 벨라 덕분에 무사히 얼음덩어리를 산산조각 냈다.
부서진 얼음 조각 사이로 떨어져 내린 건 울퉁불퉁한 보석이었다.
[빙혈의 크리스탈]
-아이템 등급 : 레전더리.
-아이템 효과 : 재료 아이템. 실력 있는 대장장이의 손에 다뤄진다면 랜덤으로 1~3개의 빙결 계열 내장 스킬이 주입된 장비가 탄생된다.
‘오. 재료아이템.’
언럭키의 눈이 반짝였다.
그냥 재료도 아니고 레전더리 재료였다.
랜덤으로 최대 3개까지 빙결 계열 내장 스킬을 가질 수 있다니.
이건 스킬 트리를 빙결 계열 검사나 창술가, 혹은 마법사 쪽으로 맞춘 사람이라면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릴 아이템이다.
다만 언럭키에게는 굳이? 라는 느낌이다.
딱히 빙결 계열 스킬이나 시너지 효과를 내는 아이템도 없고.
저걸 사용해서 만든 무기가 성검보다 좋을 것 같지는 않다.
하물며 성검은 신탁 퀘스트를 완료하면 진화까지 할 텐데.
“벨라님. 선물입니다.”
“!”
벨라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빙혈의 크리스탈이 드랍되었을 때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눈을 홀리게 하는 화려함이 있었다.
대장장이인 그녀에게는 거대한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파티의 리더도, 저걸 부순 것도 언럭키였다.
소유권이 그에게 있었기에 군침만 뚝뚝 흘리고 있는데, 그런 마음을 알아챘는지 이걸 건네준 것이다.
벨라가 머뭇거렸다.
“이걸…제가 받아도 될까요?”
“그럼요. 재료 아이템이잖아요. 제가 쓸 수도 없는 건데. 벨라님이 가져가시는 게 훨씬 낫죠.”
“…정말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벨라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언럭키가 그렇게까지 말해주니 거절하기도 뭐했다.
예의상으로라도 거절하고 싶지 않을 만큼 욕심나기도 했고.
‘이제 던전에서 나오는 다른 아이템은 싹 다 내가 가져가도 되겠군.’
언럭키는 속으로 씩 웃었다.
별로 필요 없는 아이템 하나 쥐여줬으니, 던전의 다른 아이템이나 보스몹을 잡고 떨어지는 드랍템은 눈치볼 것 없이 가져도 되겠다.
도의적으로 파티원인 그녀에게 뭐 하나 챙겨줄 필요도 없다는 뜻.
“이건… 검으로 만들어서 언럭키님께… 선물해 드릴게요.”
“네?”
갑작스런 벨라의 말에 언럭키는 흠칫거렸다.
“아니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만든 건 벨라님이 직접 쓰셔도 괜찮아요.”
“저는 쓸 데도 없어요…. 선물해 드릴게요.”
그녀는 제작과정에서 경험치를 얻고 실력을 성장시키지, 완성된 아이템을 쓰는 데는 미숙했다.
지금 입은 갑옷과 방패도 제 성능을 온전히 못 끌어내고 있지 않던가.
그보다는 검 한 자루 만들어서 언럭키에게 주는 게 오늘의 보답이 되리라.
‘아. 양심 찔리네.’
벨라가 그렇게 말하자 언럭키는 조금 전까지의 사악한 속마음이 쿡쿡 쑤셔왔다.
물론 거절은 하지 않았다.
“주신다면 감사히 쓰겠습니다. 벨라님이 만든 무기는 어떨지 정말 기대되네요 하하.”
레전더리 등급 대장장이인 벨라가 아니던가.
기대가 안 된다면 사람이 아니지.
아까까지는 굳이 냉기 속성의 검이 필요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생각해보니 아세린님처럼 쌍검을 써도 되겠고. 아니면 화 속성 몬스터를 잡을 때만 한정적으로 써도 될 테고… 사용처는 너무 많겠네.’
무려 레전더리 아이템 아닌가.
없어서 문제지 있다면 찾아서 쓸 곳은 무궁무진했다!
“이, 이놈들! 이 미친놈들이… 내 심장에 무슨 짓을 한 게야!”
기뻐서 입꼬리가 씰룩거리던 언럭키에게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공동과 연결되어 있던 통로에서 웬 노인이 헉헉거리며 등장한 것이다.
“내, 내 빙혈의 심장이…. 내 꿈이….”
노인은 충격받았는지 부서져 나뒹구는 얼음 조각들을 가리키며 손만 부들부들 떨어댔다.
[몬시뇰 : 광기의 제작자 - 그리토스]
-레벨 : 199.
‘보스몹이네?’
언럭키는 노인을 보고 반색했다.
이 던전은 시작부터 레전더리 아이템을 주고, 보스몹도 알아서 찾아와 주는구나.
이런 친절한 던전도 있을 수 있다니.
“이걸 부숴 먹다니…천벌 받을 놈들…. 아아… 이걸 언제 다시 복구… 커헉!”
검을 뽑아 든 언럭키는 염화 오러를 일으켜 냅다 그리토스에게 찔러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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