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언럭키가 지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겪은 건 강력한 차별이었다.
그러나 그건 자신들이 뱀파이어고 너는 인간이다 같은 차별은 아니었다.
‘그런 것보다는 생리적인 혐오감에 가까웠지.’
이유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내 직업 때문이야.’
뱀파이어들은 어둠의 종족.
심지어 지상에 있는 어둠 속성의 몬스터와 다르게 아예 터전조차 지저 세계이다.
태양 빛을 볼 일도 없는 그들에게 신성력의 빛은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심지어 언럭키는 그냥 사제도 아니고 사제 계열의 끝판왕, ‘성왕’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차라리 이들이 적이었다면 언럭키도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약점인 신성력을 뻥뻥 써가며 대가리를 깨부수며 다녔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도시 전체와 싸울 생각이 아니라면 그런 미친 짓은 하면 안 되지.’
벡스나 샬도 후작 같은 경우는 생리적인 혐오감을 참고 상당히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만큼 지성이 있는 NPC들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큰코다친다.
‘지금 내가 할 선택은…하나뿐이지.’
언럭키는 결심을 내렸다.
“마법사를 고른다.”
-띠링!
[마법사를 선택하셨습니다.]
[한 달 동안 ‘대마법사(레전더리)’ 직업이 적용됩니다.]
-파앗!
언럭키의 몸에서 빛이 번쩍이며, 착용하고 있던 아이템 몇 개가 인벤토리로 강제로 들어갔다.
마법사는 천 쪼가리밖에 못 입고 완드나 지팡이 계열만 들 수 있기에 제한이 걸린다.
심지어 지금 착용한 것들은 사제나 성기사 전용 아이템들이었기에 더더욱 착용할 수 없었다.
“음? 갑자기 악취가 사라진 것 같은데?”
뱀파이어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성왕 직업이 사라지자마자 그 효과가 즉각 적용되는 모양.
내친김에 언럭키는 인벤토리 안에서 한동안 잠자고 있던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네크로맨서 계열의 끝판왕 아이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그레고녹의 홀’.
-띠링!
[그레고녹의 힘이 전수됩니다.]
[직업이 변화합니다.]
[어둠(黑) 계열 직업 ‘네크로맨서’를 획득합니다.]
왕홀을 쥐자 그 끝에서 검은 번개가 몰아치더니 언럭키를 휘감았다.
-띠링!
[올마스터의 힘이 그레고녹의 홀에 영향을 미칩니다.]
[직업 ‘네크로맨서’ 가 변화합니다.]
[새로운 직업이 주어집니다.]
[언데드들의 황제. <네크로 엠페러> 직업을 획득합니다.]
다시금 네크로 엠페러 시절로 돌아왔다.
흘러넘치는 마력을 느끼며 언럭키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눈을 뜨자 자신을 바라보는 뱀파이어들의 눈빛이 느껴졌다.
아까와는 정반대였다.
역겨워하던 뱀파이어들.
잘 참는다고 참았지만 그래도 힘들어했던 샬도 후작.
그들의 눈빛이 대번에 호의적으로 바뀐 것이다.
“자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는군.”
“마치 오래된 전우를 보는 듯한 기분인데…. 허 참. 이유를 모르겠네.”
“샬도 후작님. 이제 아까와 같은 악취도 안 나는 것 같은데 저분도 계속 함께 만찬을 즐기면 안 되겠습니까?”
성왕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뱀파이어들에게 악취를 풍긴다.
스킬이라도 쓰면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반대로 네크로맨서에게는 친숙하고 익숙함을 느꼈다.
같은 어둠의 길을 걷는 동지.
심지어 네크로 엠페러가 품고 있는 마력은 훨씬 더 농도 짙은 어둠이다.
뱀파이어들은 언럭키에게서 귀족들, 그중에서도 고위 귀족이나 품길 법한 품위를 느꼈다.
뱀파이어들의 건의에 샬도 후작은 빙긋 웃었다.
“당연히 되지. 자네도 괜찮나?”
