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왜… 그러세요?”
언럭키가 멍하니 한 쪽을 바라보고 있자 벨라가 물었다.
“아하하. 아닙니다. 어느 방향으로 갈 건가요?”
“일단 사람들이 좀 없는 곳으로 가려구요. 수정 골렘들은 사냥터 어디서나 나와서요.”
“그게 좋겠네요.”
당장이라도 남색 빛이 터져 나오는 곳으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언럭키는 애써 마음을 억눌렀다.
다짜고짜 가서 뭔가를 발견한다면 벨라가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겠는가.
‘자연스럽게 해보자. 사냥터 돌아다니다가 우연찮게 발견한 것처럼.’
언럭키는 우선 벨라를 위한 사냥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동하다 보니 얼마 안 되어 수정 골렘을 마주칠 수 있었다.
[수정 골렘]
-레벨 : 191.
수정 골렘은 사실 신체가 수정이 아니라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매끄럽게 깎인 표면이 반짝거려 수정처럼 보이기에 그런 이름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철컥
어느새 갑옷을 차려입은 벨라가 투구의 면갑을 내리며 앞으로 나섰다.
풀 플레이트 메일에 커다란 대검을 무장한 차림새.
그녀는 중무장한 기사처럼 보였다.
가벼운 무장에 검 한 자루 들고 있는 언럭키보다 오히려 훨씬 더 강해 보이는 모습이다
‘모든 장비를 제한 없이 착용한다는 게 진짜 사기적이긴 하네.’
물론 장비의 성능을 제대로 뽑아낼 수는 없지만, 방어력만이라면 효율이 좋다.
지금 벨라는 공격력만 부족하지, 상위권 탱커들에 비해 밀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지. 저게 다 레전더리 장비라고 치면… 오히려 방어력은 그쪽보다 나을 수도 있겠어.’
-쿵! 쿵!
-콰앙!
얼음 골렘이 다가오더니 주먹을 내리꽂았다. 벨라가 대검을 들어 막아섰다.
육중한 골렘의 일격을 막았음에도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언럭키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벨라가 만들어준 틈을 흘려버릴 만한 바보는 아니다.
염화 오러가 칼끝에서 뻗어져 나오더니 그대로 수정 골렘을 베고 지나갔다.
-부욱!
-화르르륵!
얼음의 신체와 화염의 오러가 부딪치면서 공기가 긁히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아무리 놈의 몸뚱이가 차갑고 단단하다고 해도 염화 오러의 열기를 이겨낼 정도는 아니다.
잘린 표면에 불꽃이 타닥거렸다.
[적을 처치하셨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골렘의 사이로 골드 조금과 얼음 수정이 떨어졌다.
“이게 필요한 거죠? 500개.”
“…네.”
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살짝 놀란 상태였다.
라이브 방송에서 언럭키의 오러를 보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훨씬 압도되는 게 있었다.
수정 골렘은 절대 쉽게 잡을만한 몬스터가 아니다. 그랬으면 벨라가 도움을 청할 것도 없이 혼자서 움직였겠지.
그런 놈을 한 방에 잡는 것만으로도 언럭키의 대단함이 보였다.
* * *
월드 사가는 가상현실이지만 그 완성도가 극에 달한다.
환경 오염이 많이 진행된 현실보다 오히려 나은 점도 많았다.
특히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접근하는데 몇 시간을 비행기 타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평범한 사냥터도 관광지 같은 매력을 지녔다.
수정 고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푸르른 초원과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보면 몽골 여행이 부럽지 않았다.
‘편하다.’
벨라는 그 아래에서 오랜만에 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매번 불편한 관심을 받다가 옆에 든든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이런 기분이 되다니.
자신이 가족 말고 타인에게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은 몰랐다.
벨라는 흘긋 언럭키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뭘 생각하고 있는지 멍하니 한 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나와 함께하며 편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언제 헤어질지에 대해 생각하는 걸까?
언럭키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으음. 남색과 붉은색이 함께 보인다니. 이런 적은 또 처음이네.’
