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월드 사가는 이제 11억 명의 유저 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1억 돌파까지 그리 멀지 않았으며 그 너머의 숫자도 문제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예측.
그렇기에 월드 사가는 기회의 땅으로 불리고 있고, 현재 상위권에 위치한 덩치 큰 길드들은 어지간한 기업 이상의 가치를 뽐냈다.
특히나 1티어라고 불리는 천상계의 길드들은 어마어마했다.
[길드장 크라비라고 소개하긴 했지만, 사적으로도 저는 언럭키님을 얼추 알고 있습니다. 영상에도 몇 번 나온 것 같은데, 언럭키님이 가끔씩 함께 다니시는 대장장이 벨라가 제 친동생이거든요.]
메일의 첫 대목을 읽고 백현은 상당히 놀랐다.
‘벨라님의 오빠였어?’
이제서야 벨라에게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부유함이 어디서 기원된 건지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집이 부자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오빠가 1티어 길드의 길드장이자 랭커면, 그야말로 돈을 갈퀴로 쓸어 담고 있을 것이다.
아직 랭커 발끝에도 닿지 못한 자신이 이 정도이니, 그쪽 세계가 어떨지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만 언럭키님 덕분에 동생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부모님도 오랜만에 편히 웃고 계시네요.]
“음….”
백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대목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뭐가 좋아졌다는 거지?’
갑자기 부모 얘기는 또 왜 나온단 말인가.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꽤 심각한 이야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얘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다음 순간, 백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서 보답을 좀 하고 싶습니다. 물론 동생 몰래요. 원하시는 건 무엇이든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한 가지는 해드리겠습니다. 메일로 회신 부탁드립니다.]
‘원하는 건 뭐든?’
그냥 일반인이 한 말이 아니다.
1티어 크라비온 길드장의 말!
심지어 지나가듯 중얼거린 것도 아니고 메일에 적혀져 있었다.
이건 반쯤 백지 수표라고 봐도 됐다.
‘뭘 말해야 하지?’
사실 가장 원하는 건 있었다.
한 20억쯤 달라고 해서 당장 우리 팀 세 사람의 빚을 갚고 여기를 탈출하는 것.
그다음 적당한 빌라 하나 사고 사무실 구해서 셋이서 전력으로 월드 사가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하아. 이건 무리겠지.”
하지만 백현은 고개를 저었다.
20억이 누구 개 이름도 아니고.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대놓고 돈을 달라고 하는 건 진짜 이상하다.
벨라의 오빠가 이걸 좋게 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벨라에게 해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아이템 제작 의뢰나 몇 번 맡긴 게 전부였는데, 아마 뭔가 오해를 크게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달라고 하는 건 반쯤 사기에 가깝다.
게다가 백현의 성향과도 맞지 않다.
그런 식으로 양심 없이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가 뭔가 도움이 크게 된 건 맞으니까 뭐든 들어준다는 백지 수표를 날렸겠지. 그러면…월드 사가의 아이템이나 받고 싶군.’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다.
아이템도 팔면 현금화가 되지만 대놓고 돈을 달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이니까.
결심한 백현이 이메일을 작성했다.
[안녕하세요. 언럭키입니다. 보내주신 연락은 잘 받았습니다. 벨라님과는 소중한 동료 사이입니다. 딱히 보답은 필요 없지만…그럼에도 말씀해주셨으니 실례가 안 된다면 크라비온 길드에서 보유하고 있는 아이템 목록을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제게 양도 가능한 목록을 보여 주시면 그중에서 하나 고르고 싶습니다.]
유니크 정도의 목록만 보내줘도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받아먹을 자신이 있었다.
***
‘왔군.’
백현에게서 답신이 왔을 때, 김동엽은 곧장 메일을 확인했다.
후루룩 내용일 읽은 김동엽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걸렸다.
“좋은 동료 사이라…. 부모님한테 말씀 드리면 정말 좋아하시겠네.”
