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벨라와 마지막으로 만난건 지저 도시를 탐사할 때였다.
새로운 영감을 받기 위해 따라가겠다는 그녀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때의 모험은 백현에게도 좋은 기억이었다.
지저의 뱀파이어들은 이상하리만치 벨라의 피를 좋아했다.
아마 그녀의 직업 덕분인 모양인데, 언럭키는 그 덕을 많이 봤다.
뱀파이어들과 손쉽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후로 삶이 바빠서 까먹고 있었는데, 그녀 쪽에서 먼저 연락이 올 줄이야.
‘아. 내가 먼저 연락 했었어야 했는데. 실수다.’
변명거리는 많았다.
아직 자신의 것뿐이지만 성 팀장한테 빚도 다 갚았고, 라이브 방송도 했고, 지금은 빅드래곤 길드의 의뢰를 하고 있고…
물론 상대방이 고려할 필요는 없는 입장이었다.
“누군데 표정이 그래?”
복잡한 백현의 표정을 보고는 박세훈이 물었다.
그의 시선이 진동하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눈꼬리가 히죽 휘어졌다.
“어어. 뭐야 뭐야. 벨라님이면 그 분이잖아. 방송에 몇 번 나왔던 하얀 머리 대장장이 여신님.”
대장장이 여신.
아주 잠깐씩 ‘스트리머 언럭키’ 채널에 등장했던 벨라는 그런 별명이 붙었다.
유명한 건 아니었지만 언럭키의 영상을 챙겨보는 팬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흐흐. 백현 씨. 빚 다 갚자마자 연애 사업 시작하는 거야? 어후. 남자다 남자. 멋있다!!”
“아 좀. 아저씨처럼 그러지 좀 마세요.”
“나 아저씨 맞는데?”
박세훈은 그렇게 말하면서 주책어린 얼굴로 낄낄 웃었다.
결국 백현은 이용승을 쳐다봤다.
“…….”
이용승의 이두가 한 번 꿈틀거리자 그제야 박세훈의 입이 다물렸다.
그는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용승 씨는 나랑 먼저 친해졌잖아….”
“억울하시면 형님이 고용주 하십시오.”
“…….”
할 말이 없어졌다.
스마트폰은 그 와중에도 계속 울리고 있었다.
백현은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예. 오랜만입니다 벨라님.”
-…….
수화기 너머는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백현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원래는 입도 벙긋하지 않던 그녀 아니던가.
기다리다보니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럭키님.
“네. 이거 참. 제가 먼저 연락드리고 자주 안부 문의 했었어야 하는데.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아침 일찍부터 전화하신 거 보면 뭔가 용건이 있으신 거 같은데. 맞나요?”
-…….
“편하게 말씀해보세요.”
백현은 재촉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보육원 출신인 그는 어린 동생들을 돌본 경험이 많았다.
비슷하게 달래듯 말해주자 그녀는 금세 안정을 찾았다.
-…절 좀 도와주세요.
“?”
* * *
김화영.
벨라는 천공의 탑에서 언럭키와 헤어졌다.
공중 요새로 넘어간 그와 달리, 그녀는 레벨이 부족해 따라갈 수 없었다.
게다가 공중 요새는 직업군이 한정적이라 다양한 장비를 다뤄봐야 하는 그녀에게는 맞지 않았다.
어쨌거나, 헤어진 후에도 그녀는 열심히 월드 사가를 플레이했다.
원래도 ‘헤파이스토스의 후계자’ 라는 직업은 그녀와 잘 맞았다.
거기에 언럭키의 열정에 감동을 받았다.
언럭키는 빚을 갚기 위해 죽기 살기로 하는 거였지만, 그 태양과도 같은 모습이 벨라에게는 다르게 느껴졌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1인분도 못하는 자신이 창피해졌다.
지금도 밖으로 나갈 자신은 없지만, 최소한 월드 사가에서는 제 역할을 하고 싶었다.
천공의 탑 이후에도 계속해서 대장장이 NPC를 찾아다니고 실력을 키웠다.
그러면서 항상 언럭키의 영상을 지켜봤다.
