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목숨의 위협을 느낀 이아손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자신이 어떻게 그런 곳에 잠입을 하냐고.
제발 봐달라고 얘기했다.
“쯧쯧. 그렇게 기백이 없어서야.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언럭키가 혀를 찼다.
사신 시절의 자신이었다면 금세 가서 그놈들 목을 다 따고 돌아올 수도 있었을 텐데.
패기가 없다.
사실, 애초부터 이아손에게 이 임무는 불가능했다.
어쌔신이라고 하지만 그는 어둠 속성이 아니다.
후천적으로 은신과 암살 계열 기술을 익힌 것뿐, 악(惡) 성향의 직업이 아닌 것이다.
결계를 뚫고 갈 수 없으니 시작 자체를 못한다.
그럼에도 얘기한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 때문이었다.
결국 언럭키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추기경님.”
“예, 성왕 폐하.”
굳은 표정의 언럭키는 한동안 추기경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곧, 친절한 눈웃음을 띄웠다.
“하하. 저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제가 나름 성왕의 힘을 계승했는데 일반 신도처럼 헌금을 낼 수가 있나요. 어떻게 디스카운트 조금…한 20%정도…아니면 10%라도 안 될까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그런 생각으로 언럭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안 됩니다.”
그러나 추기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언럭키가 한참 분주하게 추기경을 상대로 협상을 벌이던 때.
리바 델 레이 천공의탑 분타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된 것이냐.
“누구냐. 누가 배신한 거냐?”
이 분타를 책임지는 가장 높은 등급의 사제.
‘몬시뇰’ 에토가 분타의 모든 사제와 수련 사제들을 모아놓고 물었다.
침착한 목소리였지만 감히 그들을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평소 에토는 꽤 자비로운 리더였는데,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마치 광기 같은 붉은 빛이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눈빛.
“대답하라. 배신자가 없다면 저들이 우리의 계획을 어떻게 알고 미리 대비한 거지?”
“…….”
수십 년간 준비한 계획이었다.
어린 시절의 에토가 품었던 그 감정은 시간이 흘러 몬시뇰이 되어가면서 더욱 커졌다.
세인트크리스 교단에 대한 복수심.
그 감정을 원동력으로 살아왔는데, 마침내 그 결실을 맺을 순간에 대차게 말아먹을 것이다.
“이제 놈들은 절대 방심하지 않을 거다. 정면으로 싸운다면 승산은 없고. 내가 수십 년간 노력해온 게 무너진 셈이지.”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게 이상한 일이다.
실제로 에토는 이성을 잃었다.
-스릉.
그가 검을 뽑았다.
길이가 2m가 훌쩍 넘어가는 장검이었다.
몬시뇰로서 그의 직업은 암흑 기사. 그중에서도 한 자루 태도(太刀)를 귀신처럼 다루는 귀검사(鬼劍士)였다.
그의 검에서 검은색 마기가 뭉클거리며 흘러나오더니, 잔상을 그리며 허공을 휘저었다
-촤악!
-푸확!
“끄아아악!”
“요, 용서를…. 제발….”
에토는 이번 일의 책임을 져야할 부하들을 마구 베어버렸다.
심지어 거기엔 수련 사제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계획을 입건한 사제 중 한 명의 목을 베어버린 것!
칼날은 그제야 멈췄다.
피가 날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럼에도 주변은 고요했다.
다들 입을 틀어막은 채 두려움에 질려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다른 계획을 수립해 와라. 천공의 탑을 확실히 무너뜨릴 방법을. 내 원수를 갚을 방법을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몬시뇰님!”
사제들이 있는 힘껏 소리치며 대답했다.
5명의 사제가 있는 분타였는데 벌써 두 명이 죽었다.
간부급 3분의1이 날아간 것이다.
자신들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은 부리나케 움직였다.
***
[세인트크리스 교단에 500,000 골드를 헌금하셨습니다.]
[교단의 공헌도가 + 5000점 상승합니다.]
“허허. 감사합니다. 성왕 폐하. 이건 좋은데 쓰도록 하겠습니다. 당분간 교단 재정에 문제는 없겠군요.”