사실 언럭키는 사냥터에 있는 내내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남색 빛기둥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수정 골렘과 싸우는 와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에는 골렘들을 찾아다닌 척 벨라를 슬쩍 이끌어 빛기둥 쪽으로 다녀왔다.
교묘하게 바위틈 사이에 가려져 있는 던전의 입구.
거기에서는 남색과 더불어 붉은빛도 함께 보이고 있었다.
던전의 입구는 남색이었지만, 그 주변 반경의 땅이 전부 붉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접근하면 분명 큰일이 날 거라는 아주 불길한 빛이었다.
‘으음….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저 던전에 가긴 가야 하건만.
찝찝한 마음 때문에 갈 수가 없다.
언럭키의 머릿속이 고민으로 깊어졌다.
* * *
“벨라님이 사냥터로 가셨다고?”
“예 형님. 그것도 남자랑 갔습니다.”
“남자…!?”
“그. 함께 방송에 나왔던 스트리머 언럭키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랑 같이 사냥터로 가던데요.”
동생의 보고에 유저 헥쿠란의 인상은 와락 찌푸려졌다.
그는 이 도시에서 벨라를 처음 보고, 첫눈에 반했다.
-저… 분이다.
-네?
-나는 지금껏 저분을 만나기 위해 살아온 거야! 내 인생의 반려를 찾았다!
-…….
헥쿠란은 친한 동생들과 함께 5인파티를 이뤄 도시를 다니는 사람이었다.
길드급으로 덩치가 크지는 않았지만 소수정예의 파티 취급을 받았다.
나름 실력자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동생들은 헥쿠란의 성정을 잘 알았다.
‘또 시작됐군.’
‘좀 예쁜 사람만 보면 매번 눈이 돌아가니…. 쯧쯧.’
친한 동생이어서 아는 헥쿠란의 특징.
그는 금사빠였다.
한두 번 저러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저러니 주변 사람으로서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다 우연히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미튜브에 출현했었다는 걸 들었다.
그걸 보고 더 빠져든 건 당연지사.
헥쿠란은 그때부터 매일 같이 벨라를 찾아갔다.
-벨라님! 혹시 제가 뭐 도와드릴 일 없습니까?
-벨라님! 재료 구하러 안 가십니까?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에스코트해드리겠습니다!
-벨라님…!
벨라가 질색해서 언럭키에게 도움을 청한 데에는 헥쿠란의 영항이 컸다.
“이 자식. 스트리머랍시고 괜히 벨라님한테 찝쩍대기나 하고. 쓰레기같은 자식!”
헥쿠란이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차마 친한 형이지만 동생들은 그에게 동감하기 어려웠다.
누가 찝쩍거리고 있는데…
“안 되겠다. 우리도 따라가자.”
“네?”
“뭘 되물어. 혹시 사냥터에서 그 쓰레기가 벨라님한테 못된 마음이라도 먹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잔말 말고 따라와!”
헥쿠란은 동생들의 의견 따위는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사냥터에서 언럭키와 벨라를 추적하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딱히 몸을 숨길 생각이 없던 두 사람인지라 추적 스킬이 없더라도, 눈썰미가 좋다면
“이건 벨라님의 보폭이다. 신발 사이즈도 얼추 비슷하군.”
“그런 건 어떻게 아십니까?”
“척 보면 모르겠나?”
“모르겠습니다만…?”
동생들은 바닥에 나 있는 희미한 족적을 보고 척척 추리해내는 헥쿠란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매일같이 찾아뵈었는데 당연히 알 수밖에. 어서 가자!”
헥쿠란은 서서히 두 사람의 흔적을 쫓았다.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목적이라는 듯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두 사람.
“크흑. 벨라님. 재료 수집을 가실 거라면 저와 함께 가주시지 않고….”
흔적을 보며 헥쿠란은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환한 태양, 맑은 날씨. 이 아래에서 벨라님과 둘이 다니는 건 완전 데이트 아닌가.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기에 함께 다녔을 언럭키를 향해 더욱 분노가 피어올랐다.
“형님. 그런데 두 분을 발견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두 분이라고 하지 마라. 여신님이랑 쓰레기라고 해라.”
