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지저 도시는 천공의 탑 지하에 위치한 곳이었다.
빛이 나는 광물들이 주변을 밝히는 곳.
아무래도 터전이 지하이다 보니 지하 광산 같은 곳에서 생성되는 희귀 광물 같은 것에 접근하기 편했다.
“우리 뱀파이어들은 장인을 좋아하지. 그건 예술적 혼이 필요하거든.”
샬도 후작은 껄껄 웃었다.
“그런걸 내어주는 건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오, 레이디.”
후작은 직접적으로 그런 광물업에 종사하는 건 아니지만 도시의 최고 귀족이었다.
당연히 가만히 있다 보면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창고에 쌓인다.
이유는 다양하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뇌물로 바친 것도 있고 오랜 세월 동안 자연스럽게 모은 것들도 많았다.
샬도 후작은 시원하게 그것들을 내어주었다.
“와….”
거기서 벨라는 거의 눈이 돌아갈 뻔했다.
망치와 모루, 풀무부터 대장간 곳곳에 보이는 고급의 품격들.
지상에서 여러 도시의 대장간들을 다녔던 벨라였기에 한눈에 알아봤다.
샬도 후작이 제공한 이곳이 그 어떤 곳보다 최고라는 것을!
“이 정도면 만족하시오. 레이디?”
샬도 후작의 물음에 벨라는 대답 대신 팔뚝을 걷었다.
“좋은…거래였어요.”
“나 역시.”
그리고 언럭키가 뒤에서 그 장면을 부럽다는 듯 바라봤다.
“저…후작님. 제 피는 어떻습니까? 한 3리터쯤 뽑아드릴 수 있는데.”
“음…괜찮네. 있으면 나쁘지 않겠지만 굳이 일부러 찾을 만큼 자네에게서 매력적인 향은 나지 않아서 말이야.”
“…….”
아쉽게도 자신의 피는 벨라의 것만큼 뱀파이어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
수색 작업은 한참을 더 이어졌다.
언럭키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리 지루한 시간은 아니었다.
“호오. 지상에서 왔다는 인간이라고요?”
“그렇소. 꽤 명예를 아는 친구라서 내가 소개해주고 싶어 데려왔지.”
“샬도 후작님께서 친구라고 칭하실 정도라…. 후작님의 친구라면 저와도 친구가 될 수 있겠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언럭키라고 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언럭키는 뱀파이어 귀족들을 소개받고 다녔던 것이다.
보통 소개에서 중요한 건 소개해주는 사람의 신원이다.
샬도 후작을 통해서 소개를 받으니 귀족들은 처음부터 언럭키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다.
심지어 지금 언럭키의 모습은 뱀파이어들에게 있어서 꽤나 고풍스럽고 후광까지 느껴졌다.
“저…혹시 전에 거리에서 냄새 풍기며 다니셨던 분 아닙니까?”
그중에는 언럭키를 알아본 뱀파이어도 있었다.
열심히 탐문 조사를 하며 다녔기에 꽤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좋은 방향은 아니었다.
“분명 악취 풍기는 얼간이 같은 인간 놈으로 알고 있었는데….”
“크흠. 얼간이까지는 아닙니다. 냄새도 해결했고요. 언럭키라고 합니다.”
“어….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샬도 후작님의 친구분이신 줄 모르고….”
“괜찮습니다.”
언럭키는 괜히 과거의 일로 얼굴 붉히지 않았다.
적대 세력이 아니라면 굳이 NPC와 싸울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싸우는 건 성 팀장과 박터지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참고 잘 대해주다 보면 무슨 떡고물이 어떻게 떨어질지 모른다.’
당장 벨라만 봐도 그러했다.
세상에.
핏방울 살짝 주고 무슨 보상을 그렇게 받을 수가 있단 말인가.
역시 인생은 운빨이다.
별생각 없이 따라온 벨라가 그런 행운을 거머쥘 줄이야.
직업이 바뀌면서 언럭키는 성공적을 뱀파이어들에게 섞여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벨라는 대장간에서 나오질 않고 언럭키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상이 한동안 반복되었다.
어느날 샬도 후작이 그를 호출했다.
“후작님. 부르셨습니까?”
“친우여. 내가 자네를 볼 면목이 없군.”
“?”
