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이 쇳덩어리가 뭔가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
리바 델 레이의 성물.
여러 개로 흩어져있던 조각을 하나로 모아 만들어낸 물건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딱히 새롭게 정보창도 안 뜨고 무언가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눈여겨봤지만, 그다음엔 관심을 껐다.
리바 델 레이에서 상징적인 물건인가 싶었던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누가 썼다던 나뭇가지나 옷, 악세서리 같이 능력은 없고 상징성만 있는 골동품으로 취급한 것이다.
‘근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니….’
갑자기 억울했다.
물론 그래도 언럭키는 아마 악신의 신탁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악신은 명색이 신이면서도 꽤 쪼잔하다는걸 전에 겪어보지 않았던가.
게다가 능력이 뭔지 모를 쇳덩이 성물과 성검 중에 고르라면, 그래도 성검이 더 좋아 보였다.
‘그래도 이건 내가 잘 갖고 있어야지.’
헤탄은 딱히 성물을 달라고 하지 않았기에 언럭키는 인벤토리 안에 성물을 잘 집어넣었다.
지금은 이게 쇳덩이여도 언젠가 잘 써먹을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어쨌거나 굉장한 일이야. 악신의 성물을 우리가 가져갔다는 것만으로도 놈들의 전력이 약화될 테니까.”
헤탄은 참 잘 해주었다며 언럭키를 두둔했다.
-띠링!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레벨업!]
환한 빛이 언럭키를 한 번 스치고 지나갔다.
성물 조각을 하나로 모아 합쳐오라는 퀘스트는 까다로운 난이도였기에 레벨이 높아진 지금도 꽤 많은 경험치를 주었다.
“그리고 자네에게 맞는 보상을 무엇을 주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을 했네.”
“흐흠.”
이어진 헤탄의 말에 언럭키가 눈을 반짝였다.
경험치는 부가적인 거고 퀘스트 보상이 메인이다.
헤탄은 호르헤른 가문의 사람이니 그냥저냥 한 걸 주지는 않을 것이다.
“굉장히 어렵더군. 자네는 매번 직업이 바뀌다 보니 뭐가 필요할지도 모르겠고…그래서 호르헤른님께 연락했네.”
“오. 뭐라고 하시던가요?”
“자네의 현재 직업군이 무엇인가? 호르헤른님이 그걸 알려주면 우편으로 나중에 적합한 걸 보내주신다더군.”
언럭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직업은 궁수 계열입니다.”
“또 바뀌었나? 심지어 처음 듣는 거로군.”
헤탄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암살자, 네크로맨서, 사제 계열에 이어 궁수라니.
‘호르헤른님은 검사 시절을 봤다고 하던데…허 참. 무슨 카멜레온도 아니고 뭐가 이렇게 자꾸 바뀌어?’
심지어 그 직업들의 능력이 다 대단했다.
봐도 봐도 이해가 잘 안 가는 친구라고 헤탄은 생각했다.
‘이 친구가 활을 쏜다라…. 상상은 안 가지만…굉장할 것 같긴 하군.’
상념에 잠겨있는 헤탄에게 언럭키가 질문을 던졌다.
“헤탄님. 그래서 저는 이제 검신의 전당으로 가려고 합니다. 혹시 그에 대해 아시는 것 있습니까?”
“알기야 알지. 나도 젊었을 때 한 번 가본 적이 있거든.”
언럭키의 눈이 반짝였다.
월벤에서 자료 조사를 할 생각이긴 하지만 헤탄에게 듣는 건 또 색다른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거기는 검사의 능력을 극한으로 발휘해야 하는 곳이라서…내 능력으로는 많이 가보지도 못했어. 나는 검술의 재능이 좋은 편은 아니었거든.”
그랬으면 헤탄이 베테랑 병사 출신이 아니라 베테랑 기사 출신이었을 것이다.
“아…그렇습니까.”
“별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나중에 또 보지. 나는 헤탄님께 연락을 해보겠네.”
헤탄과는 그렇게 말하며 다음에 보자고 인사를 나누었다.
***
천공의 탑을 떠나기 전에 꼭 만나야 할 사람 중 하나는 추기경이었다.
사실상 영주와도 같은 그와 잘 지내놓는다면 인맥으로서 좋은 도움이 될 수 있을 터.