동료 혹은 친구.
동생 화영이에게는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언제까지고 가족들이 돌보아야 하리라 생각했는데, 약간의 희망이 보였다.
당장 일반인처럼 사회생활을 하게 되는 건 무리지만, 이걸 기회로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그걸 생각하면 언럭키에게 보답을 하는게 전혀 아깝지 않았다.
다만…
“흠. 역시. 돈을 원하지는 않는군.”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길은 돈이었다.
“하긴. 그만한 남자가 이 정도의 돈을 원할 리는 없겠지.”
그의 직업이나 아이템, 스킬만 보더라도 굉장히 부유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좋은 직업을 얻으려면 직업 뽑기 시도를 계속해서 해야하고, 아이템이나 스킬을 얻으려면 비싸게 구입해야 한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한데, 그래서 랭커들은 대부분 부자였다.
애초에 부자가 아니면 그 위치까지 올라가기 힘든 것이다.
‘아니면 엄청나게 운이 좋은 케이스일 수도 있지만…그런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지.’
파워볼에 3연속 당첨되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어쨌거나, 그런 사람이기에 단순히 돈을 원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백지 수표를 적어서 줬는데, 돌아온 게 아이템 목록이라니.
이건 김동엽도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가 길드장이긴 하지만 길드는 혼자서 이끄는 게 아니다.
부길드장을 포함한 수뇌부급과 회의를 열어야 했다.
그냥저냥한 레전더리 등급의 아이템은 자신의 재량으로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의 것은 아무래도 회의를 좀 해봐야 하니까 말이다.
‘우리 길드가 보유한 탑 100개 아이템 목록 중에 몇 개나 보내줄 수 있을지 한번 봐야지.’
***
다음 날.
게임에 접속하자 보인 건 지저 세계 특유의 칙칙한 배경이었다.
그러나 함께 있는 동료들은 조금 달라졌다.
“뀨르!”
“호야. 잘 있었어?”
가장 먼저 달려든 건 호야였다.
오랜만에 본 호야는 여전히 귀여웠다.
사실 못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다시 본 호야는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했다.
품속에 안겨서 쉴 새 없이 머리를 비비적대는데…
‘아무리 봐도 강아지 같은데.’
이놈이 어떻게 고양이. 아니, 백호라는 걸까.
하여간 호야의 반김을 다음으로 인사한 건 이아손이었다.
“오셨습니까 총령 각하.”
이아손의 충성심은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한층 더 실감했다.
원래 그는 호야와 함께 지저 세계로 들어왔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보스룸에 입장하고 이 곳에 들어오는것 까지 전부, 뛰어난 은신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별 문제가 아니었다.
호야는 전투폼이 아니라면 작아서 품속에 넣어서 함께 데려왔다.
그 후에도 언럭키의 흔적을 밟아 지저 세계를 탐험했다.
애초에 언럭키가 그를 믿고 밖에 놔둔 것도, 그 뛰어난 추적술 덕분이었다.
그러다가 언럭키를 만났고, 두히칸과 싸우는 걸로 오해했다.
그래서 자신이 시간을 벌고 언럭키를 도망치도록 나선 것이다.
“그래. 출발하지.”
다행히 오해는 금방 풀렸다.
그래서 현재 파티는 3인+1애완동물(?)의 형태로 자리잡았다.
‘아니. 2인+1몬스터+1애완동물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이아손은 에토에게서 첫 번째 정기 보고를 가져왔다.
그건 굉장히 중요한 정보였다.
[오랜만이군. 기왕이면 첫 정보라서 내가 직접 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일단 먼저 말해주자면 중요한 정보들은 대부분 발설할 수가 없다. 본부에 들어가면서 이상한 의식을 치뤘는데, 그때부터는 중요한 정보를 입으로 발설하는 건 물론이고 서면으로 알리는 것도 불가능하더군. 그럴 때마다 입이 막히고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악신의 교단 리바 델 레이.