샬도 후작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자네와 레이디가 찾는 물건을 구해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아직까지 큰 수확이 없어.”
도시의 거의 모든 귀족에게 물어봤지만, 알고 있는 건 없었다.
-수상한 종교 집단에서 노릴만한 물건이라…. 성물 같은 것일 텐데, 제가 아는 것 중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그런가…알려주어 고맙군.
-아닙니다. 후작님.
대부분의 귀족 뱀파이어들과 이와 비슷한 대화가 흘러갔던 것이다.
“그렇군요. 괜찮습니다. 후작님.”
언럭키가 말했다.
아쉽긴 했지만 지금까지 샬도 후작에게 받은 도움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럴 때 행운의 무지개 능력이 한 번쯤 발동되어 주면 좋겠는데.’
하필이면 지금은 또 조용하다.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힌트라도 좀 주면 좋겠건만.
어쩔 수 없이 직접 발품을 팔아봐야겠다.
혹시 또 모른다. 움직이다 보면 무슨 변화가 생길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저도 좀 돌아다녀 보겠습니다.”
“자네가 직접?”
“예. 언제까지 후작님께 신세만 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음….”
샬도 후작은 살짝 표정을 찡그렸다.
다양한 감정이 섞여서였다. 자존심도 상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친우여. 그대가 직접 움직이겠다면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네.”
“얘기 말입니까…?”
“내가 이 정도까지 찾았는데 없다면, 그게 무엇이든 우리 도시에 없는게 확실하네. 그렇다면 도시 바깥에 있겠지.”
도시 바깥.
이 지저 세계는 넓었고 뱀파이어들의 도시는 그중 일부분일 뿐이었다.
“자네 도시의 출입증을 받기 위해 히사렛들을 퇴치한 적이 있다고 했지?”
“아, 네.”
“히사렛같은 이성 없는 이종족들은 지저 세계 곳곳에 퍼져있네. 외곽을 지키는 병사들에 의하면 ‘페블보’들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물건이 있다더군. 마치 진짜 신을 모시는 것처럼 목숨까지 바쳐가며 지킨다던데…혹시 그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
이성 없는 몬스터가 목숨 바쳐 지키는 물건.
어찌보면 그건 몬스터의 성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곳이라면 확실히 한 번쯤 조사해볼 만하겠네.’
아무런 방향성 없이 움직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쪽부터 가봐야겠군요.”
“음. 혼자서 갈 생각이라면 말리겠네. 페블보는 굉장히 까다로운 놈들이거든. 내 병사들을 붙여주지.”
언럭키가 슬쩍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어딜 내 경험치를 나눠 가지려고?
***
-땅! 땅!
불꽃이 튀고 열기가 가득한 대장간 안.
벨라는 나시만 입은 채 열기와 싸우며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온전히 자신이 매만지는 작업물에 쏠렸다.
악의 정수.
언럭키가 부탁한다며 맡긴 레전더리 등급의 재료.
도저히 이 재료를 온전히 다룰 수 없어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샬도 후작 덕에 돌파구가 생겼다.
벨라의 주변에는 악의 정수 외에도 유니크~레어 등급의 재료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 재료와 피 한 방울을 바꿔주시겠다고요? 겨우 이런 걸로요?
-우리 집에도 잔뜩 있습니다! 부디 저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샬도 후작을 포함한 뱀파이어 귀족들이 잔뜩 건네준 것들이다.
최소 수백 년부터 수천 년 넘게 살아온 그들에게 이런 재료들은 별로 귀하지도 않다.
오래 살수록 중시하는 것은 명예와 예술품에 대한 미적 감각, 맛있는 음식, 눈의 호강 등. 조금 다른 가치의 것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벨라의 피는 황금과 교환해도 전혀 손해가 아닌 물건.
다만 벨라의 HP에 한계가 있었고 피를 너무 많이 빨리면 상태 이상 빈혈 같은 게 따라온다는 걸 알게 되어, 작업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만 교환했다.
그 결과, 그녀는 다시 자신감을 찾았다.
이번에야 말로 악의 정수를 완벽하게 제련할 수 있을 것이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그녀의 눈매가 번뜩였다.
‘집중하자.’
언럭키도 당분간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고 하니, 벨라는 그 동안 최대한 작업에 열중할 생각이었다.
