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한동안 성 팀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백현이 입을 열었다.
“일단 아까 제 질문에 대답부터 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제가 석 달 안에 빚 갚고 나가도 되겠습니까?”
“…….”
성 팀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 달 만에 1.5억을 갚는 사람을 순순히 보내주라니.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성 팀장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만한 돈줄을 얌전히 풀어줄 수는 없는 법.
만약 백현이 그렇게 빚을 털고 나간다면 사장이 성 팀장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강하게 나갈 수 있는 거야. 그 냉혈한 놈은 자기가 질책당하는 상황을 끔찍하게 싫어할 테니까.
라고 박세훈이 말했다.
성 팀장을 오래 겪어보아 아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빚을 갚고 나가겠다는데 말릴 수는 없죠.”
성 팀장이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걸 원하는 게 아니니까 저와 지금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다시 말하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까?”
여기서 백현은 잠시 고민했다.
-차라리 진실을 밝히고 정면으로 돌파하자. 성강호 상대로 어설프게 수작질 걸려고 했다가는 역으로 우리가 당할 거야.
박세훈이 해준 조언은 이랬다.
백현도 동의한 부분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갑은 성 팀장이었다.
함부로 나갈 수 없는 지금, 차라리 오픈할 건 오픈하고 정면돌파 하는 게 낫다.
“저와 박세훈 씨, 이용승 씨까지 해서 3명. 제가 한꺼번에 빚을 갚을 테니 그때가 되면 우리를 풀어주세요.”
“그 세 명 치를 한번에요?”
성 팀장은 꽤 진심으로 놀랐다.
한두 푼도 아닌데 그 큰 금액을 혼자서 갚겠다고 하다니.
“요즘 세 사람이 친한 것 같다는 얘기는 들었는데…이 정도 사이일 줄은 몰랐군요.”
“그래서 돼요, 안돼요?”
“…….”
성 팀장은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차가운 금속테 안경알 너머로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결론은 그리 오래지 않아 났다.
“그리하십시오.”
“…그게 끝인가요?”
“뭐 더 원하는 게 있습니까?”
“…아뇨. 뭐.”
“그럼 이만 가주시죠.”
성 팀장은 손을 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백현은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무슨 생각인 거지?’
박세훈의 말대로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꽤 험한 고난의 길이 펼쳐질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받아들여 주다니?
“…방금 한 말. 계약서로 작성해주세요.”
백현은 확실하게 하기 위해 다시 말했다.
최소한 성 팀장은 계약 면에서 신의를 보이는 사람이다.
이렇게 공증을 해두면 나중에 딴소리하지는 않겠지.
“그게 편하다면야, 그렇게 하죠.”
***
백현이 방을 빼져 나간 뒤, 성강호 팀장은 꽤 오래 생각에 잠겼다.
“…백현. 언럭키.”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과연 김성재의 친구라 이건가. 그놈이랑 친형제보다 더 친한 사이라고 하더니. 잠재력이 이렇게 빨리 터질 줄이야.”
괴물 개발자 김성재.
극소수의 상류층만 아는 비밀이지만, 지금의 월드 사가를 만든 건 김성재였다.
월드 사가가 완벽하게 세계를 잠식해나가는데 필요한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을 그가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프리랜서 개발자로서 외주를 받아 일하던 그가 월드 사가의 코드 일부분을 맡아 완성했을 때 나온 결과물에 회사 전체가 들썩였다고 한다.
심지어 무슨 괴상한 방식으로 코드를 짠 것인지 본인만 알아볼 수 있었다.
내로라하는 개발자들이 달라붙어 코드를 분석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
월드 사가는 완성되었지만, 회사 사람도 정확히 모르는 부분이 생긴 것이다.
당연히 난리가 났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외주 맡긴 건 끝났고 김성재는 무언가를 해볼 생각인지 추가로 무언가 개발에 들어갔다.
거기엔 월드 사가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킬 결과물이 있다고 자신했으며,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으고 빚까지 져서 작업에 몰두했다.