추기경은 표정을 숨길 생각도 안하고 활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대로 언럭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우리 사이가 눈곱만큼도 할인 못 해주는 사이였다니….’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양반 같으니.
추기경은 단호했다.
어찌 신에게 바치는 헌금에 할인이라는 단어를 넣으시냐며 오히려 그를 나무라기까지 했다.
그런 말까지 듣고 계속해서 가격을 깎아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괜히 호감도만 떨어질 수 있기에, 언럭키는 지갑을 열었다.
50만골드.
한화로 5천만 원이나 되는 금액을 낸 것이다.
‘내가 이런 돈도 턱턱 낼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헌금을 하면서 언럭키는 이번에 새삼 자신의 능력(?)을 깨달았다.
어렸을 때부터 큰돈을 제대로 만져보지 못해서 몰랐는데, 이런 큰 금액을 내도 막상 멘탈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나중에 또다시 벌 수 있다는 자신감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낼만 했던 것이다.
‘물론 허탈하긴 하지만.’
그 감정도 그리 크지는 않았다.
이번에 라이브 방송과 천공의 탑 외부 입장권을 판매하면서 벌어들인 수익이 더 많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이제부터 의식에 들어가겠습니다. 꽤 긴 의식인지라 며칠 정도 시간이 걸릴 겁니다.”
“네. 그리 하세요.”
언럭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추기경은 돈벌이를 하고 싶어서 이만한 헌금을 달라고 한 게 아니었다.
리바 델 레이를 감싸고 있는 대결계는 그만큼 강력해서, 밖에서 부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오래된 성물을 사용해야했고 추기경을 포함한 사제들이 한데 모여 며칠을 밤낮으로 기도해야 했다.
게다가 생각지도 않았는데, 헌금의 이점은 또 있었다.
“교단의 보관소는 이 쪽입니다.”
세인트크리스의 유적 보관소.
통칭. 보물 창고!
추기경은 그를 그 곳으로 안내했다.
공헌도를 많이 쌓았으니 그에 걸맞은 교단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며 말이다.
‘헌금으로 공헌도를 쌓는 대신 그 대가로 교단의 보물을 고를 수 있을 줄이야.’
이건 꽤나 만족스러웠다.
세인트크리스 교단은 리바 델 레이같은 쫌생이가 아니었다.
리바 델 레이는 보물 창고를 보여 주며 있는 자랑 없는 자랑 다 하더니, 정작 퀘스트로 얻을 수 있는 공헌도는 손톱만큼 밖에 안됐다.
“폐하께서 이번에 쌓은 공헌도는 5000점입니다. 그걸로는 이 보관소에 있는 물건들 중 하나를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추기경이 안내한 곳에는 온갖 무기와 방어구, 장신구들이 가득했다.
언럭키는 내부를 한번 슥 훑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어느 정도 수준을 알 수 있었다.
-파앗!
거의 모든 아이템에서 초록색과 파란색 빛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유니크 급인가.’
언럭키가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다잡았다.
‘역시 리바 델 레이 그 쓰레기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아주 훌륭한 종교였네!’
헌금을 한 이유는 오로지 대결계를 부수기 위해서였다.
그것만 해줘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보상을 또 내려줄 줄이야.
지금 같은 기분이라면 세인트크리스 교단에 정식으로 입교하라고 해도 할 것 같다.
“그리고 성왕 폐하.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지금 보여드린 이곳은 폐하의 ‘헌금에 대한 공헌도’로 가져갈 수 있는 물건들이 있는 곳입니다.”
언럭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금에 대한 공헌도라니.
그것 말고 내가 무언가 공헌한 게 또 있었나?
“이번에 탑의 바깥으로 모험가들을 내보내 악마들을 처리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 폐하이지 않습니까. 그건 아직 정산을 하지 않았죠.”
“아…!”
추기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띠링!
[교단의 공헌도가 + 10000점 상승합니다.]
그렇게 얻은 공헌도는 무려 1만점!