***
페블보는 뱀파이어들의 도시 ‘리아퀴른’의 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놈들이었다.
광물을 주식으로 하는 놈들이었는데, 금이나 보석류 섭취를 좋아했다.
당연히 미학을 중시하는 뱀파이어들과 충돌이 많았다.
[페블보]
-레벨 : 115.
페블보의 생김새는 커다란 바위 같았다.
철, 구리, 소수의 금과 은, 극소수의 보석으로 이루어진 딱딱한 갑옷같은 바위 몬스터.
거기에 두꺼운 팔다리가 튀어나와 있는 게 페블보였다.
“크륵 크륵.”
“크르륵.”
나타난 페블보는 두 마리였는데 언럭키를 쳐다보며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성왕 시절이라면 일단 달려가 망치부터 휘둘렀겠지만 지금 언럭키의 직업은 네크로 엠페러였다.
달려갔다가는 그대로 두들겨 맞는다는 뜻이다.
네크로 엠페러는 그만의 전투법이 있었다.
-터벅 터벅.
페블보들이 언럭키를 보며 천천히 다가온다.
“해골 병사 소환.”
-덜그럭 덜그럭.
언럭키가 중얼거리자 그의 앞에 꽤 오랜만에 보는 해골 병사 한 구가 솟구쳤다.
“가서 때려봐.”
-덜그럭 덜그럭.
언럭키의 지시에 해골 병사는 두려움 하나 없이 돌진해 뼈로 된 검을 내리쳤다.
-카앙!
‘역시….’
그러나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페블보의 두꺼운 껍데기를 뚫기에 해골 병사의 검격은 너무 약했다.
‘최소한 해골 기사는 소환해야겠군.’
하지만 해골 기사의 숫자는 소수.
다수를 차지하는 건 병사와 궁수인데, 그놈들을 못 써먹게 된다면 전투력은 급감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해결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해골 소환수의 공격력을 강하게 만드는 것.
‘당장 모든 해골의 스펙업을 해줄 수는 없으니…선택할 수 있는 건 두 번째 방법뿐이겠어.’
언럭키의 손에서 검은빛 반지 하나가 반짝였다.
‘이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참,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같다.
[서서히 침식하는 저주]
-아이템 등급 : 레전더리.
-아이템 효과 : 마력 + 75 상승.
-과거 리바 델 레이 최고의 저주술사라고 불렸던 ‘이로젤라’의 힘이 담겨있는 반지이다. 이로젤라는 상대를 즉사시키는 대신 서서히 고통에 잠겨 괴로워하는 걸 즐겼었다.
-하루에 열 번 ‘부패의 저주’ 사용 가능.
-하루에 열 번 ‘침식의 저주’ 사용 가능.
-하루에 열 번 ‘맹독의 저주’ 사용 가능.
-아이템 착용 제한 : 레벨 100 이상, 어둠(暗) 속성 계열 직업, 마법사 전용.
서서히 침식하는 저주.
전에 리바 델 레이 분타를 공격했을 때, 거기 있는 보물고에서 가져온 2개의 아이템 중 하나였다.
‘악신답게 쪼잔하기 짝이 없었지.’
2개를 초과해서 가져가면 온갖 저주를 때려 넣었는데, 죽은 후에도 따라붙는 말도 안 되는 저주였다.
어쩔 수 없이 피눈물을 흘리며 딱 2개만 골라왔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반지였다.
원래는 나중에 물약을 발라서 팔아버리려고 했던 건데, 네크로 엠페러로 전직한 지금은 쓸 수 있었다.
“부패의 저주, 침식의 저주, 맹독의 저주.”
언럭키가 중얼거리자 반지에서 빛이 번쩍였다.
-띠링!
[페블보가 부패의 저주에 적중했습니다. 방어력이 크게 감소합니다.]
[페블보가 침식의 저주에 적중했습니다. 이동 속도가 크게 감소합니다.]
[페블보가 맹독의 저주에 적중했습니다. 상태이상 ‘중독’이 활성화됩니다.]
상대가 강하다면 약화시키면 그만이다.
“이제 가서 다시 때려봐.”
언럭키가 지시하자 해골 병사는 다시금 움직였다.
-덜그럭 덜그럭
-콰지직!
해골 병사의 칼이 놈의 등딱지를 뚫고 깊숙이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