그들이 오랫동안 존속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보안을 엄청나게 유지했기 때문이다.
몬시뇰로서 본부에 들어간 순간부터 에토에게도 그 강력한 보안이 적용되었다.
특별한 의식을 치른 순간부터, 교단 본부의 위치나 주요 인원, 세력 등에 대해 발설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면 잠입을 한 이점이 많이 떨어지는데.’
에토에게 크게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가 주기적으로 전해주기로 한 정보를 많이 기다렸다.
이아손과 호야를 위에 두고 오기까지 했는데…
그러나 편지를 조금 더 읽고 언럭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수확이 없는 건 아니군.’
[하지만 의식을 함부로 할 수는 없어서 최중요 정보에만 그런 락이 걸려있고 나머지는 괜찮다. 일단 왜 천공의 탑 근처에 우리 분타가 있었는지 알아냈다. 탑 지하에 지저 세계가 있는데, 오래전 악신이 쓰던 성물이 그곳에 있다더군. 조각의 형태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본부에서는 분타를 설립해 천공의 탑을 노렸던 거다.]
짐작하긴 했지만 편지로 읽으니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부분을 읽자, 지저 도시 탐사 퀘스트가 변화했다.
-띠링!
[새로운 정보를 얻었습니다.]
[퀘스트가 새롭게 갱신됩니다.]
[퀘스트 : 리바 델 레이의 부서진 성물 조각 모으기.]
-퀘스트 등급 : 레전더리.
-퀘스트 설명 : 리바 델 레이 본진에 잠입한 에토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들이 천공의 탑을 공격한 것은 지저 세계에 있는 성물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악신의 교단이 더 강해지는 것은 세계가 피폐해지는 일. 성물 조각을 모아 완전한 성물로 만든 다음 헤탄에게 가져가자.
-현재 획득한 성물 조각 (1/7)
-퀘스트 보상 : 적정량의 경험치, 헤탄의 보답.
-퀘스트 성공 시, 연계 퀘스트 수행 가능.
두리뭉실하게 지저 세계를 탐사하라는 퀘스트에서, 정확히 뭘 해야 하는지 지침이 내려온 것이다.
총 7개의 성물 조각을 얻어야 했고, 그중 1개는 페블보 종족으로부터 이미 얻었다.
“좋아.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지저 세계의 나머지 6개의 성물 조각을 모으는 거다.”
언럭키는 편지의 내용을 다시금 요약한 다음 파티원들에게 말해 주었다.
“뀨르!”
호야는 뭐든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쉽지 않을 겁니다. 지저 세계의 수많은 몬스터들이 총령 각하를 막아설 거예요.”
이아손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오히려 좋다.”
“네?”
그래 준다면 환영이다.
굳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몬스터가 알아서 와서 죽어준다?
‘이거 완전 경험치 복사 버그잖아.’
아쉽게도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대신 성물을 얻는 걸 방해하는 놈들이 엄청 많긴 하겠지.
그놈들이 도망치지는 않을 테니, 비슷한 효과는 볼 수 있을 것이다.
두히칸도 언럭키의 말에 관심을 표했다.
“다른 놈들이 가지고 있는 성물을 빼앗으러 간다고? 그게 무려 6개나 존재해?”
“그래.”
“좋다. 나도 전적으로 협력하겠다.”
“고맙군.”
“…그 대신 그걸 다 얻으면 우리 종족의 성물은 돌려주면 안 되겠나?”
두히칸이 은근한 바람을 담아 물었다.
“욕심쟁이가 아니라면 7개나 얻었으면 하나 정도는 나눠 줄 법하지? 나는 인간 네가 욕심쟁이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
“나 욕심쟁이 맞는데?”
“…….”
“전부 다 내가 가질 거야.”
두히칸이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성물 조각은 전부 모아 하나로 합쳐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