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대표님! 왔어요 답신!”
이혜미의 말에 정신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써요? 조금 전에 메일 보냈다고 하지 않았어요?”
“예. 바로 읽고 답신 보내셨나 봐요.”
아침 7시.
대룡 미디어는 이 시간부터 분주하다.
정신찬의 지시로 이혜미는 언럭키에게 의뢰를 맡기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다.
솔직히 따질 거 따지면서 주판 좀 튕겨보고 한참 나중에 돌아올 줄 알았다.
이제 언럭키는 그냥 그런 유저가 아니고, 200레벨 이하에서 가장 관심이 집중되어있는 초특급 루키.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된다면 빚을 들이밀건 뭐건 간에 안 해도 그만이다.
[하겠습니다! 무조건 할게요! 하게 해주세요!]
그리 길지 않은 답메일을 보면서 정신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언럭키님은 진짜….”
“와…. 진짜 신의 넘치는 사람이네요.”
“그러니까요.”
안봐도 언럭키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 것 같다.
자신이 빚진 상대기에 어떤 의뢰건 상관없이 하겠다는 것이겠지.
시간상 그럴 수밖에 없다.
메일을 받자마자 하겠다고 답장이 왔으니, 무슨 던전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답신한 것이다.
“…전 정말 운이 좋군요. 이런 분과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다니.”
정신찬은 마음이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팍팍하고 냉철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지내다가 이런 사람을 보니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요즘 세상엔 빚을 져놓고 오히려 자기가 잘났다는 듯 소리치는 사람도 많다던데.
언럭키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 자신의 행운에 감사했다.
“혜미 씨.”
“네.”
“원래 제시하려했던 의뢰금 얼마였죠?”
“선수금 1000만원. 던전 공략 성공하고 공략법 공유 시 2000만 원입니다.”
총합 3천만 원.
나쁘지 않은 금액이다.
분명 어제 들었으면 그렇게 생각했겠지.
“그걸로는 부족해요. 이런 분을 고작 3천만 원으로 부려먹으려는 건 실례입니다.”
그러나 정신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배로 올리세요. 이런 분께 다른 건 못해드려도 돈이라도 드려야죠.”
“두 배…. 알겠습니다.”
이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언럭키가 모르는 사이에 의뢰금은 2배로 늘어났다.
* * *
“사제님. 그럼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뵙지요.”
“신의 선택을 받은 분. 당신의 앞날에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언럭키는 클로에 사제와 작별하고 검신의 전당을 떠났다.
전당에서 찍을 수 있는 최고 레벨인 180은 이미 달성했다.
신탁 퀘스트도 받았겠다,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 후 워프 게이트를 타고 도시 빌루스로 넘어갔다.
빌루스는 북적거리는 중세풍의 도시였다.
언럭키는 꽤 오랜만에 이런 풍경을 봤기에 감회가 새롭다는 듯 주변을 쳐다봤다.
“직업군이 참 다양하네.”
최근 들렀던 도시들은 다 일정 직업 특화 도시였다.
천공의 탑, 공중 요새는 원거리.
검신의 전당은 검사만.
중간에 들렀던 지저 세계는 아예 유저라고는 자신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다양한 직업군이 왁자지껄하게 돌아다니는 빌루스의 풍경은 살짝 어색하게까지 느껴졌다.
“언럭키님이십니까?”
그때 언럭키에게 여성 유저 한 명이 다가왔다.
보랏빛 단발머리가 어깨 윗부분까지 떨어지는 외관에, 커스터마이징 기능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쉽게 보기 어려운 미녀였다.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면, 그녀의 허리춤에 특이하게 검이 두 자루나 메어져있다는 점이었다.
“예. 제가 언럭키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빅드래곤 길드 소속의 아세린이라고 합니다.”
아세린은 빅드래곤 길드에서 언럭키를 위한 안내역으로 찾아왔다.
던전 ‘어릿광대의 놀이터’는 빅드래곤 길드에서 비밀리에 보유 중이었기에 위치는 특급 기밀이었다.
길드원들만 몰래 쓰면서 빠르게 레벨업하고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는 장소.
실력 있는 길드들은 여러 도시에 이러한 던전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던전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세린이 그렇게 말하며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언럭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눈을 가리거나 그런 건 하지 않으시나요?”