언젠가부터 라이브를 자주 했기에 마치 옆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끄럽지만 몇 번 후원도 했다.
문제는 그가 점점 유명해지면서 발생했다.
-어? 혹시 언럭키 채널에 나오셨던 분 아니세요?
-…….
-와. 진짜 예쁘시다. 대장장이 여신님 맞죠? 영상으로 본 것보다 더 예쁘세요! 커스터마이징을 잘 하신건가, 아니면 원래 이쁘신 건가?
-…….
-실례가 안 된다면 작업하시는 거 구경해도 될까요?
-실례…에요.
-아…네.
가끔가다 그녀를 알아보는 유저들이 있었다.
언럭키의 채널이 커지며 구독자 수가 증가하고 과거 영상도 뜨면서, 그건 더욱 심해졌다.
언럭키의 성장을 보는 건 즐거웠지만 생각지 못하게 이런 피해를 입을 줄이야.
날이 갈수록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그녀의 특별한 외모 덕분이었다.
현실과 차이점을 두기 위해 머리카락만 백발로 바꾼 것뿐이지만, 남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우와. 진짜 아름다워요 언니! 저도 캐릭터 이렇게 꾸미고 싶었는데….
-커스터마이징 꿀팁 좀 알려 주실 수 있어요? 제 동생이 이제 시작한다고 해서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았다.
벨라에게는 부담되는 인기였다.
속이 울렁거렸다.
아직 그녀가 편하게 대하는 외부인은 언럭키밖에 없었다.
그와 둘이서 다닐 때는 마음이 고요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불편한지.
대장장이는 공방에서 망치만 두드리지 않는다.
필요한 재료는 직접 구하러 움직여야한다.
문제는, 어느 정도 유명해진 후로는 그게 힘들다는 점이다.
-오. 여신님. 사냥터 가시나요? 제가 에스코트해 드릴까요?
-…….
-하하. 뭐 필요한 재료 있으시구나? 말씀만 하면 제가 구해드릴 텐데. 제가 이래 봬도 나름 곤고스 길드에서 잘나가요. 곤고스 아시죠? 3티어로 분류되어 있는 길드.
-…….
사냥터까지 따라 들어와 껄떡거리는 소수의 미친놈들이 존재했다.
대부분은 그녀가 곤란해 하면 미안하다며 물러나줬는데, 몇몇은 그게 아니었다.
자신들의 실력이나 배경을 자랑하며 따라붙었다.
그게 벨라가 백현에게 전화를 한 이유였다.
“하아…죄송해요 진짜.”
백현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녀에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 줄은 몰랐다.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래서 큰마음 먹고 말했다.
“지금이라도 영상 내려드릴까요?”
벨라와의 영상은 특히나 조회수와 댓글 반응이 좋았다.
그걸 내리는 건 아깝지만, 당연히 해야 할 조치였다.
-…그건 괜찮아요.
다만, 예상외로 벨라가 거절했다.
-그것보다는…구해야 할 재료가 좀 있는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그녀에게 지금껏 받은 도움이 얼마이던가.
그중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아이템을 만들어준 적도 있었다.
은혜는 갚아야지.
“어느 도시에 있는지 말씀해주시면 바로 가겠습니다.”
* * *
도시 군트와프.
빌루스처럼 레벨 180~210 사이의 유저들이 오는 도시였다.
벨라가 여기 있다고 했을 때, 언럭키는 어쩔 수 없이 배알이 꼴림을 느꼈다.
‘내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레벨업 속도를 보여줬는데, 벨라님도 똑같았다니….’
역대 최고의 유망주.
랭커가 아님에도 하위 랭커 이상.
이런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벨라는 한 술 더 떴다는 것 아닌가.
아마 그녀가 자신처럼 방송으로 유명했더라면, 비교도 안될 만큼 인기인이 되었을 것이다.
주변을 압도하는 외모는 방송에서 엄청난 이점이 된다.
‘벨라님은 언제…아, 저기 있군.’
그녀가 언제쯤 오려나 싶었는데, 언럭키는 바로 그녀의 위치를 알아챘다.
알 수밖에 없었다.