“…아, 예. 어쨌거나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싸워야지.”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헥쿠란의 말에 동생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상대는 스트리머 언럭키입니다. 월벤에서 소문 도는 거에 반만 들어맞는다고 해도 우리가 이기기 어려워요.”
“5대 1인데?”
“솔플로 검신의 전당을 다 깨부순 사람이지 않습니까.”
헥쿠란 파티가 실력이 있긴 했지만, 랭커급이라고 추앙받는 언럭키를 상대하는 건 부족했다.
동생 중에는 언럭키의 라이브를 본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 거의 모든 아이템이 레전더리입니다. 보유 스킬도 엄청나고요. 무조건 질 겁니다. 지형지물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이런 평원에서는 더더욱이요.”
이성적인 말이다.
헥쿠란이 감정적이게 되지 않았다면 설득당했을 터.
“정면 대결을 벌이면 어렵지. 그러면 기습을 하면 되는 거 아니냐.”
“그게 말이 쉽죠….”
“지금도 끌려다니면서 고통받고 있을 벨라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설사 우리가 죽더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야.”
반쯤 망상의 영역으로 넘어갔지만, 동생들은 헥쿠란을 말리지 못했다.
이런 걸 제외하면 항상 동생들을 챙겨주는 좋은 형이었다.
그가 눈이 돌아간 지금, 어쩔 수 없이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추적하던 그들은 문득 이상한 걸 느꼈다.
사냥터를 무작위로 다니는 것 같은 언럭키와 벨라이지만, 이상하게 유독 어느 한 곳 근처를 많이 다녔던 것이다.
바위가 밀집되어 군락을 이룬 지형.
“왜 이렇게 이 근처를 자주 왔지?”
헥쿠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위틈을 살펴봤다.
그러다 발견했다.
“더, 던전이다!”
“네!?”
“여기 미발견 던전이 있어! 대박…!!”
헥쿠란과 동생들의 눈빛이 흥분으로 뒤바뀌었다.
미발견 던전을 찾아내다니.
월드 사가 초창기 플레이어나 탐험가 계열 직업이 아니라면 하지 못하는 일 아닌가!
“형님! 어서 들어가죠! 최초 발견 던전은 경험치랑 드랍률이 말도 안 되게 증가한다고 하잖아요!”
“게다가 보스몹 잡고 최초 보상을 얻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벨라님이….”
“형님!!”
이번만큼은 헥쿠란도 동생들의 뜨거운 시선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으음. 그러면 얼른 클리어하고 다시 나오는 거다?”
“예 물론이죠. 형님.”
“감사합니다. 형님!”
싱글벙글 웃는 동생들.
헥쿠란이 던전의 입구에 손을 얹었다.
[던전 ‘빙결 실험실’에 입장하시겠습니까?]
메시지를 보며 헥쿠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파아앗!
바위틈 사이에서 푸른빛이 터져나왔다.
[허가받지 않은 침입자입니다.]
[던전에 응축되어있던 빙결의 기운이 쏟아집니다.]
“으, 으헉!?”
헥쿠란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냉기의 기운에 뒤덮이자마자 HP가 미친 듯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0이 되었다.
* * *
언럭키는 얼음 수정을 얻으면서 계속 던전 근처를 배회했다.
한 곳에 가만히 서서 관찰할 수는 없으니, 왔다 갔다 하며 볼 수밖에 없었다.
탐스러운 남색과 불길한 붉은색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곳.
‘스읍. 그냥 한 번 들어가 봐?’
고민하다 보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신의 실력이라면 어지간한 어려움 정도는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다.
‘아냐. 괜히 나대면 안 되지….’
그러나 언럭키는 한숨을 쉬었다.
행운의 무지개 능력으로 보여지는 빛은 주관적이다.
붉은색이 보인다는 뜻은 지금의 자신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어려울 수 있다는 의미이다.
언럭키는 괜히 한 번 더 그곳으로 향했다.
‘어라?’
하지만 다시 와 본 그곳에서 보이는 빛은 달랐다.
분명 아까 봤던 붉은 빛이 사라졌던 것이다.
게다가 초원이었던 바닥은 빙판으로 변해있기까지 했다.
언럭키는 이해할 수 없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