5천만 원을 헌금해서 얻은 것의 무려 2배나 되는 수치였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수십 년 전 결사대의 실패는 지금까지도 탑 내부의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신도들은 외부를 두려워했고, 추기경은 2차 결사대를 만드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영원히 여기서 악마들을 상대로 버텨야 할 운명이었는데, 그걸 타파한 것이다.
그건 거액의 헌금 이상의 값어치를 지녔다.
추기경은 빙긋 웃었다.
“세인트크리스 교단은 신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에게 절대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렇군요! 오늘도 제 신앙심이 날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언럭키가 저도 모르게 성호를 그렸다.
오늘부로 세인트크리스 교단은 언럭키의 마음 속 제 2의 고향이 되었다.
그럼 제 1의 고향이 어디냐고?
‘거긴 호르헤른 가문이지.’
아무도 넘지 못할 이상향!
그게 호르헤른 가문 아니던가!
어쨌거나, 추기경은 새로운 곳으로 안내했다.
공헌도가 높아졌으니 더 수준 높은 물건들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는 좀 더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추기경이 말했지만 언럭키는 대답하지 못했다.
“와….”
그저 가만히 입만 벌리고 감탄했다.
-파아앗!
보관소는 아까 것의 반도 안 되는 크기고 물건의 개수도 그리 많지 않았지만, 전부 남색 아니면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던 것!
“허허. 표정을 보아하니 마음에 드시나보군요. 그럴 만합니다. 전부 다 저희 교단에서 오랫동안 모아온 보물이니까요.”
언럭키의 감탄하는 모습이 뿌듯한지 추기경은 미소를 지었다.
“여기 있는걸 다 주신다는 거죠?”
그러나 이어진 말에 추기경이 정색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만 골라 가십시오.”
“…쩝.”
언럭키가 혀를 찼다.
아쉽네.
***
“으으. 힘들었다.”
언럭키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으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추기경이 안내해 준 보관소에서 아이템 하나를 고르는데 몇 시간이 걸렸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도대체 뭘 골라야할지 모르겠어서였다.
‘다 같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지.’
과연이라고 해야 할지.
교단의 보관소에 있는 아이템들은 레전더리 중에서도 수준이 높았었다.
여기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심력 소모가 엄청나게 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현재 상황에서 무엇을 골라야 가장 좋을까?
사제 계열의 직업 ‘성왕’.
이론적으로는 뒤에서 버프와 힐이나 뿌리며 파티를 지원하는 게 맞다.
그러나 그건 성향에 맞지 않아 앞으로 나서 싸우는 게 현재의 언럭키의 전투 방식이었다.
다행히 무기 ‘우레 망치’ 나 호야의 존재로 지금까지는 할만 했다.
그러나 위험한 상황도 여러 번 있었는데, 아무래도 전투 직업만큼의 센스를 보여줄 수 없었으며 방어력이 약하기 때문이었다.
‘방어력이 낮아서 몇 대만 맞아도 HP가 뚝뚝 깎이는 건 문제가 컸지.’
아예 피하면서 안 맞으면 모를까, 사제는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나마 헤탄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각반이 있어서 몇 대라도 맞을 수 있었다.
없는 전투 센스를 키울 수는 없으니, 결국 언럭키는 차선책으로 다른 것을 골랐다.
-으음. 정말 이걸로 하시겠습니까?
-예.
-폐하는 참…취향이 확고하신 것 같군요.
언럭키가 고른 물건을 보고 추기경은 떨떠름해했다.
사제가 선택할 만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추기경 역시 사제이면서 언월도를 휘두르는지라 이해했다.
언럭키가 시선을 들어 앞에 놓여져 있는 커다란 갑옷을 봤다.
“흐흐. 역시 교단이 좋긴 좋아.”
하늘을 향해 날아오는 천사의 날개가 작게 장식되어 있는 갑옷은 하나의 예술작품 같았다.
[세인트크리스의 신성한 광휘]
-아이템 등급 : 레전더리.
무려 보라색 빛이 흘러나오는 명품!
척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이것이 바로, 앞으로 언럭키를 지켜줄 물건이었다.