던전의 위치는 알려주지 않은 채 입장만 시켜줄 줄 알았는데.
아세린은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길드장님께서 그럴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언럭키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라고 하시군요.”
“어…. 그런가요?”
우리가 그렇게 서로를 믿는 사이였나 싶다.
“어디 가서 던전의 위치를 발설하실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발설할 곳도 없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그렇게 말한 아세린과 언럭키는 던전으로 이동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어릿광대의 놀이터는 저희 길드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도시 빌루스는 레벨 180~210 사이의 유저들이 머무는 곳이다.
그리고 레벨 200부터 랭커로 분류가 된다.
물론 말만 랭커이지 순위가 무의미할 정도이다.
레벨 200이 된 순간의 랭킹은 수천만등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레벨을 올리며 하나씩 높여가야한다.
어쨌거나, 길드에 랭커가 몇 명이나 있냐는 길드 티어를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빌루스는 그런 랭커로 들어가는 관문의 도시.
여기서 던전을 보유하고 있다면, 좀 더 소속 유저들을 쉽게 랭커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제 능력 부족으로 계속 실패만 했습니다….”
아세린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언럭키가 물었다.
“아세린님이 이전에 공략을 진행하신건가요?”
“네. 감사하게도 길드장님께서 저를 믿고 맡겨주셨습니다. 제가 기대를 배신해버렸지만요.”
아세린은 레벨 201의 유저였다.
이제 막 랭커가 된 그녀는, 빅드래곤 소속 유저들 중 가장 유망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녀보다 더 상위 랭커는 많았지만, 성장세만 따지면 최고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이 던전에서 발목을 잡히며 자신감을 많이 잃었다.
두 사람은 도시 바깥으로 나가 숲으로 들어갔다.
복잡한 숲은 길도 제대로 나있지 않았는데 아세린은 잘도 찾아갔다.
“여기입니다.”
한참을 나아간 그녀는 바위 앞에서 멈췄다.
바위의 그림자로 가려진 아랫부분에 조그맣게 입구가 있었다.
미리 알고 있지 않다면 찾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만큼 교묘했다.
[던전 - 어릿광대의 놀이터]
-입장 제한 : 5명.
-레벨 제한 : 180이상 210이하.
“잠시 기다리시면 공략을 도와드릴 저희측 길드원들이 올 겁니다.”
“지원은 괜찮습니다. 저 혼자 들어갈 거예요.”
“…네?”
그러나 이어진 언럭키의 말에 아세린은 자신이 지금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혼자 들어가겠습니다.”
“잠시만요. 저도 언럭키님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던전은 만만하게 보시면 안돼요.”
5명의 입장 제한이 있는 던전.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아세린은 이 던전을 공략해낼 만한 최적의 조합을 찾아냈다.
탱커 1 딜러 2 도적 1 사제 1.
이렇게 구성하는 게 베스트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던전은 온갖 미로와 함정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걸 뚫어내려면 수준급의 함정 해체 스킬을 가지고 있는 도적이 필요해요.”
매번 길을 찾고 함정을 해체하기 위해 도적은 전투에 참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전투에 참여하는 건 4명.
“그리고 탱커도 필수에요.”
“레이드를 하는 게 아닌데 탱커가 필요한가요?”
“여기 나오는 몬스터들은…어찌 보면 레이드보다도 무서우니까요.”
그러면서 아세린은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내부는 어떻고, 자신들이 왜 실패했는지.
빅드래곤 길드가 어째서 외부 인사에게까지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는지.
언럭키는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며 경청했다.
다 들은 후 그가 내린 결론은 같았다.
“역시 저 혼자서 들어가겠습니다.”
“네!? 아니 지금까지 제 말을 뭘로…”
“아니다. 아무래도 직접 보여줘야 믿으실 수 있을 테니 아세린님도 같이 들어가죠. 제가 여러 번 설명하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나을 겁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언럭키는 아세린의 팔을 잡고는 훌쩍 던전으로 진입했다.
“어, 어!? 잠깐….”
거절할 시간도 없이 두 사람은 던전을 진입했다.
* * *
[어릿광대의 놀이터에 진입하셨습니다.]
[던전을 공략하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습니다.]