“성왕 폐하!”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이제 저는 성왕이 아닙니다.”
오랜만에 보는 추기경은 여전히 부리부리한 눈매와 근육질의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집무실 한쪽에 언월도를 세워두고 있던 그는 여전히 언럭키를 보며 반가워했다.
“한 번 성왕 폐하는 영원한 성왕 폐하이지요. 무슨 그런 말씀이십니까.”
“하하….”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그 강력한 신성력이 모두 사라지시다니.”
추기경은 언럭키를 보며 의아해했다.
신궁이 되면서 성왕의 힘을 잃은 것뿐이지만 추기경은 그걸 몰랐다.
“음 뭐. 사정이 있었습니다.”
“…말씀하시기 곤란한가 보군요.”
추기경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성왕 언럭키가 숭고한 결정을 내리는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필시 자신의 힘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감수할 만큼 희생적이고 타인의 모범이 되는 모습이었으리라!
“기운 내십시오. 저는 여전히 폐하를 존중하며 존경합니다. 밑바닥을 걸어 나가더라도 폐하 같은 숭고한 의지가 있다면 신께서 반드시 보듬어주실 겁니다.”
“……? 어…예. 덕담 감사합니다…하하.”
언럭키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적당히 넘어갔다.
눈치를 보아하니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추기경님. 부탁 하나 드리고 싶은데요.”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이제 저는 다음 도시로 떠나려고 합니다. ‘와이번의 공중 요새’로 갈 생각인데…혹시 추기경님께 고견이 있으시다면 경청하겠습니다.”
쉽게 말하면 너 거기 인맥 좀 소개해 줄 수 있니? 라는 질문이었다.
도시의 영주급 NPC이자 신의 성직자 중에서도 고위급인 추기경이라면 인맥이 없을 수가 없다.
어쩌면 와이번의 공중 요새에서도 영주급 NPC를 소개받아 편하게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그러나 추기경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도시라면 모를까 와이번의 공중 요새는 제 이름값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음. 역시 그런가요?”
언럭키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검신의 전당을 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 가야 하는 도시.
와이번의 공중 요새.
이 도시는 다른 곳과 다르게 도시만의 규칙과 법이 강하게 적용하고 있었다.
월벤에서 미리 좀 찾아봤기에 쉽지 않겠다 여기고 추기경의 도움을 좀 받아볼까 했지만…
‘인맥을 써먹을 순 없겠군. 내 힘으로 해야겠어.’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 도시는 본인의 힘과 군공이 가장 중요시되는 곳입니다.”
“예 뭐. 저도 알고 있긴 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야 하는 곳.
그렇기에 추기경은 도움이 못 되어 정말 미안해했다.
‘쯧. 새 도시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하려면 꽤 어렵겠어.’
미리 찾아보면서 예상은 했지만, 다음 도시에서의 생활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
-우웅!
푸른색으로 빛나는 워프 게이트를 통과한 뒤 언럭키는 눈을 떴다.
뻥 뚫린 시야와 함께 눈앞에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가 공중 요새가 자리 잡은 부유섬인가….”
이제 가상현실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 싶었는데도 도저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부유섬은 말 그대로 하늘에 떠 있는 섬이었는데, 보이는 경치가 장난 아니었다.
워프 게이트가 있는 곳은 섬의 가장자리여서 낭떠러지 같은 절벽가와 그 너머에 펼쳐진 구름과 하늘, 까마득하게 보이는 지상이 보였다.
이런 자연경관을 캡슐 안에서 볼 수가 있다니.
감격한 건 언럭키뿐만이 아니고 새롭게 이 도시로 넘어온 유저들도 똑같았다.
“미쳤네, 진짜.”
“와…. 나 방금 소름 돋았어.”
“왜 요즘 여행사들이 월드 사가에서 패키지를 그렇게 내는지 알겠네.”
비슷한 시기에 워프 게이트를 통과해 온 유저들 역시 비슷한 감상평을 내놓았던 것이다.
잠시 가슴이 뻥 뚫리는 광경을 보다가, 유저들은 시선을 돌렸다.
부유섬 안쪽으로는 커다란 성채가 하나 있었다.
도시 ‘와이번의 공중 요새.’