월드 사가는 그것까지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구매하기로 했다.
돈 냄새는 귀신같이 맡는 (주)머니앤캐시 사장이 끼어든 게 그때였다.
한 몫 단단히 챙기기 위해 굳이 대출 형태로 자금을 지원해 준 것이다.
‘문제는 그러고 갑자기 실종된 거지.’
분명 결과물이 완성되었을 텐데, 갑자기 없어졌다.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기에 친구인 백현이라도 붙잡았다.
정말 친했다고 하니 데리고 있으면 언젠가 김성재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깜깜무소식.
백현을 더 붙잡고 있어 봐야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슬슬 그 쓸모가 의심스러울 때, 1억5천이라는 돈을 그가 갚아버리다니.
그래서 성 팀장은 그와의 관계를 변화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다 보면 빚을 다 갚고 여기를 탈출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저런 타입은 강제로 잡아둬봤자 소용없다. 언젠가 터질 거야.’
성 팀장은 여기에서 일하며 다양한 인간들을 겪어봤다.
백현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인간.
결코 쉽게 꺾이지 않는다.
심지어 지금처럼 희망이 크게 자리 잡은 상태에서는 더더욱.
되도록 오래 그를 데리고 있으려고 했다.
김성재가 언젠가 다시 나타난다면 분명 백현과도 접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플랜을 짜봐야겠군.’
성 팀장은 머릿속을 정리시켰다.
일단 백현이 무려 세 명분의 돈을 다 갚겠다고 했다.
아무리 한 달 만에 1.5억을 갚아버렸지만, 세 명분의 15억을 다 갚는 데는 최소 10개월. 어쩌면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다.
시간은 벌었다.
회사 입장에서 그것부터 다 받으면서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군.’
백현은 방으로 돌아와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세훈이 꿰뚫어 본 성강호 팀장의 성격이라면 이번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들이 지금껏 불리한 점은, 빚쟁이라는 신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을’인 상황.
갑자기 (주)머니앤캐시에서 트집을 잡으려면 수십개도 넘게 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 팀장과 이번에 확실하게 약속을 맺었다.
빚을 갚으면 아무런 수작질 없이 풀어주기로.
계약서까지 만들어 서로 서명까지 완료했다.
아무리 음지의 기업이라고 해도 이런 계약서까지 만들어놨으면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까지 백현을 핍박할 수는 없으리라.
‘왜 순순히 그래 준건지는 모르겠지만….’
의문은 들었지만 지금 알아볼 수는 없었다.
물어본다고 성 팀장이 알려줄 것 같지도 않고.
어쨌거나 잘된 일이다.
‘남은 목표는 15억. 아니…13억 5천만 원.’
실제로는 그것보다 좀 더 필요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자가 엄청나게 무시무시하게 쌓여가고 있으니까.
돈이 필요했다.
백현이 월드 사가 접속기에 몸을 뉘었다.
‘답은 이 안에 있다.’
조여오는 현실을 해결할 방법은 월드 사가 안에 있었다.
백현이 할 수 있는 건 언제나 그렇듯, 전력을 다해 부딪치는 것뿐이었다.
***
성왕에서 네크로 엠페러로 다시금 직업을 바꾸었다.
그 즉시 언럭키를 보는 시선들이 달라졌다.
“타 종족…인간이라고 했나?”
“지상에 사는 종족이랬지. 저렇게 명예로울 줄은 몰랐군.”
“이상하리만치 나던 악취가 사라지니까 이제서야 얼굴이 제대로 보이네. 거 참 빛이 나는 외모구만.”
“원래 인간들이 우리 뱀파이어만큼 저렇게 고귀한가?”
언럭키가 쌓은 명예 수치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일찍부터 명예의 중요성을 알았다.
초보 때도 그렇지만 초보를 벗어난 순간부터 NPC와의 관계는 굉장히 중요하다.
수많은 유저들이 처음엔 사냥에 열중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그걸 깨닫고 NPC들과 잘 지내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아 NPC들 진짜 개빡치네. 성문 지키는 병사도 개무시함.
