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아침.
오늘따라 눈이 번쩍 떠지며 일어났다.
좋은 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긴장된 일이라고 봐야겠다.
“후우.”
백현은 간단하게 세안을 하고는 옷을 갖춰 입었다.
또 한 달이 지났다.
-저벅.
오늘은 다시금 성 팀장을 만나는 날이었다.
방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항상 느꼈던 건데, 복도에 가득한 저 어둠은 악마의 입 같았다.
걸어갈 때마다 그 아가리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요즘은 그 생각이 조금 달라졌지.’
희망이 생겼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언제나와 같이 깔끔하게 머리를 넘긴 성 팀장이 넘겼다.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그가 백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늘한 시선과 마주쳤다.
“시간 맞춰 잘 오셨군요. 백현 씨.”
“예. 늦으면 또 무슨 소리를 할 줄 모르니까요.”
“조금 늦는다고 제가 엄청나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앉으시죠.”
성 팀장이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백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기 앉았다.
그를 볼 때면 항상 속이 답답한 기분이었는데 그나마 오늘은 나쁘지 않았다.
‘이것도 희망이 생겨서 그런가.’
앉긴 했지만 그가 건네는 커피까지 마시지는 않았다.
백현은 곧장 스마트폰을 조작해 이체했다.
“확인해보시죠.”
-띠링!
성 팀장이 자신의 스마트폰에 온 알림을 흘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5600만원. 지난달보다는 적군요.”
“매일 지난달 같을 순 없죠.”
한 방에 1.5억을 갚았던 지난달과 다르게, 이번 달은 5600만원이었다.
물론 정산금을 다 따지면 이것보다도 더 많긴 했지만 만약을 대비한 비상금 정도는 쥐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급할 것도 없었기에 이 정도만 갚았다.
‘게다가 다음 달 정산은 어쩌면 역대 최고가 될지도 모르고.’
라이브에서 들어오는 후원 수익이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앞으로도 계속 라이브를 할 거였는데, 그 끝에 가면 도대체 총합이 얼마나 될까?
박세훈과 이용승조차 감히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수익을 쌓고 있었다.
“누적으로 이제 2억 조금 넘겼군요. 백현 씨의 빚 5억에서 거의 절반 가까운 금액을 갚으셨습니다.”
장부에 금액을 기록해놓으며 성 팀장이 말했다.
그가 피식 웃었다.
“축하해요. 이제 거의 절반 가까운 금액을 갚았군요. 내가 여기서 봤던 모든 인간들 중에 백현씨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최고 기록을 온통 다 깨고 있군요.”
“그런 말 들어봤자 하나도 안 기쁩니다. 그리고 절반 아닙니다. 이제 10% 조금 넘었을 뿐이에요.”
“아. 박세훈과 이용승의 빚까지 다 함께 갚는다고 하셨지. 그래요 뭐. 확실히 이대로 가면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해내겠군요.”
“…….”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칭찬을 해주는 성 팀장의 모습이 어색하다.
오히려 수상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딱히 없습니다. 제가 뭔 말을 하겠습니까. 채무자 분들이 꼬박꼬박 잘 갚아주시니 마음에 들 뿐이죠.”
“…….”
“가보셔도 됩니다.”
볼 일이 끝났으니 가보라는 듯 성 팀장이 손을 흔들었다.
백현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으로 다가가는 그를 성 팀장이 빤히 바라봤는데,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백현 씨는 저희의 원래 채무자인 김성재 씨와 친구였죠?”
“…….”
김성재.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 백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
보육원 시절부터 둘도 없는 친구이자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라고 생각했다.
그가 힘들었을 때, 자신이 힘들었을 때. 서로를 지탱하며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다.
이 험난한 사회에서 가족이 없는 대신에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기꺼이 보증을 서 줄 수 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성재가 뒤통수를 칠 줄이야.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속이 불편했기에 애써 떠올리지 않았는데, 설마 성 팀장 쪽에서 먼저 그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그건 왜 물어보는 겁니까?”