대로를 따라 걸어오는데,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다 한 쪽으로 쏠려있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대놓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흘긋흘긋 눈동자가 돌아간다.
하얗고 윤기 나는 머리를 휘날리며 걸어오는 벨라의 모습은 여기를 레드 카펫으로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다만 냉막할 정도로 무표정인 게 아쉬웠다.
그때 벨라와 언럭키의 눈이 마주쳤다.
“…….”
그 순간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가벼운 미소.
그것만으로도 주변의 분위기가 환하게 밝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언럭키님.”
그녀는 언럭키 앞에 다가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흘긋거리던 주변의 사람들이 대놓고 놀라고 있었다.
-뭐야? 나 벨라님 웃는거 처음 봤어.
-그렇게 매일 철벽을 치시더니. 나는 항상 입 다물고 계셔서 말을 못하시나 했었는데.
-언럭키님이랑 친한가보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벨라님. 오랜만이에요.”
“…네. 감사해요.”
벨라가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려워할 때 도와주는 사람에게 감동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특히나 벨라는 최근에 굉장히 곤란했었다.
그걸 도와달라는 한 마디 말에 흔쾌히 와 주다니.
“일단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뭐 구해야할 게 있다면서요. 사냥터로 가야하나요?”
“네.”
“거기로 가서 얘기하죠.”
주변에서 언럭키와 벨라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조금씩 많아진다.
지금이야 눈치를 보고 있지만 잠시 후면 싸인 해달라고 다가올 수도 있었다.
언럭키는 상관없어도 벨라는 부담스러울 터.
일단 자리를 벗어나는 게 맞다.
언럭키가 벨라의 팔목을 잡고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
벨라는 살짝 당황했지만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갔다.
“이…이 쪽이에요.”
두 사람이 간 곳은 ‘수정 고원’ 이라는 사냥터였다.
레벨 190대의 ‘수정 골렘’ 이라는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장소.
“수정 골렘을 잡고 얼음 수정을 가져가야해요.”
“사냥해서 얻어야 한다라…. 확실히 대장장이인 벨라님에게는 좀 곤란한 일이군요.”
헤파이스토스의 후계자는 아무 장비나 착용할 수 있다.
당연히 해당 직업군처럼 장비의 위력을 100% 뽑아낼 수는 없지만, 하나같이 레전더리로 맞춘다면 그녀는 충분히 사냥터도 들어갈 수 있다.
‘그래도 나처럼 혼자 다니며 솔플 할 정도는 아니겠지.’
항상 공방에 박혀있기에 따로 부탁할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근처에서 도와줄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우셨겠어요.”
“…그건 아니에요.”
“네?”
“도와주겠다는 분들…많았어요.”
“?”
-여신님. 재료 구하러 가십니까? 제가 무보수로 함께 따라가 드리겠습니다!
-저는 제가 돈을 드리고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 대신 혹시 전화번호 알려주실 수 있는지…
주변을 떠돌던 남자들은 벨라가 사냥터 근처만 가도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그 부담스런 태도 때문에 벨라는 재료 수급 자체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아…하하. 그렇군요.”
언럭키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사냥터로 갈 때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는 남자들이 많더라니.
이 더러운 외모지상주의!
“뭐. 일단 가시죠. 얼음 수정은 몇개나 필요하세요?”
“500개요.”
“100% 드랍이라고 해도 최소 500마리는 잡아야겠군요.”
집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한 하루는 잡고 해야 한다.
언럭키는 최선을 다 할 생각이었다.
사람을 한 번 도와주기로 했으면 완벽하게 해줘야지.
다만 좀 빨리 움직여야한다.
‘다른 던전들도 빨리 찾아야 하는데. 여기서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지.’
신탁 퀘스트에서 해결하라고 한 던전은 5개였다.
그 중 어릿광대의 놀이터를 해결했고, 이제 남은 건 4개.
퀘스트 창을 보면 이 도시 군트와프에도 던전이 하나가 있다고 하니, 벨라를 도와준 뒤에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사냥터로 나아가는데, 언럭키의 시선 저 멀리로 남색 빛기둥이 솟구쳤다.
-파앗!
“……?”
남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