“예. 얼마든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언럭키는 냉큼 샬도 후작의 옆에 가서 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깨달았는데 자네에게 은은한 고귀함도 느껴지는군. 상당히 명예롭게 살아온 것 같은데…이걸 왜 이제 깨달았는지 모르겠어.”
샬도 후작이 중얼거렸다.
언럭키가 지금껏 열심히 쌓아온 명예 수치가 이제서야 제대로 작동은 하는 것이다.
이제껏 악취 하나 때문에 기껏 올린 명예에 대한 대접도 못 받아서 짜증이 났건만.
그러나 언럭키는 웃었다. 이럴 때 웃는 사람이 일류다.
“하하. 샬도 후작님께서 느껴지는 고귀함이 훨씬 더 대단하신걸요. 저는 후작님께서 걸어오실 때 그 위압감에 눌려 감히 눈도 못 마주쳤습니다.”
“하하. 원, 자네도 참. 지상에서 온 인간이라 그런가? 입담이 청산유수군.”
샬도 후작은 기분이 좋은지 껄껄 웃었다.
언럭키는 그 옆에 달라붙어 연신 아부를 떨었다.
NPC와 친하게 지내서 그의 모든 걸 받아먹겠다!
언럭키가 지금껏 단련해온 방법들 아니던가.
뱀파이어 귀족 한 명쯤 같은 편으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제부터 진짜로 지저 도시의 콘텐츠를 즐겨볼 시간이었다.
***
“후우.”
백현은 심호흡을 했다.
매달 있는 날이지만 이때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한 달에 한 번, 성 팀장과 독대하며 빚을 갚는 날.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날이 찾아왔다.
박세훈이 만들어준 장부를 가지고 그는 복도 끝, 성 팀장의 방을 찾아갔다.
-똑똑.
-들어오세요.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백현은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끼익.
“오랜만이군요. 백현 씨.”
언제나처럼 정장에 깔끔한 올백 머리를 유지한 성 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차갑게 빛나는 유리알 너머로 백현을 쳐다봤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으세요.”
예의 있고 착해 보이지만 백현은 그가 얼마나 독사 같은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번 달 치 빚을 갚으러 왔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 박세훈과 이용승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말이다.
원래 처음 계획은 이중장부를 사용하여 몰래 돈을 모으고, 한 방에 빚을 갚아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었다.
매달 큰돈을 갚아나가면 (주)머니앤캐시에서 그를 놓아줄 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붙들어놓고 계속해서 돈을 뽑아먹으려 하겠지.
하지만 막상 지금 와서 보니 상황이 너무 달라졌다.
-우리 이번 달 수익이…이게 실화야?
최종 정산을 마쳤을 때 박세훈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달 수익은 일단 그 종류부터 다양했다.
기본적으로 미튜브 정산.
매일같이 폭발적 성장을 하고 있는 언럭키의 채널 수입은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최고점을 갱신했다.
거기에 두 번의 라이브 때 받은 후원이 꽤 되었다.
타인을 위해 사냥터를 공개했다고 오해를 받아 돈쭐(?) 내준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두바르에서도 꼬박꼬박 월급 보내주고. 대룡 미디어에서도 이번 달 광고비 추가로 입금됐고….
게다가 그것들은 부가적인 것이었다.
백현은 자신의 캐릭터의 레벨이 100을 넘어가면서 이번에 아이템을 많이 갈았다.
새로 얻은 아이템들이 여러 개였던 만큼, 오래되어 레벨 제한이 낮은 것들은 물약을 발라 팔아치운 것이다.
하나같이 유니크 이상에 레전더리 등급도 많았기에, 물약을 발랐음에도 이득이 크게 남았다.
그 결과 최종 정산은….
<이번 달 입금액 : 100,164,213원.>
무려 1억이 넘는 돈!
백현과 박세훈, 이용승은 눈앞에 찍힌 금액을 보면서 할 말을 잊었다.
-이거…우리 전략을 바꿔야겠는데.
-네. 저도 방금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원래 생각한 건 한 방에 세 사람분의 빛, 15억을 갚을 때까지 열심히 숨기고 버티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달까지 들어온 수익에 대룡 미디어의 광고비까지 포함하면 벌써 엄청난 금액이 모였다.