“아뇨. 별건 아니고. 친구 관계라고 들었는데 혹시 지금도 연락하나 싶어서요.”
“그건 오히려 제 쪽에서 물어보고 싶군요. 부디 그 녀석과 연결이 되면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왜 나를 배신하고 간 건지 물어보고 싶으니까.”
백현은 그 말만 하고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
성 팀장은 백현이 나간 뒤에도 한참을 문 쪽을 쳐다봤다.
‘…역시 저 놈은 김성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더 이상 지켜봐봤자 뭐가 더 나올 것 같지는 않다.
‘깔끔하게 빚만 받고 끝내도 되겠어.’
본인의 빚뿐만 아니고 박세훈과 이용승의 빚도 함께 갚아준다 했으니 회사 입장에서는 좋은 상황이었다.
‘김성재 그 녀석은 다른 방법으로 찾아봐야겠군.’
이제 그의 관심사는, 사라진 김성재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언럭키는 곧장 월드 사가에 접속했다.
컨디션이 안 좋다고 출근을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이제 월드 사가는 그의 직장이였으며, 그는 이걸로 돈을 버는 프로였다.
“충성! 오셨습니까 언럭키 소위님!”
접속한 언럭키가 특임대로 가자 보인건 꺽쇄 3개의 계급장을 지닌 사내였다.
“그대는?”
“상사 알렉스입니다. 맥켈 대장님으로부터 이번 작전을 소위님과 함께 하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 이건 작전 명령서입니다.”
30대 정도로 되어 보이는 알렉스는 명령서를 언럭키에게 건넸다.
-띠링!
[사이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빠르게 눈으로 내용을 훑었다.
그 즉시 자세한 퀘스트 내용이 눈 앞에 나타났다.
[사이드 퀘스트 : 와이번 성체 1만마리 처치.]
-퀘스트 등급 : X.
-퀘스트 설명 : 부유섬의 동쪽. 일반 와이번들의 서식지는 부유섬에서 가장 많은 와이번들이 살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 개체수가 너무 많이 증가해 이대로 두면 큰 위협이 될 수 있는바. 놈들을 죽여 개체수를 줄여라.
-퀘스트 보상 : 적정량의 경험치, 특임대의 작전 수행 중 얻는 공헌도 2배.
“보셨다시피 1만 마리나 되는 와이번 성체를 처치하는 건 단독으로는 해내기 어려운 작전입니다. 아무리 최근에 주목을 받는 소위님이라고 하셔도 그럴 테지요. 특임대장님께서는 그걸 걱정하셔서 저를 부관으로 붙여주셨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네가 해야 할 역할을 알려주겠다.”
“예. 얼마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절대 나보다 앞으로 나오지 말도록.”
“…예?”
***
알렉스는 마법사였다.
특임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됐지만, 특임대에 들어올 정도로 실력 있는 마법사이기도 했다.
그의 목표는 50대에 번쩍이는 별을 달아보는 것이었다.
인맥이 아닌 오직 실력으로 승진하는 곳이 이 곳 요새였기에, 장성급 마법사는 전부 다 대마법사였다.
그리고 알렉스는 어쩌면 대마법사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평가를 받을만한 유망주였고.
그러나 최근에는 그 기대가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듯 나타난 소위.
신탁을 받은 존재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래서 그런지 진급 속도가 말도 안 되었다.
며칠 만에 부사관 직급을 주파하더니, 기어코 위관급에 안착한 것이다.
“소위님. 물론 소위님의 명성은 저도 잘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와이번 성체를 만만하게 보시면 안됩니다.”
알렉스가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자칫 잘못하면 상사의 자존심을 건들 수 있는 말이었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이었다.
젊은 나이에 빠른 성장세였기에 자칫 잘못하면 자만하기 쉬웠다.
지금도 보라.
‘뒤에서 지켜만 보고 나서지 말라니. 어찌 이런….’
공적을 독식하겠다는 뜻이다.
너무 오만했다. 저러다 한 번 크게 실패하는 법이다.
그리고 특임대에게 실패란 죽음과 거의 같은 말이었다.