“아…. 망했다….”
아세린이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보랏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아름다운 외모였기에 그런 모습도 그림 같았지만, 정작 아세린은 잔뜩 풀죽어 있었다.
“저 더 죽으면 안돼요…. 이제 떨어질 레벨도 없는데….”
현재 레벨 201.
이것도 여러 번 죽으면서 몇 번의 레벨 다운과 아이템 드랍을 겪은 상황이다.
여기서 더 죽으면 이젠 랭커 자격도 박탈된다.
다시 올리면 된다지만 자신의 멘탈이 못 버틸 것 같았다.
-쿠르르릉!
그녀가 멘탈이 나가있건 말건 던전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이 울리더니 격벽이 솟구치며 순식간에 눈앞의 지형이 바뀐다.
‘검신의 전당 2단계에서 봤던 것과 비슷하네.’
게다가 골 때리는 점은, 이 지형은 30분 단위마다 주기적으로 바뀐다고 한다.
거기에 중간 중간 아주 강력한 함정들이 쉴 새 없이 존재했기에, 한 시도 방심할 수가 없다.
길찾기와 함정 해체만 전문적으로 담당해줄 도적이 꼭 필요한 이유였다.
물론 언럭키에게는 별 필요가 없었다.
-파앗!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의 색으로 빛나는 그의 눈에는, 어떤 길이 안전하고 어디에 함정이 있는지 다 보였으니까 말이다.
“일단 가죠.”
“함부로 걸어가시면…!?”
기겁해서 경고를 주려던 아세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먼저 성큼성큼 걸어간 언럭키에게 아무런 함정도 발동하지 않은 것이다.
보통은 신고식마냥 처음에 함정이 있기 마련인데…
게다가 언럭키는 자연스럽게 검을 뽑아들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벽면을 쿡 찔렀다.
그러자 그 앞에서 독침이 발라진 창이 튀어나왔다.
허공을 휘저은 창은 당연히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안 따라오세요? 빨리 공략 끝내야죠. 저 바쁜 사람입니다.”
“아…네, 네. 갈게요!”
아세린은 당황하면서도 언럭키를 따라갔다.
마치 산보라도 나온 듯 언럭키는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어찌 아는 건지 함정도 툭툭 건드리듯 자연스럽게 해체했다.
뒤따라 아세린이 입을 쩍 벌린 채 그 광경을 쳐다봤다.
‘관련 스킬이라도 있는 건가…?’
언럭키의 지금 직업이 검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애초에 그는 직업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인물.
함정 해체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리고 곧, 던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몬스터도 나타났다.
“크르르르…!”
초록색 피부를 지닌 난쟁이 몬스터. 고블린이었다.
보통 고블린은 초보 시절에나 잡는 놈들인데, 여기서 등장한 놈들은 약간 달랐다.
뭔 짓을 했는지 근육이 우락부락했고, 피부에는 날카로운 철제 무기들이 기괴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조종받는 강화 고블린]
-레벨 : 203.
무려 레벨 200이 넘어가는 고블린이었다.
고블린은 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언럭키를 향해 달려들었다.
폭발적인 근육에서부터 이어지는 빠른 스피드.
-챙!
언럭키가 검으로 한 번 놈을 빗겨치며 뒤로 물러났다.
“조심하셔야 돼요! 언제 자폭할지 몰라요!”
아세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녀 역시 쌍검을 빼들고 다가왔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 놈들은 타이밍을 전혀 종잡을 수 없게 자폭해요. 거기에 휘말리면 끝장이에요.”
빅드래곤 길드원들이 계속 실패만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싸우다가 갑자기, 아무런 전조 없이 폭발하는 몬스터.
위력도 강해서 한 번 휘말렸다가는 그로기 상태에 빠진다.
이런 몬스터가 계속 튀어나오니 던전 공략을 진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대한 조심해서….”
그때 언럭키가 아세린의 뒷목을 잡고 잡아당겼다.
언럭키의 품에 안기듯 들어왔다.
그 상태로 두 사람이 뒤로 물러났다.
“무슨….”
-콰앙!
“!?”
폭발한 고블린을 보며 아세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두 사람은 딱 한 발자국의 차이로 절묘하게 폭발의 영향권을 벗어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