-병사 무시하면 안 됨. 명예 작업 진작에 안 해두면 제대로 대꾸도 안 해줌.
먼저 길을 걸어간 선배들이 겪은 불만들이 월벤에 차곡차곡 누적되어 있었다.
언럭키는 그래서 예전부터 명예 올리기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특히 그는 호르헤른 가문과 계속해서 연계를 해오지 않았던가.
NPC의 중요성은 훨씬 더 크게 체감했고, 천공의 탑 막바지에 ‘성왕’의 이름값에 기대어 명예 수치를 잔뜩 올리는 작업을 했었다.
물론…
‘벨라님 앞에서는 명예 수치고 나발이고 쓸모없는 것 같지만.’
“레이디.”
“벨라라고… 불러주세요.”
“오. 고귀하신 레이디 벨라님. 이름을 허락해 주시다니….”
“…….”
자꾸 레이디라고 불리는 것에 부담스러워서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했지만 뱀파이어들은 그것에 감동하였다.
이름을 허락해 주다니!
뱀파이어들은 언럭키를 명예 있다며 존중해주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벨라 앞에서는 아예 쩔쩔맸다.
심지어 그건 최고위층인 샬도 후작조차 마찬가지였다.
“수색이 좀 더뎌지는 것 같소. 아무래도 언제 부하들 교육을 한 번 시켜야겠군.”
샬도 후작이 염치없다는 듯 말했다.
벨라가 부탁한 수색에 호언장담을 했는데 늦어지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크흐흠.”
그러면서 샬도 후작은 계속 벨라의 눈치를 봤다.
그의 시선은 한 번 상처 났다가 아문 벨라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갈증이 나는지 목울대가 움직인다.
시원하게 해결하고 그 보상으로 피를 받으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니 갈증만 심해진다.
‘허 참. 거의 뭐 조련을 했군.’
언럭키는 그게 참 신기했다.
별생각 없이 데려온 벨라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이유가 뭔지 정확히 모르겠네. 알면 나도 비슷하게나마 따라해보는 건데.’
아니면 벨라가 미녀라서일 수도 있겠는데…
‘미녀의 피가 맛있다 뭐 그런 건가?’
이건 좀 더 지켜봐야겠다.
그리고 벨라 역시 샬도 후작의 갈증을 눈치챘다.
언럭키가 원하는 건 리바 델 레이가 왜 지저 도시를 탐내느냐에 대한 증거였다.
당연히 그걸 찾는 건 쉬울 리가 없다.
아무리 뱀파이어 사병들을 써도 마찬가지.
최소한의 시간이 걸릴 테고, 샬도 후작의 인내심을 시험하겠지.
“전…대장장이예요.”
“오. 고귀하신 레이디께서 그 재능도 훌륭하셨군. 과연 이만한 향기를 내려면 단순 아름다움으로만은 안되지. 필시 실력 있는 대장장이겠군?”
벨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샬도 후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벨라는 바보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상대를 관찰하는 면에서는 평범한 사람보다 더 뛰어났다.
일부로 그런 건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지금 타이밍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저에게 필요한 걸 주신다면…저도 제 피를 나눠드릴 수 있어요.”
“필요한 거라면…?”
“뭐든 좋아요. 좋은 망치, 좋은 모루, 정….”
단순히 직업이 좋은 것만으로는 좋은 아이템을 만들어낼 수 없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는 말은 순 뻥이다.
좋은 도구를 쓴다고 다 장인은 아니지만, 훌륭한 장인일수록 누구보다 더 장비를 많이 찾는다.
지저 도시라면 그녀의 스펙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켜줄 장비가 있을 수도 있다.
특히 샬도 후작 같은 고위 귀족 NPC라면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아니면…”
벨라가 흘끗 언럭키를 쳐다봤다.
“…좋은 제작 재료 같은 것도 괜찮고요.”
“제작 도구, 재료.”
샬도 후작이 활짝 웃었다.
“하핫. 겨우 그 정도면 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