알렉스는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언럭키를 설득시켜야했다.
“그러니 부디 다시 생각을…”
“쉿.”
언럭키가 가볍게 손을 들어 알렉스를 조용히 시켰다.
그들은 어느덧 와이번의 영역에 들어왔다.
블랙 와이번들이 돌산에 머무는 것과 달리, 일반 와이번들은 푸른 초원 위에 있었다.
숫자도 한가득이었다.
저 멀리 초원에서 한가롭게 나뒹굴며 휴식을 취하는 놈들, 하늘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일련의 와이번 무리…
와이번 랜드라고 봐야할 정도였다.
-끼리릭
언럭키는 곧장 활시위를 걸었다.
“무슨…!?”
알렉스는 깜짝 놀랐다.
다짜고짜 이런 식으로 공격한다면 눈앞의 저 수많은 와이번들에게 어그로가 끌린다.
놈들이 합세해 달려드나면 궁수인 언럭키와 마법사인 알렉스 둘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피피피핑!
그리고 언럭키의 화살이 발사되었다.
“!?”
알렉스의 눈이 부릅 떠졌다.
‘무슨 화살이?’
화살을 쏘고 재장전하는 속도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화살을 계속 쏘아대는데, 더 기가 막힌 건 그 궤적에 있었다.
처음 쏘아낸 화살들은 조금 먼 거리를 돌아서 갈 수 있도록 화살이 약간 굴곡지게 휘어졌고, 나중에 쏜 화살일수록 직선에 가까웠다.
그리고 어느덧 언럭키의 손이 멈췄다.
하늘을 점한 수많은 화살들이 일제히 와이번들을 덮쳤다.
-퍼버버버벅!!!
‘유도샷’ 까지 적용되어 단 할 발도 빗나가지 않았다.
운 없이 빗나간 몇 발도 치명적인 부위가 아닐 뿐이지, 목표로 한 표적에는 모두 꽂혔다.
수십 마리의 와이번 성체가 모두 죽는데 걸린 시간은 굉장히 짧았다.
“이게 무슨….”
기겁해서 중얼거리는 알렉스가 뒤로한 채 언럭키가 슬쩍 웃었다.
‘다행히 여기는 몰이 같은 걸 할 필요도 없겠군.’
과장 조금 보태서 공기 반 몬스터 반이다.
그는 언제나 이런 환경을 좋아했다.
그래. 좀 이래야 편하게 사냥을 하지.
블랙 와이번의 영역은 지금 생각해도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을 만큼 까다로운 곳이었다.
-푸스스스!
와이번들의 사체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골드와 잡템이 여기저기 흩뿌려졌는데, 조그만 크기의 호야가 열심히 발을 놀려 아이템들을 수거하고 다녔다.
“뀨르! 뀨르!”
고기 간식을 얻어먹을 생각에 호야의 눈이 불타올랐다.
***
다행히 알렉스도 마냥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처음에 언럭키가 말했던 것처럼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의 장기는 공격 마법에만 있지 않았다.
-우웅!
푸른 입자가 언럭키를 뒤덮고 가자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버프?”
“맞습니다.”
그가 괜히 부관으로 선정되어 따라온 게 아니다.
맥켈 대장은 자세한 실력까지는 몰라도 언럭키의 수준이 굉장히 높다는 건 파악했다.
그런 그에게 필요한건 몬스터를 학살하는 능력 외적인 것이었다.
이를테면 치유나 방어, 버프 같은 것 말이다.
그 중에서 알렉스는 기본 파괴력도 나쁘지 않은 마법사였으며, 버프에도 능했다.
언럭키가 활짝 웃었다.
“아주 훌륭하다.”
“소위님의 공적에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우린 같은 팀인데 내 공적은 네 공적이기도 하지.”
언럭키는 처음으로 알렉스와 함께 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사냥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지겠어.’
-피피핑!
원래도 고속 사격으로 빨랐던 그의 화살들이, 이제는 거의 기관총처럼 쏘아졌다.
푸른 평야 위쪽으로 수백 발의 화살 세례가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