이걸 단순히 숨기기만 하면 바보다.
-차라리. 우리 이걸로 세게 한번 나가보자. 이참에 성 팀장이랑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거지.
그 후로 세 사람은 어떻게 할지에 대해 열심히 의논했고, 나쁘지 않은 계획을 짰다.
‘성 팀장의 반응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지금부터의 협상은 나한테 달려있다.’
“이번 달에 갚을 금액입니다.”
백현은 그렇게 말하며 성 팀장이 보는 앞에서 스마트폰으로 그에게 계좌 이체했다.
-띵동!
-백현님으로부터 ‘150,0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뭐?”
이어서 자신의 폰에 온 알림에 성 팀장은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백현은 그 모습이 살짝 웃겼다.
항상 독사 같던 그가 저런 모습도 보일 줄이야.
“내 빛. 이자까지 쳐서 5억. 앞으로 석 달 안에 다 갚아드릴게요.”
백현은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더 주지 않기 위해 추가로 말했다.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면 다음 달에 다 갚을 수도 있고요.”
사실 허세에 가까운 말이었다.
아무리 모아놨던 5천만 원과 이번 달에 정산받은 1억을 합해서 1억 5천을 갚았다고 하지만, 다음 달도 이렇게 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서 생긴 특수한 이벤트라고 보는 게 옳았다.
하지만 그걸 성 팀장이 알 수는 없다.
“…….”
그는 백현이 건넨 장부를 열어봤지만, 내용은 깨끗했다.
여전히 이번 달 순수익 천만 원을 찍혀있는 장부를 보고 그는 ‘허-.’하고 웃었다.
“…박세훈 솜씨는 여전하군요.”
대놓고 숨기는데도 이상한 점을 찾기 힘들다니.
이중장부인 걸 알았지만 성 팀장은 함부로 백현을 추궁하지 못했다.
그야 당연했다.
대부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쥔 자는 갑이다.
하물며 몇 달 전까지 무일푼이었다가 한방에 1.5억을 갚아버리는 큰 손이라면, 절대로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번 라이브 때 후원금을 꽤 많이 받은 건 봤습니다만…설마 그게 끝이 아니었을 줄이야.”
그 역시 언럭키의 미튜브를 매일 확인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성장세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그 상승 폭이 어마어마하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이대로 가면 새로운 랭커가 탄생할 날이 머지않다는 월벤의 의견도 많았다.
“도대체 월드 사가에서 뭘 하고 다니는 거죠?”
“그걸 제가 말해줘야 할 의무는 없는데요?”
“…….”
성 팀장이 매섭게 쏘아봤지만, 백현은 지지 않았다.
뚫어져라 눈싸움하며 절대 피하지 않았다.
“하, 하하.”
성 팀장이 싱긋 웃었다.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체 입꼬리만 올라갔다.
“한 방 먹었네요.”
‘후우.’
그 말에 백현은 성 팀장 몰래 속으로 참았던 숨을 뱉었다.
일단 첫 단추는 나쁘지 않게 꿰었다.
-우리가 그만한 돈을 한 방에 갚아버리면, 성강호 그놈은 절대 우리를 막 대하지 못할 거야.
(주)머니앤캐시는 불법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회사이지만, 그렇기에 돈 앞에서 더욱 철저했다.
그들은 멍청하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거위를 잘 다독여서 영원히 황금을 얻으려고 하겠지.
“이중장부를 가져오면서 이만한 금액을 일부러 이체한 거라면…저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거겠죠. 맞습니까?”
어떻게든 숨겨야 할 사실을 이렇게 대놓고 오픈하다니.
성 팀장은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예.”
“말씀하세요. 들어볼 테니.”
성 팀장의 태도가 바뀌었다.
고압적인 자세가 아니라, 동등한 공동 사업자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후우. 좋아. 여기까진 잘 왔다 집중하자.’
백현은 안도했지만, 결코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협상의 시작이었다.
원하는 것을 다 얻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