유저들이 도시에 가까이 가자, 성문에서부터 가죽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다가왔다.
“동작 그만. 모두 멈춘다.”
강압적으로 얘기하는 병사의 모습에 유저들은 대체로 덤덤하게 그 말을 들었다.
그러나 몇몇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맞서서 윽박질렀다.
“뭐야. 여긴 병사 NPC가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
“야. 내 레벨이 120인데 이제 병사 따위는 껌이거든? 기사급도 아니면서 어딜.”
이제 나름 중견 유저가 되었기에 예전처럼 마냥 도시 병사들에게 무시당할 짬은 아니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등에 찬 활을 꺼내 동시에 조준했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반항했던 유저들에게 겨눠졌다.
“항명인가? 전장에서 상관에게 항명은 즉결 처형이다.”
“뭐, 뭐? 아니…. 뭔 항명이야. 처음 보는 사이에.”
“우리 도시에 온 순간부터 너희들의 계급은 이등병이다. 일병인 우리의 말에는 절대 복종한다!”
화살에 겨눠진 유저는 어이가 없었지만 뭐라고 더 대답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유저가 툭 치며 속삭였다.
“여기 사전 조사 안 하셨어요?”
“어…네. 그냥 원거리 유저가 가면 좋다고 해서 왔는데요?”
“맞긴 한데 도시 시스템이 좀 더러워요. 계급제 도시고 위 계급에는 절대복종해야 하거든요.”
새로운 유저가 오면 무조건 이등병에서부터 시작한다.
공을 세우면 계급이 올라가는 구조이며, 상관의 명령에는 절대복종해야 했다.
이게 이 도시만의 법이었다.
직업군도 까다롭고 내부의 체계도 까다로운 도시, 공중 요새.
그럼에도 유저들이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이곳에 오는 이유는 간단했다.
레벨업이 다른 도시에 비해 2배 이상 쉬우니까!
“더럽고 치사해서 빨리 벗어나야지.”
“당장 오늘부터 경험치 싹쓸이하러 간다.”
공중 요새가 ‘와이번의 공중 요새’라고 불리는 이유는, 나오는 몬스터가 와이 번밖에 없어서였다.
공중을 날아다닐 수 있고 강력한 힘과 지능을 가지고 있는 와이번은 사냥하기 굉장히 까다롭다.
그 대신 경험치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주는데, 지역의 특성상 이 부유섬에서는 원거리 직업군은 꽤 편하게 와이번을 사냥할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스펙이 필요하긴 하다.
실력이 있다면 그 어느 도시보다 빠른 레벨업을 보장하는 곳!
그래서 ‘천공의 탑 -> 와이번의 공중 요새’로 이어지는 루트는 원거리 계열 유저들이 선호하는 도시들이었다.
원거리 계열의 랭커들 중에서는 이 코스를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이등병들. 너희들은 판단력이 없다고 생각해라. 무조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다. 잠자고, 밥 먹고, 숨 쉬는 것까지 모두 다!”
“…….”
“…….”
병사들의 말에 유저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미리 조사를 좀 하고 오긴 했지만, 직접 겪어보니 그 충격이 장난 아니었던 것이다.
“젠장. 10년 전에 전역했는데 이딴 경험을 다시 하게 되다니. PTSD 오네.”
“군대 있던 곳으로는 단 한 번도 가볼 생각조차 안 했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다니….”
불평불만을 했지만 유저들은 병사들의 통제에 잘 따랐다.
괜히 나대면서 사고를 쳤다가는 미래가 굉장히 암울해진다.
월드 사가 초창기에 이 도시에 발을 들였다가 사고를 쳐서 망해버린 유저들은 꽤 많았다.
“빨리빨리 움직인다.”
“너희들은 보급품을 받고 곧바로 전장으로 투입될 것이다.”
병사들은 유저들에게 이등병 계급장과 번호를 주며 한 명 한 명 분류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언럭키의 차례가 왔다.
“어이. 너도 이쪽으로 와서 줄…?”
병사들이 눈을 크게 떴다.
언럭키를 보더니 그들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
“존귀하고 명예로우신 분을 저희가 몰라뵙고…. 이쪽으로 오시지요!”
유저들 앞에서의 싸가지 없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